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0326)고난 중에 있는 자녀를 도우시는 하나님(막 1장 12-13절)

청명하늘 2018. 2. 27. 18:25

고난 중에 있는 자녀를 도우시는 하나님

 

성경: 마가복음 112-13(53)

찬송: 452(내 모든 소원; 505), 341(십자가를 내가 지고; 367)

설교: 2017032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최근 우리나라 기독교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 하고 있다는 소식들을 자주 듣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나라가 먹고사는 것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지던 때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한 끼 밥을 장담하지 못 했습니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문제로 여겨질 때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잘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교회에 나아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편하고, 부유하게 사는 것을 염려할 뿐, 정말 돈이 없어서 식사를 못 먹을 것을 염려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여기 무안의 이름의 뜻이, 힘쓸 ’, 편안할 해서, 수고하고 힘쓰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무안 지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맛있는 것, 더 즐거운 것, 멋진 것을 찾느라, 멀리 있는 천국이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성장을 멈추거나 후퇴하게 된 두 번째 까닭은, 신앙인들이 교회 밖에서 제대로 살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고, 헌금도 잘 하고, 자기들끼리는 잘 모이기는 하는 것 같은데, 동네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자기 가족에게마저 인정을 받지 못 합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역사를 공부해 보면, 예전 신앙인들이라고 하면, 얼마나 신실하고 겸손하고 깨끗하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가 한참 성장하고 발전할 때만 해도,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라고 하면, 교회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인정하고 존경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라고 하면 손가락질부터 나옵니다. 심지어는 개독교라고 욕합니다. 목사라고 하면 먹사라고 합니다. 장로, 권사, 집사는 그냥 명예직으로 여겨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것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뀌고 비난을 받겠습니까? 몇 십 년 동안,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못 하고, 겉모양만 그럴듯하고, 말만 잘 하고, 작은 손해조차 안 보려고 탐욕과 욕심에 따라 아득바득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가 교인들을 잘못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못 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 것에만 목숨 걸고 살지 말고, 이 땅 이후에 있을 다음 생을 기억하며 살라고 전해야 합니다. 교인들에게도 이 세상에 것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살지 말고, 하늘의 것을 바라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을 직접 행하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 했고, 지금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오히려 더 탐욕스럽고, 뻔뻔하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조차 모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기도해 봤더니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하셨다라고 핑계를 대며, 더 많은 죄를 저지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돌리지 못 할지언정,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가 이렇게 멈추거나 후퇴하는 이 세 가지 원인 중에서, 먹고 살만해져서 더 이상 하늘의 도움을 받으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일부러 가난해질 수도 없고, 먹고 사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의 삶이 거룩하지 못 한 것과, 잘못 가르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신앙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의 교회가 어려워지는 것은 제쳐두고라도, 우리마저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도 행하지 않고, 싫어하시는 것만 골라 행해서, 차라리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시겠습니까? 자기 혼자 그렇게 잘못된 신앙 속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미움을 받고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버림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만한 마음과 틀에 박힌 신앙에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잘못 가르치고, 또 교인들이 가장 착각하는 것들 중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 세상의 것으로 한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원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몸도 건강해지고, 잘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수준을 너무 낮추는 것이고, 복의 크기를 너무나 사소한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고, 우리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부유해지기 바라며, 열심히 순종하며, 또 신실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몸이 건강해지고, 병이 낫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나을 수 없는 질병을 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고, 못 하시는 일이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의 소원과 바람이 이루어지는 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것을 채우는 정도에 제한되지 않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귀합니다. 먼저는 우리처럼 교만하고, 부족하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베푸신 것 자체가 복이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잘 붙잡고 제대로 살아가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몇 십 년 부자로 사는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귀합니다. 이 복이, 우리가 이 땅에서 몇 십 년 더 살고, 건강하게 살고, 욕심대로 사는 것에 견줄 수 없을 만큼 큽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크고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복을 누릴 만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도 주시고, 인내하게 하시고, 기다리게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훈련과 고난을 겪고 있는 자녀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내용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록한 것을 비교해 보면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11절 분량으로, 누가복음 4장에서는 13절 분량으로 예수님이 어떤 시험을 받으셨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시험들을 모두 이겨내셨다는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인 마가복음에서는 단 두 절로 굉장히 단순하게 기록돼 있고, 예수님이 어떤 시험을 받으셨는지에 대한 시험의 내용도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시험을 모두 이겨내셨다는 내용마저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달리, 마가복음 속의 이 짧은 내용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다른 관점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신 내용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이 직접 임하시고, 또 사람의 소리로 사랑한다고,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있다면, 그 뒤를 이어 예수님이 어떤 큰 능력을 행하시는지, 그래서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과 높임을 받으시는 모습을 기대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것도 직접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음성으로 들려주실 정도라면, 당연히 고난 없이 영광만 있는 분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높은 지위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신분이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자격이나 조건을 채웠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사탄과 대결하고, 광야에서 고난 받았다는 사실에 더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해서, 광야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있다고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임을 받으셨고, 인간이 받을 수 없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확실한 표시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순종하는 이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을 기뻐하실 틈도 없이, 곧 바로 광야로 가서 40일을 머물러 있어야 하는 고난의 종, 순종하는 종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에서는 40이라는 숫자도, 광야도 모두 고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과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받기 위해 산에서 머문 기간이 40일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서는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좌절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주신 음식을 먹고 힘을 내서 호렙산에 다다른 기간이 40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 40일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시간의 길이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사역이 끊기느냐 아니면