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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세윤박사 바울신학 강의 정리

청명하늘 2008. 10. 10. 16:04
 

바울신학 강의


                      한신대학교 신학과 김창락 교수님의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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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연대기(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바울의 연대기는 33년정도이다. 약 3년간 아라비아에 있었는데, 이곳은 나바티아왕국이다. 신약시대의 아라비아는 다메섹부터 요단강 동편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바티아왕국은 다메섹 동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서부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서 바울은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 증거로는 갈라디아서 1장 13절 이후를 들 수 있다. 그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추격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도망을 해 왔다.

    3년후에는 예루살렘으로 게바를 만나기 위해서 올라갔다.(1차 예루살렘 방문) 올라가서 그는 15일(짧다는 개념)간 있었다.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적대자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바울은 그의 모든 말들을 그의 적대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다. 바울은 게바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올라갔는데, 15일동안 있었다. 15일동안에 바울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바울이 보름동안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원사도들과 그외의 사도들에게 복음에 관해서, 예수에 관해서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후에는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났다. 진짜 열두 사도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열두 사도 모두를 만나야 하는데 바울이 만난 사람은 베드로와 야고보뿐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바울은 사적인 교우 관계일뿐이다. 갈 1:17절의 "3년 후에"는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낸것인가? 아니면 다메섹에서 3년을 지낸 것인가? 이것의 표현 자체가 무엇을 기점으로 하는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둘다 가능하나, 전후 문맥이나 심리에 따르면 이때의 기점이나 기준은 다메섹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3년은 아라비아에서 지낸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 후 바울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자 소문이 나고 유대인들이 바울의 변화에 대해서 놀랍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갈 2:1을 보면 그후에 십사년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메섹을 기점으로 했는가? 아니면 1차 예루살렘 방문을 기점으로 삼았겠는가? 이 경우에는 1차 예루살렘 방문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차 예루살렘 방문 - 갈2:1)

    2차 예루살렘 방문 기간동안 사도회의가 있었다. 이후에 안디옥 사건이 일어난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시리아와 길리기아 선교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안디옥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바울의 2차선교여행(AD 50년에 시작)은 유럽선교이다. 마게도니야, 네아폴리아를 지나서 첫 번째 교회를 빌립보(알렉산드리아 대왕의 아버지 이름)에 세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중에서 바울이 세운 첫 번째 교회는 유럽에 있는 빌립보 교회이다. 물론 이 전에 바울이 교회를 세웠는지 안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거기서 박해를 받자 서쪽으로 나가서 데살로니가(어느 왕국 공주의 이름)에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바울은 예수와는 달리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 다시 박해를 받자 베뢰아를 내려간다. 베뢰아에서 선교가 성공했다는 기록은 없다. 유대인들이 베뢰아로 와서 다시 박해하자 바울은 실라와 나머지 사람을 남겨두고 배를 타고 아데네로 간다. 그곳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 다음에 고린도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아굴라(천막 제조업자, 브리스길라의 남편)와 브리스길라를 만난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유대인인데, 로마로부터 추방을 받아서 고린도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49년에 글라디오 황제 칙령(로마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칙령 - 유대인들이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이든지 기독교인이든지 모두 추방을 당하였다. 바울은 이들의 집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약 18개월동안 체류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쓴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이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신약성서 27권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이다. 이 기간동안 바울은 고소를 당해서 아카야주의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을 받는다. 이것은 바울의 절대적인 시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것을 통해서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른 시기를 알아 볼 수 있다. 갈리오 비문에 보면 갈리오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써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알아보면 갈리오의 재임 기간은 50년 전후이다.


      3차 선교여행(52년)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서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에 있으며, 아테네와 거의 같은 위도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바울은 2-3년간 체류하였다. 여기에 머물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 전서를 썼다. 둘중에 어느 것을 먼저 썼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 둘은 거의 동시에 쓰여졌으며, 3차 선교여행 초기에 쓰여졌다. 중간에 고린도를 방문하였다. 그후 에베소에 돌아와서 다시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쓴다. 첫째 편지가 고린도 전서이고 두 번째 편지가 고린도 후서이다. 고린도 후서는 최소한 2개 이상의 편지가 인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 증거로는 처음과 뒷부분이 분위기가 다른 것을 들 수 있다. 고린도 후서가 여러 개의 편지가 합쳐진 것이라면, 눈물의 편지가 먼저 쓰여졌을 것이다. 그 후에 바울은 빌립보와 빌레몬서(옥중서신)를 썼다. 이 둘은 옥중 서신인데 일반적으로 옥중 서신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맞지 않다. 옥중 서신은 바울이 에베소나 그 근처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도를 보냈다. 그후 바울은 소식이 궁금해서 육로의 중간 지점인 마게도니야로 가서,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좋은 소식을 듣는다. 거기서 또는 에베소에 돌아와서 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쓴 편지는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 후서이다. 바울의 진정서신은 7개인데, 하나는 고린도에서 썼고(50년쯤에 쓰인 데살로니가 전서), 다섯 개는 3차 여행의 체류지인 에베소에서 썼다.(52년에서 55년쯤에 쓰여진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 후서) 나머지 하나는 어디서 썼는가?

        바울의 선교 여행의 끝은 스페인이다. 그 전에 그는 이방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이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유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허용하지 않았다. 바울을 고린도로 넘어가서 겨울을 지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바울은 이곳에서 3개월을 지내는데, 이곳에서 그는 로마서(55년이나 56년쯤에 쓰임)를 쓴다. 이것은 바울의 진정서신중에 마지막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은 스페인 선교를 앞두고 있는데, 만약 로마 교회가 중간에서 바울의 선교를 방해하면 지장이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

         바울은 56년에 예루살렘으로 갔다.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이다. 바울은 이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게 많은 기도를 부탁하였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체포를 당하게 되고 2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58년에 로마로 압송당한다. 그 후에 로마에서 그는 순교를 당한다.

바울이 활동한 결과는 50년에서 55년(56년) 사이에 활동한 것의 결과이다. 5-6년 사이에 활동한 바울의 결과가 그가 쓴 문서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1998. 3. 17(화)

바울의 생애를 두부분으로 나누면, 나누는 기준은 다메섹 사건이다. 다메섹 사건 이전의 바울을 평가해보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바울에서는 좋은 평가를 하지 않지만, 어떠한 입장에 서는가에 따라서 바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바울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바울은 모든 입장에서 다 좋지 못한 평가를 하고 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바울에 대해서 착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 Church)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른 사람들이다. 여기서의 교회는 건물의 개념이 아닌, 사람들의 모임인 공동체의 개념이다.

갈라디아서 1장 13절부터의 내용을 살펴보면......

14절에서 말하는 전통이란,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신앙의 전통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세의 율법을 랍비들이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구약성서의 모세 율법은 안 지키고, 랍비들이 해석하는 것만을 지켰다는 말이 아니라, 둘을 구별없이 이들을 유대교적인 유산으로 생각하고 두가지 모두를 지켰다.

빌립보서 3장 1절부터의 내용을 알아보자......

"개들을 조심하십시오"라는 말은 바울이 자신의 적대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할례를 개역성경에서는 "손할례"라고 나오는데, 여기의 '손'자는 損(덜 손)이다. 여기서 바울은 상대방이 그들의 육체를 가지고 주장을 하자, 바울도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 자랑을 한다. 이것은 그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민족이라고 얘기하면서 자랑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약속의 땅에서 유일하게 출생한 아들은 베냐민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입장도 있다.

"히브리파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히브리인이라는 말의 어원은 Apiru이다.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파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랑거리로 생각하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이것은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열성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유대교를 위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가치관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자기의 출신성분, 학식, 열성이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에는 이러한 것들이 해로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주 예수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다는 말은 주 예수가 가장 고귀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필요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구원이란 자기 능력으로 열성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義)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이 새로이 바뀐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 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은 것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도 그리스도와 같은 대열에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회개하기 이전의 바울은 모든 사람이 말하는 반인륜적인 그런 부정적인 인물은 아니었으며, 유대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아주 박식하고 열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로마서 7장 24절(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시겠습니까?)을 보자. 율법을 지킬려고 하면 할수록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슬퍼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잘못된 것이고, 여기서 슬퍼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나"이다. 직접적으로 바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일반으로서의 "나"이다.

디모데전서 1:15


다메섹 사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메섹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3곳이 있다. 이것들은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다메섹 사건 이야기와 바울의 진정 서신에 있는 다메섹 사건의 이야기의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자.


사도행전의 다메섹 사건에 대한 세 개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아라.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만 3개의 다른 전승이 존재하는 것이다.



1998. 3. 24(화)

바울의 회개 이야기의 해석사

1. 심리학적인 해석

바울의 회개 이야기를 해석할 때, 우리가 "원숭이 엉덩이는 백두산"이라는 식의 해석을 해 왔다. 회개(회심)는 심리적인 현상이다. 그러면 이러한 심리적인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심리학(예전에는 철학의 한 분야로 있었다.)이라는 학문이 독립적인 하나의 학문이 된 것은 19세기 말의 분트에 의해서이다. 그는 실험심리학 교실을 처음으로 개설한 사람이다.(1879년) 이것은 실험을 통해서 심리학을 한다는 방법론을 개설한 것이다. 이로 인해 심리학이 하나의 독립된 과목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점점더 신학에도 심리학적인 해석이 가해지게 되었다. 그러면 바울의 회개가 일어난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해서일까? 합리적인 방법으로 심리학적으로 보면 초자연적인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전에 바울의 마음속에 어떠한 마음이 있었길래 이러한 심리적인 변화들이 일어났을까? 이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보도록 하자. 바울의 마음속에 두 요인이 있다면 심리학적인 해석은 주로 부정적인 요인을 찾는다. 그러면 부정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가책으로서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오는 양심의 가책이다. 또 이외에는 긍정적인 요인도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기독교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바울이 회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 좋은 인상은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는 신앙에의 열정이다. 그리고 경건하고 윤리적으로 착실한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인상일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요인이든지, 부정적인 요인이든지 이에 대해서는 뚜렷한 증명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성서를 바탕으로 한 지금까지의 해석은 성서를 잘못 주석한 것에 대한 결과이다. 긍정적인 요인이든지 부정적인 요인이든지 바울속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심리현상은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한 세기 이상 주류를 이루었다.


2. 체질적 해석 방법

바울의 회개는 체질적인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갑자기 변한 것은 육체적이나 심리적으로 연약하고, 부드러우며 감수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그만 것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이렇게 변했다는 것이다.


3. 환경론에서 해석하는 방법

"여자는 분위기다"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 이런 방법으로 바울에 대해서도 해석을 하는 방법이다. 바울이 변하게 된 것은 분위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분위기는 다메섹 주변의 아름다운 분위기이다. 또 이와는 달리 황량한 분위기를 생각할 수도 있다.


4. W.G.K mmel(큄멜)의 해석 방법

이러한 심리학적인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을 하면서 1928년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W.G.K mmel(큄멜)이다. 그는 자기의 논문에서 지금까지의 해석 방법들은 모두 틀렸다는 파산 선고를 한다. 모두가 공상(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파산 선고를 내리고 큄멜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조그마한 오두막집 하나를 세운 것과 같았다. 심리학적인 해석에서는 바울이 회개를 한 심리학적인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큄멜은 바울이 회개를 했다는 것은 초대 기독자들의 선포(예수가 부활하였다. 예수가 메시야였다.)가 옳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는 물음이 바뀐 것이다.(심리학에서는 원인이 되는 심리현상을 물었으나, 큄멜은 바울의 회개가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 것이다.)


5. 종교사학적인 해석의 방법

이제는 새로운 것을 묻기 시작한다. 바울이 예수가 메시야이고, 예수가 옳다고 깨달은 것은 바울의 마음속에 부활사상이나 메시야 사상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접착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예수의 선포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려면 바울의 마음속에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접착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유대적인 전통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고,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 살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가지의 답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유대쪽을 살펴보자. 바울은 유대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구약성서의 전통과 묵시 문학적인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메시야에 대한 사상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바울이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헬레니즘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고 보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상적인 계보나, 사상적인 접착점을 찾으려고 하는 방법을 종교사학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서양에서 바울에 대한 해석은 이런 방법론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지금은 주로 종교사학적인 방법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더 나아가야 한다.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기독교는 사회학적으로 어떤 계층에 속했는가? 그리고 바울은 사회학적인 측면으로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가? 바울은 지식층이며 유대교내에서도 장래가 총망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다. 바리새파적인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메시야가 나타나고, 자기들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하자,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이다. 이 때 바울의 입장은 사회적인 강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며, 초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인 약자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의 바울은 니체와 똑같은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말하면서 초의 윤리, 강자의 윤리를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의 논리는 니체의 논리와 똑같은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가 되었는데, 이렇게 바뀐 것의 이름을 붙이면, "회개, 소명, 전향, Frontwechsel(사회적인 자리바꿈)"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회심"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회심"이라는 말은 심리학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개종"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도 유대교의 한 종파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바울이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바울이 회개하기 이전에 믿던 하나님과 회개한 이후에 믿은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8. 3. 31(화)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체험한 사건을 무엇이 가능하게 했겠는가?

1. 그것은 기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각 개인의 신앙의 문제에 달려 있는 것이다.

2. 두가지 요소(기적, 세계 내적인 원인)가 합동해서 작용한 것이다.

① 두가지 요소가 똑같이 작용했다.

② 두가지 요소중에서 기적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③ 두가지 요소 중에서 세계 내적인 원인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숯불은 기적이고, 화로는 세계 내적인 원인이다. 바울에게만 기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 바울속에 있는 자연적인 요소가 기적을 위한 유리한 접합점을 제공하였다.(기적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또는 기적이 자연적인 요소로 하여금 회개를 일으키도록 작용을 하였다.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적은 이것을 폭발시키는,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세계 내적인 원인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3. 기적을 제외하고 세계 내적인 원인에 의해서만 작용한 것이다.

철저하게 자연 과학적인 법칙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은 신화만으로는 살 수 없으며, 또한 완전히 신화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다. 기적을 부인하더라도 부인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① 기적을 부인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입장

바울이 말하기를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한다. 일단 이 바울의 고백은 진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런 체험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미 바울의 잠재 의식(무의식)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그것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현현이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였다는 입장이다. 지금에 와서 심리적인 해석에서는 탈피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1:11 ~ 에 따르면....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도들에게서 받은 복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복음과 똑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복음이 거짓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하 바울은 자신의 복음은 사도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것이다.

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12절) 그러면 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계시(?)이다. 이 계시는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16절에서 다시 계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1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주체이다. 그러나 1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대상이며 주체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같은 사건(다메섹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이것을 어떻게 조화할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계시는 지금처럼 교리적으로 굳어진 개념이 아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 - ( - 마태복음 16장에서의 계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각성을 시키고,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은 무엇인가? 는 동작동사로서 원래의 뜻은 '덮개를 벗기다'라는 뜻이다. 덮은 것을 벗기면 덮여진 것이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덮개를 벗기다', '드러나 보이다'라는 뜻이 된다. 이와는 달리 '비밀을 폭로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바울에게 알려준다는 것은 '비밀을 폭로하다'라는 뜻이다. 첫 번째의 뜻('덮개를 벗기다', '드러나 보이다')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계시"라는 말은 "나타나다"의 뜻이다.

여기서 바울은 어떠한 뜻을 의미하였겠는가? 바울이 하고자 한 말은 무엇인가? 두 가지(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나타나 보여주었다. & 하나님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중에 어떤 것일까? 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한 고린도전서 15장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보이시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보여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게바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 다음에는 바울 자신에게도 보여주셨다는 말이 나온다. 이 당시 사도의 권위는 부활한 예수를 보았느냐 아니면 보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었다. 게바가 제일 먼저 보았다는 것은 베드로의 권위를 크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바울도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디서 보았는가? 다메섹 도상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 현현"(Christophanie)이다. 이렇게 볼 때 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다. 고린도 전서 1:7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읍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의 '나타나심'이라는 말은 로 표현되어 있다. 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현 사건을 영화로 만들 때, 최소한도로 필요한 사람은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도 꼭 필요하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theophanie)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체험하였는데, 그 목적은 이방선교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이방선교라는 것은 무엇인가? 독일에서는 Heidenmission으로서 이방인에게 선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사도행전 9장까지는 이방인 선교라는 말이 있지도 않을 정도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회개하는 것과 이방인 선교는 밀접한 관계를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예수를 만나자마자 "이방 선교"라는 말을 사용하였을까?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에서의 이방선교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그 당시 예루살렘 원시교회에서는 두 파(헬라파와 히브리파)로 분열되었다.(행6:1-6) 히브리파는 원시교회 기독교인 중에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헬라파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헬라문화권이기 때문에 일상언어가 헬라어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초대교회에서 왜 두 그룹이 있었는가?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히브리파는 본래 본토박이 유대인이었으며, 헬라파는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드리는 장소도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파 사람들에 비해 헬라파 사람들이 푸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의 해결 방법으로 베드로는 본래 우리들의 본업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구제하는 일은 본업이 아닌에, 여기에만 매달리니까 여러 지장을 받으니 우리들은 전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나머지 일은 일곱 사람을 뽑아서 시키도록 하자고 제안하다. 일곱 집사로 뽑힌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모두가 헬라식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두 파 사이의 차별이 된다고 해서 갈등이 발생해서 집사를 뽑았다면, 최소한 4 : 3정도로 뽑아야 하는데, 7사람 모두 헬라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사도행전 6장 8절부터 일곱 집사의 대표인 스데반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데반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다. 초대 교회에서 기적이라는 말은 선교의 현장에서 쓰는 말이다. 스데반의 본업은 구제 전담자인데 구제를 한다는 말은 전혀 없고 백성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 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만 나온다. 그는 본업을 소홀히 한채 복음만을 전했다. 스데반의 활동은 구제 활동이 아니라, 복음 선포 활동이다.



1998. 4. 7(화)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활동은 구제 활동이 아니라 전도활동이었다. 고발당해서 하는 최후진술에 관해서 사도행전에는 스데반의 설교가 굉장히 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기가 고발당한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고,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긴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정에서 그런 긴 이야기를 하도독 내버려 두었을까? 그래서 역사적인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이 스데반의 설교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것은 아직도 정확한 답이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유대교의 회당에서 아이들에게 이스라엘 역사를 가르치던 이야기라고 보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현상황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는 성전을 짓는 이야기가 나온다.

성전은 짓는 이야기

(사도행전 7 : 37 - 예수 당시에는 제2성전이 있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이 굉장한 자랑거리이다. 그리고 유대민족을 지탱해주는 지주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성전안에 계신다고 믿었는데, 스데반은 하나님은 성전안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혁명적 발언이다. 하나님이 성전안에만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두는 결과이다. 스데반이 고발당한 이유중의 하나가 성전에 대한 평가절하이다.

"목이 굳고 할례받지 못한 자들아 ~ "

그 당시 할례 받은 사람과 할례 받은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이다. 초대 기독교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과 진보적인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에서 가장 큰 것은 할례 문제이다. 스데반이 고발당할 때 이유는 모세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가 할례 문제이다. 진보적인 기독교나 스데반 일파의 선교에 대해서 고발할 때 가장 구체적인 문제는 할례 문제이다. 스데반이 강조하는 것은 마음과 귀의 할례이다. 마음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을 순종하고, 귀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한 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도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들을 박해하였다.

"이제 의인이 ~ "

이때의 의인은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굉장한 자랑거리로 여겼다. 그들은 율법을 생명보다 중요시 여겼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믿었고, 그 징표로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율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특권이다. 유대교의 전설에는 율법은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천사를 통해서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천사를 통해서 받은 율법이라는 말속에는 율법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한 뜻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방인과 똑같으며, 율법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고발할 때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했으나, 이것에 대해서 위의 말로 대처한 것이다.


여기에는 성전에 대한 것, 할례에 대한 것, 율법에 대한 것의 세가지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스데반이 ~ "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를 당하는 장면이다. 그러면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죄목이 무엇인가? 스데반이 마지막에 성전공격하고, 할례에 대한 이야기 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서 사형을 시킨 것이 아니라 다만 격분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인자가 보입니다"라는 말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것도 아니다. 스데반의 죄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죄목이 없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죄목도 없었다.


사도행전 8장 -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한 초대교회의 박해 사건

사울의 이름은 스데반의 죽음과 연관되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날에(스데반이 죽은 날에) 예루살렘 교회 ~ "

박해를 당하자 사도들외에는 모두 사마리아 지방으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초대교회를 박해하는데 모두 도망가고 사도들만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또한 사마리아 지방으로 도망갔다는 것도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예루살렘 초대 기독교도 두 파(히브리파-아람말을 사용하는 본토 유대인-와 헬라파-헬라말을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출신 기독교인)로 나누어서 생각해야 한다. 스데반은 헬라파 - 중심인물은 일곱 집사 - 에 속한 사람이다. 이 두 집단은 예배도 따로였다. 이 당시에 일어난 박해는 스데반이 속하는 그 집단에게만 가해진 박해이다. 아람말을 사용하는 본토 기독교인들 - 중심인물이 열 두 사도 - 은 박해를 받지 않았다.


" ~ 경건한 사람이 스데반을 장사지내고 ~ "

경건한 사람이라는 말은 신학적인 용어인데, 이방인이면서 유대인으로 바꾼 사람은 귀화한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귀화할때는 할례를 받고 유대의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경건한 사람은 그 당시에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귀화한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의 신분으로 유대교의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경건한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 "

이제부터는 사울의 박해 활동이 나온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과, 박해 활동과 관련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다."

여기서의 말씀은 복음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빌립은 일곱 집사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원래 임무는 구제를 하는 것인데, 그가 왜 도망가면서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서 말씀을 전했을까? 빌립이 도망가면서 마음이 바뀌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빌립은 원래부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무리는 빌립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가 기적을 보이는 가운데서 ~ 그 성에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빌립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이름을 전하였다. 사마리아성에 가서 빌립이 복음을 전하였는데, 누구한테 전했겠는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그 당시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 사람들을 접촉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빌립이 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열 두 사도들은 그 소식을 듣고, 분개하지 않고 직접 사마리아로 와서 빌립을 도와 주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열두 사도들은 ~ 사마리아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 기자가 사도행전을 쓸 때는 열두 사도와 일곱 집사들간의 갈등을 은폐하였다.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다. 이들은 가서 성령을 받도록 하였다.

"그런데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기를, 일어나서 ~ "

빌립이 내시를 만난 이야기인데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내시는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정을 맡은 고관이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완전 이방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책을 읽고,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대인으로 귀화(Proselyte)한 사람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시이기 때문이다.(신명기23:1) 이 전도는 이방인 선교라고 하기도 곤란하고, 유대인 선교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왜인가? 사도행전 기자는 이것을 노린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 기독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방 선교의 방식문제이기 때문이다. 내시에는 할례(Beschneidung)의 문제가 연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6장에는 초대교회 두 파의 갈등이 나온다. 7장에는 스데반의 순교가 나온다. 8장에는 스데반 순교 때문에 스데반 일파가 사마리아 지방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다음의 이야기는 11장 19절로 이어진다. 9장과 10장은 괄호로 묶을 수 있는 부분이다. 8장의 빌립의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부각되고, 나머지의 사람들은 11장 19절에서 등장한다.


사도행전 11장 19절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 "

도망간 사람들은 아직도 유대인 선교만을 하고 있다. 왜 그것을 강조하는가? 이방 선교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이방 선교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의 모든 문제들이 이방인 선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방인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러면 그 앞의 사람들 - 사마리아 사람들, 에디오피아 내시 - 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방 선교를 어떻게 정의내리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방인 전도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비평상으로는 여기서는 그리스 사람도 되고, 헬라파 사람도 된다. 그러나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이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내용상으로는 그리스 사람이 더 적절할 것이다.

"주께서 그들을 돌보시니, 믿게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왔다. ~ "

예루살렘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또 축하를 보냈다. 초대 기독교에서 이른바 이방 선교는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사도행전 11장 20절에 의하면 안디옥에서 스데반 일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98. 4. 14(화)


빌립이 헬라사람(헬라파 사람이 아니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초대 기독교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도행전 1:8절에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오순절 성령을 이미 받았음),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은 이방인의 선교에 대한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사도들이 이 명령을 언제 수행했는가? 사도들이 선교 전략상 모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사도회의를 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싫으니까 전하지 말자고 한 적도 없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전도이며, 교회에서 복음을 빼면 교회는 시체이다. 사도들은 예수의 명령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베드로에게 환상이 보여지면(사도행전 10장의 이야기)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알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실제로 베드로가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저자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로써, 이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써 놓은 것이다.

10장에서 베드로외에 고넬료라는 사람도 베드로를 찾아 가라는 환상을 본다. 베드로와 고넬료와의 만남에서 베드로는 28절의 이야기를 한다.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과 만나는 것은 안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보냈기 때문에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 와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예수가 어떤 분이라는 복음을 전하였다. 옛날에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도들은 기뻐하였다. 이번에 베드로가 이방인이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11:3절과 같이 베드로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11:4-10절에서 베드로는 사도들의 비판에 변명을 하고 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자초지정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필요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한 것은 무슨 이유때문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에 사도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잠잠하였다.

이방인 기독교인 1호라고 할 때 고넬료, 사마리아 사람들, 에티오피아 내시등 모두라고 할수도 있다. 이야기의 순서는 8장의 이야기가 11:19절로 이어지고, 9장과 10장은 다른 경로로 이어진다. 10장의 이야기와 11장의 이야기를 보고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만약 11장이 먼저라면 이방인 기독교인 1호는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들이다. 9장과 10장을 괄호안에 묶으면 사도행전 저자가 말하려는 이방인 선교는 스데반 일파에 의해서 안디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초대 기독교는 사도들의 집단과 일곱 집사를 중심으로한 스데반 일파가 있었는데, 사도행전 저자가 이상적인 교회상(예루살렘 원시교회)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서 모든 교회가 뻗어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는 예루살렘 사도들을 중심으로한 예루살렘 원시교회가 있고 스데반을 중심으로하는 일곱 집사의 집단도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하부 구조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였다. 안디옥 교회는 나중에 이방인 중심교회가 된다. 이방인 선교는 스데반 일파가 안디옥에 가서 테입을 끊고 그 안디옥 교회를 기반으로 이방 선교를 시작하였다. 바울도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이방 선교를 하였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인 이방 선교는 스데반 일파가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것은 예루살렘 원시교회에서 거기에서 모든 교회가 뻗어 나갔다는 이상적인 교회상과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9장과 10장의 이야기를 끼어 넣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 선교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결국은 이방 선교의 테입을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가 끊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고, 예루살렘 원시교회에서 세운 이상적인 교회상에 맞게 만들어낸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베드로가 한 사건이 먼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스데반 일파의 이방인 선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면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왜 이방인 선교가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문제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문제된 이방인 선교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된 것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할례 문제에 대한 것이다. 사실은 초대 기독교에서 처음에는 복음을 전할 때 할례를 했을 것이지만, 얼마가 지나서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가 된 것은 두 번째 단계에서부터이다. 이로 인해 초대교회에서 보수와 진보간의 싸움의 벌어졌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유월절부터 50일째 되는 날. 유대교의 절기. 이때에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성령강림절이 된다.)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은사를 받은 것은 방언의 은사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입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순절날 사도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사는 경건한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으로서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이었다. 사도들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지중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당시 세계라는 것은 지중해 일대를 말하는 것이었으며, 이 부분에는 그 당시 알고 있는 세계의 모든 민족을 총망라하고 있다. 엘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엘람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엘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과"라는 말과 "개종한 이방인과"라는 말이 나온다. 각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 중간에 "유대인과"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은 어법상 맞지 않는다.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는 10장과 11장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지 않은 지금 이 부분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다 유대인인데, "유대인과"라는 말이 나온다.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말하지 말고, 모든 민족을 다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전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유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할려고 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래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강단에서 하면 신분증을 확인하고 강단으로 들여보내면 되지만, 거리에서 전할때는 이렇게 할 수 없다. 어쩔수 없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할수밖에 없었다. 유대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개종한 것은 실제로 첫날부터 있었던 일이다. 물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그곳에 사는 이방인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본문에 "유대인과"라는 말을 끼어 넣은 것은 11장의 이방인 선교에 관한 이야기와 맞추기 위해서였다. 원문상으로는 이 말이 없는 편이 나을 것이다.

초대 기독교에서 문제가 된 이방인 선교는 할례나 율법의 준수나 그외의 것들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한 이방인 선교는 최초로 언제 시작되었는가? 스데반 일파에 의해서 이미 안디옥에서 시작되었다. 스데반 일파가 박해를 받은 것은 모세, 성전, 율법을 비판하는 진보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모세를 비판한 것은 할례를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진보적인 이방인 선교는 스데반 일파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던 일인 복음 전파를 계속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런 상황속에서 등장하여 이방인 선교를 시작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전향을 한 모든 목적인 이방인 선교로 이어진다. 바울이 부름을 받는 장면(사도행전 9장)에는 이방인 전도가 문제가 되지도 않았는데(이방인 선교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방인 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바울이 부름을 받는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스데반에 의해서 이방인 선교가 문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 바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인물이었다.



1998. 4. 21(화)

초대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른바 예루살렘 사도회의이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사도회의라는 것이 정말로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다른 문제이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사도회의라는 것이 사도행전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 전반은 주로 예루살렘 원시교회에 대한 것이 나오고, 후반은 바울의 이방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초대 기독교 선교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다. 사도회의에 대한 이야기는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 모두 나온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보도되어 있는 내용과 갈라디아서에 보도되어 있는 내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두 개의 회의 내용이 전혀 다른 별개의 내용이라고 할 정도이다. 대충은 같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사도행전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갈라디아서의 기록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


사도행전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사도행전 15:1-)

사도회의는 약 48년, 49년에 열린 회의이다. 이 때의 교회는 열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원시교회와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한 안디옥 교회라는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안디옥 교회의 성격은 주로 이방 선교를 담당하였다. 이방 선교에 불을 당긴 사람은 스데반 일파에 속한 일곱 집사들이다. 그런데 거기에 바울이 가담한 것이다. 바울이 이방 선교를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이방 선교의 대표자가 된 것 뿐이다. 시작은 이미 일곱 집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왔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예수만 믿고, 할례도 받지 않고 기독교인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이 사람들(유대 기독교인)은 이러한 바울을 비판한 것이다. 이방 선교를 대표하는 바울과 바나바와 예루살렘 원시교회의 사람들과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안디옥 교회가 대표(바울과 바나바, 신도들 중의 몇 사람)를 예루살렘 교회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베니게(페니키아)와 사마리아지방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이지역은 이방 지역인데, 올라가면서도 선교를 하기 위해서 이 쪽 길을 택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와서 전체 교우들에게 보고를 하였다. 그러자 바리새파에 속했다가 신도가 된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요구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바울을 포함한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엄격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유대주의자(Judaisten)"라고 한다. 이러한 주의를 "유대주의(Judaismus)"이다. 유대주의는 기독교의 일파로서, 기독교내의 보수주의적인, 율법주의적인, 할례주의적인 일파이다. 유대주의(Judaismus)와 유대교(Judentum)를 구별해야 한다. 그래서 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보고는 전체에게 했는데, 회의에는 사도와 장로들만이 모였다. 그리고 이 회의는 사도회의가 아니고, "사도-장로회의"이다.


다음으로는 갈라디아서 2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처음에 14년후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14년의 기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문법적으로는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가능한데, 그것은 바울의 1차 이방 예루살렘 방문이다. 1차 때에는 와서 게바를 만나고 보름동안 있었으며, 야고보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사도행전식으로 말하면 바울이 이 회의라고 하면 이것은 3차가 된다. 바나바와 디도와 바울, 3명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바울과 바나바는 대등한 위치이고, 디도는 수행원이다. 그 다음에 "내가 그리로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의 이 편지는 갈라디아교회에게 보내는 것인데, 갈라디아도 지금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어느 누구의 호출을 받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올라갔다는 것이다. 내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럼 올라간 이유는 무엇인가? 오로지 자기가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할례도 필요없고, 모든 율법의 준수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단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전하였다. 이러한 복음을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설명(제출)하였다. 그러면 바울이 이것을 제출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나의 복음이 틀렸는지 아니면 맞았는지 확인해달라고 제출한 것인지, 아니면 어디가 틀린 곳이 있느냐고 따지기 위해서 제출한 것인가? 그 이유는 아마도 후자의 이유일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 복음은 틀린 곳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제출했다. 그러면 여기의 그들은 누구인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갈라디아교인들은 이 "그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12 사도들이다. 왜 12사도들인가? 갈라디아교회에 등장한 바울의 적대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인데, 이들은 사도들의 권위를 등에 업고 바울을 비판하였다. 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이다. 바울이 올라가서 그들에게 제출했다는 것은 너희들(유대주의자들)이 등에 업고 지금 나에게 트집잡고 있는 예루살렘 사도들을 상대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만나서 그들을 설득하였다. 이것의 이유는 바울이 지금까지 전한 복음과 지금 전하고 있는 복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 되고 마는가?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갈라디아서 1장6절부터) 어떤 의미에서 헛된 것이 되는가? 예를 들면 사도들이 지금까지 바울이 전한 복음이 모두 틀렸다고 결정을 내린다면,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장애를 받는다는 것이다. 막대한 지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방 선교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한 구원이 헛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디도를 수행원으로 데려갔다. 디도는 어머니는 유대사람, 아버지는 헬라사람으로 혈통적으로는 헬라 사람이다. 그러나 디도는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는 믿으면서 할례는 받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면 바울이 하필 디도를 수행원으로 데려간 이유는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되는 것을 제시하고 무엇이 나쁘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이방인한테 할례를 주자고 했는데, 이 청년(디도)을 보면 무엇이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 디도가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는 말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강요를 당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이것은 이미 할례문제는 논의가 다 끝나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디도는 그 자리에서 할례를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에는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의 원래는 "형제들"이다. 바울이 말하는 거짓 형제, 거짓 신도들이라는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들이다. 바울이 판단하기에는 이 거짓 형제들은 동기조차 나쁘다는 것이다. 진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쁜 동기로 들어온 이들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기로는 우리 신도들 사이에는 스파이가 있다는 것이다. 거짓 동기로 들어온 나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자들의 목적은 우리를 노예롤 만들어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러 온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인가? 여기의 우리는 유대 기독교인인 바울, 바나바를 포함한 일반 기독교인들인 갈라디아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할례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런데 이 거짓 형제들은 이 자유를 파괴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과거에도 그랬듯이, 예루살렘 회의 석상에서도 그렇듯이 바울은 잠시도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복음이 옳다는 확신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러했을까? 바울은 왜 이렇게 고집이 셌을까? 그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들(갈라디아 사람들)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복음의 진리"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유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현실이다. 이 말은 바울이 두 번 사용하는데, 안디옥 사건과 이 부분에서 사용한다.

실제 사도회의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 다음부터 나온다.

바울이 사도회의에서 일어난 경과와 결과에 대해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인들, 특히 그중에서도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적대자들은 바울이 옛날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에게 혼이 났는데도, 예전과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그들이 비판에 대해서 바울은 사도회의의 경과와 결과는 一點一劃도 변함없이 성서의 본문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6절에서 "유명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니까 처음부터 예루살렘 사도들이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바로 말을 바꾸어서 그들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제안("제발 이것만은 합시다"등등)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제한한 것이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모두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1998. 5. 19(화) - 대동제 첫날

갈라디아서 2장 11절부터 ~ 14절 - "안디옥사건"에 관한 이야기

이것을 누구의 입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대두된다. 바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석하면,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카톨릭의 비판을 받게 되고,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석하면,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의 비판을 받게 된다. 이것은 이방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왔는데, 왜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고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

게바가 이방 사람들(이방인 출신 기독교인)과 함께 먹었는데, 이것의 성찬의 음식인지, 애찬의 음식인지, 개인의 집에 가서 먹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여기서 '먹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미완료이다. 이것은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왔다.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이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공적인 사명을 띠고 왔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 게바는 할례받은 사람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게바는 물러갔다. 그러면 할례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는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이냐, 아니면 유대 기독교인들이냐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등이 있다. 그러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바울의 입장에서 해결하는 사람들도 게바의 체면을 어떤 식으로라도 살려주기 위해서 부연 진술을 덧붙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는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이 두려워서 물러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게바의 행동을 나머지 유대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바나바까지도 따라 했다. 바울은 이러한 행위를 "위선"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것이 위선 행위인이 아닌지는 바울의 신학적 판단일뿐이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복음의 진리"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복음을 통해서 누리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게바의 행동은 복음의 진리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똑바로 걷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정행(正行, Orthopraxis, )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게바는 정행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유대 사람이면서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문화를 수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귀화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말에 게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물론 게바가 잘못해서 바울에게 혼이 난 것을 인정하지만, 게바는 자기가 야단을 맞았을 때 아무말없이 바울의 충고를 받았다. 그럼으로써 우두머리 사도로써의 겸손한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게바의 체면을 어떤 식으로든지 살리려는 노력이다.

그러면 게바가 "내가 언제 이방 사람더러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하였습니까?"라고 주장을 하면 바울과 게바中 누구의 주장이 옳은 것이 되는가? 게바가 물론 캠페인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은 게바가 한 행동은 바울이 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바가 앞으로는 당신들과 교제를 못하겠다고 식사를 그만두었다는 것은 이방사람들이 게바와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이방 사람들이 유대인이 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게바의 의견보다 바울의 의견이 더 옳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음식 먹는 것 가지고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음식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 - 특히 예수와 관련되어서 - 가 많이 나온다. 성경에서는 하늘나라를 비유하는데에 잔치를 사용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식탁에 참여한다고 표현하였다. 종말론적인 기쁨, 구원의 기쁨을 잔치로 표현하며, 예수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기쁨을 밥상공동체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기쁨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예수의 밥상 공동체의 전통은 안디옥 교회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구원이 현실이 된, 구원의 기쁨을 표현해주는 것인데, 이러한 전통이 게바에 의해서 깨어진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이렇기 때문에 바울이 크게 비판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5 - 21절

이것을 바울의 "칭의론(稱義論)" 또는 "의인론(義認論)"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 신학의 핵심이다. 그리고 복음의 정수이기도 하다. 이것은 교회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신앙 조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론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998. 5. 26(화) - (오늘은 중간고사 답안지를 나누어주셨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안디옥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유대인들이 "우리도 할례를 받았는데, 할례만 받으면 되는데, 너희들은(이방 기독교인) 왜 할례를 받지 않느냐? 이것이야말로 진짜 차별이 아니냐?"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만일 유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할례를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이 구원받는 대열에 속하는 것을 결정하는 데 아주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한다면, 구원에 있어서 인류의 반절(여자)에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자들은 할례문제에서 논의 밖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은 여자가 구원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는 식구들의 다른 남자들에 의해서 덤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갈3:28에서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선포한다. 그리스 사람(헬라인)은 이방인을 대표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인종적인(유대사람, 그리스 사람), 종교적인, 사회적인 신분의(종이나 자유인), 성(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바울은 여성 차별주의자라고 생각되는데, 바울은 결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 부분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런 패턴은 고전 12:13의 전승을 이어받았다고 본다. 골 3:11(그리스도인/유대인, 할례받은자/무할례자, 미개인/스구디아인, 종/자유인)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 3:11에는 "남자와 여자는 차별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다. 오직 갈라디아서에만 남자와 여자의 차별에 대한 언급이 있다.

갈5:12에서 바울은 할례를 가지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은 자기의 지체를 자르라고 말한다.

갈 5 : 1 ~ 는 일반적인 훈계의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갈라디아 교회의 사용과 관련된 훈계의 내용이 나온다. 특히 갈 5:6에서 할례를 받거나 안 받거나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바울은 지금까지 그렇게 할례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을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는데, 바울은 그것을 복음의 진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고,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고, 단 할례가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의 차별을 위한 잣대로 사용될 때 그것을 반대하였다. 갈 6:11절에서부터 보면 또한 할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6:12)

외적인, 민족적인 우월감을 추구하는 자들("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5:15)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5:11에서 또한 할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서는 "할례"를 이야기하다가 "십자가"의 이야기를 한다. 할례를 전하는 행하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없어지고, 할례를 철폐하면 십자가의 걸림돌(거리낌)이 생긴다고 말한다. 왜인가? 그리스도는 소위 억눌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섰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사회의 약자편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할례를 전한다면 할례를 전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관계에서 종교적인 특권자인 유대인의 편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걸림돌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례를 철폐하면 이방 기독교인의 편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걸림돌이 생기고,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할례를 거부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거리낌을 짊어지는 것을 동일시하였다.


다음으로는 바울의 신학 사상, 주장, 가르침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바울의 신학 사상은 어떤가? 그의 사상을 "반할례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의 신학을 말할 때 보통은 "의인론(義認論)" 또는 "칭의론(稱義論)"이라고 한다. 한자말로는 '칭의론'이라는 말이 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의인론'이라는 말이 더 통용되고 있다. 바울 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의인론(칭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죄인이 값없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 신학의 중심은 "신비주의" 또는 "종말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칭의론"은 개신교의 독점물만은 아니다. 칭의론은 쿰란 문서에도 있고, 유대주의에도, 카톨릭에도 모두 있는 것이다. 개신교에는 수많은 종파가 있는데, 그 중에 칭의론을 거부하는 종파는 없다. 그러나 칭의론을 해석하는 데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교파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보통은 칭의론의 해석을 루터가 가장 잘 해석했다고 하지만, 그는 바울의 눈으로 칭의론을 해석해야 하는데, 루터는 루터의 눈으로 바울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칭의론을 가장 잘못 해석한 사람중의 하나인 것이다. 실제로 고대 교회까지만 해도 칭의론을 바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이용하였다.

어거스틴이 최초로 바울의 칭의론을 잘못 해석하였으며, 그 다음이 루터, 그리고 다음이 불트만이 바울의 칭의론을 잘못 해석하였다.(하버드대 교수인 스텐달 박사의 말)

그러면 진짜 칭의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칭의론은 "하나님께서 멸망받을 인간(거지에서부터 제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특히 죄인)을 은혜로 의롭다고 하신다(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과거의 모든 죄들이 탕감을 받는다고 하면 그것을 싫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칭의론은 실제로 문제가 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유대기독교인 측에서는 반대를 하게 된다. 최소한도로 이방인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도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 기독교인에 대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거기에 대해서 바울이 항의를 한다. 바울은 이러한 항의를 자신의 "칭의론"을 근거로 해서 유대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맞선 것이다. 유대 기독교인들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한 것에 대해 바울은 칭의론을 내세워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항의한 것이다. 이렇게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론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이나 루터, 불트만의 해석은 이러한 칭의론이 나오게 된 배경을 무시한채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5 - 21절에 바울 서신중에서 칭의론이 최초로 나온다. 갈 2:15-21은 안디옥 사건과 결부되어 나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론을 올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디옥 사건과 관련시켜서 해석해야 올바른 칭의론의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



1998. 6. 2(화)

바울의 칭의론(稱義論) - 갈라디아서 2장 15절부터~

- 수동태 :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 능동태 :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릅게 한다"

* "義로움"이란?

보통 이것은 사람의 윤리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인간을 의롭게 하시면 이 사람은 의인으로 변화시켰다고 하면 그것은 카톨릭적 해석이고, 루터식 해석으로는 이 사람이 여전히 죄인이지만 의인이라고 인정을 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 의인론은 칭의론이라고 하고, 카톨릭의 의인론은 성의론(成義論)이라고 한다. '의롭게 하다'를 뜻하는 독일말은 gerecht sprechen(의롭다고 말해지다 - 개신교의 칭의론)와 gerecht machen(의롭게 만들다 - 카톨릭의 성의론)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것은 이 두가지 중에 어떤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의인론을 보는 물음 자체가 잘못되어서 생긴 질문이다.

성서에서는 '의롭게 된다'는 것과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가 혼동되어서 쓰여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의"라는 말을 인간의 속성이나 윤리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발생되는 것이다.

원래 "의"라는 용어는 윤리적인 의미의 용어가 아니라 법적인 의미의 용어(법정 용어)이다. "의"라는 말은 법정에서 억울한 사람에게 재판관이 "너는 무죄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이다. 의사와 환자는 1 : 1 관계이지만, 재판에서의 재판관과 피고는 1(재판관) : 2(원고, 피고)의 관계이다.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중에서 어느 쪽을 옳다고 하는 것이다. 의인론이 말해지는 데에는 반드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정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억울한 사람, 약자의 편을 드시는 것이다.

바울은 의인론을 설명할 때 구약의 아브라함과 하박국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갈라디아서, 로마서)

1. 아브라함의 이야기

갈 3 : 6 ~ 14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롭게 되었다. ~ "

이것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는 칭의의 사건의 의미를 위해서 이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유대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나야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생각하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이다. 할례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축복은 세계의 모든 민족이 받게 된다. 그것은 약속이며,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은 그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갈3:14) 그 약속은 성령이다. 이렇기 때문에 실제로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갈 2 : 15 ~ 21 ▶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죄인인 이방 사람이 아닙니다. ~ "

이 내용은 바울 뿐만 아니라 유대 기독교인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에 구태여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귀화하지 않아도 되므로, 그렇게 행동했는데, 그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이 만약 죄인이라면 이러한 죄를 일으킨 장본인은 예수가 된다. 그러면 예수가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죄 제조인이 되는 것인가? 이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만일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범법자가 될것이다"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 바울이 무엇을 헐었는가? 여기서 쉽게 율법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율법이란 그 당시에는 함부로 헐었다 세웠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불가침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의 대답으로 율법중에서 몇가지는 반대했을 뿐, 십계명이나 그 외의 것은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대답할 수 있다. 위의 질문에 대해서 바울이 헐었던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유대주의"였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의 담"을 헐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하는 안디옥 사건과 바울이 할례없이 이방인에게 선교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자기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범법자가 된다는 것이다.

칭의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2장 21절의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게하여 주심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은 것이 됩니다."

결국 율법을 중요시하고, 이방인에게도 율법을 관철시킬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헛되게 하는 것이된다는 말이다.

로마서 3 : 21 ~ 26 ▶ 칭의론에 대한 이야기

로마서 3 : 29 ~ ▶ "하나님은 유대 사람뿐만 아니라 멸시받는 이방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고, 할례받은 사람이나 할례받 지 않은 사람의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4 : 9 ~ 12 ▶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 "

바울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복은 할례받는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이냐고 물어본 것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도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 기독교인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즉 이말은 이방 기독교인의 편을 드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한 사람이 스텐달이다.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갈등관계속에서 의인론을 이해하였던 이 사람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 사람의 잘못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는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의 갈등은 교회내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의인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갈등은 없으나, 어떤 형식으로든 여러 가지의 갈등과 대립이 존재한다.(인종간의 갈등, 동서간의 갈등, 지식층과 무식층의 갈등, 등등....) 어떤 명목으로든지 인간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는데 이것도 복음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억울한 사람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칭의론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간의 갈등이나 대립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의인론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스텐달의 결론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2. 누구를 의롭다고 하는가?

"의롭게 한다"의 의미를 능동태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릅게 한다"이다. 그러면 누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인가?

로마서 4:5절에는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그럼 "불경건한 자"는 누구인가? 헬라말로는 이 곳의 불경건한 자와 시편 1편에 나오는 악인과 똑같은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불경건한 자는 악인(The Ungodly)이다. 이 악인에는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도 포함된다.

갈라디아서 3:8절에는 "이방 사람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말이 나온다. 그 당시에 이방 사람들도 의롭게 하신다는 것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듣기에는 정말로 놀랄 일이다.

로마서 8:30절에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말이 나온다.

로마서 3:26절에는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의 맥락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당시로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도 지키지 않는 너무나 형편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멸시의 대상이었다.

로마서 8:30절에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말이 나온다.

로마서 8:33절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을 보면 "의롭게 하다"의 법정적인 맥락이 잘 드러난다.

3. "義"란 무엇인가?

바울은 그의 칭의론을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 )"에서 찾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대부분은 이 義를 추상명사(의로움, 의로우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義라는 것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nomen actionis(행위명사)"인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바로 세우시는 역사의 사건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도 "하나님의 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체데콧 야웨)라는 말은 헬라말로 하면 이다. 이 말이 아주 잘 드러나는 구약 성서가 사사기 5장 11절("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의 "드보라의 노래"와 사무엘상 12장 7절("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이다. 즉 "하나님의 義"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의로운 행위, 역사를 바로잡는 사건, 여호와의 구원행위이다. 그리고 이사야 46:12,13과 51:5,6 그리고 사사기 56:1, 시편 9:82, 43:1, 140:12, 35:28, 71:2, 71:15,16,24에서는 "하나님의 義"와 "하나님의 구원"이 동일한 뜻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義"와 "하나님의 구원"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義"에서 하나님은 "作者的 二格"이다. 주어적 이격, 목적어적 이격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 사건이 하나님의 바깥에서 따로 일어나는 것을 작자적 2격이라고 한다. "나의 죽음"에서 나와 죽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나의 방화"나 "나의 구타"처럼 그 사건은 내가 일으켰지만 그 사건은 나를 떠나서 바깥에 나가 있다. 이러한 것이 작자적 2격이다.

예를 들면 "나의 그림"을 내가 그린 그림으로 해석하면 나는 작자적 2격이 된다. 하나님의 구원에서 구원은 하나님에서 떨어져서 사람들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4. 무슨 일인가?

구약에서는 죄인에게는 정죄를 하고, 의로운 사람에게는 의롭다고 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구약의 공정한 판단, 공의는 모두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즉 구약의 하나님은 체벌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악인을 의롭다고 하신다. 즉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신이 아니다.



1998. 6. 9(화)

5.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인가?

구약에서는 죄인에게는 정죄를 하고, 의로운 사람에게는 의롭다고 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구약의 공정한 판단, 공의는 모두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즉 구약의 하나님은 체벌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악인을 의롭다고 하신다. 즉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

출처 : 니냐
글쓴이 : 화목 스프레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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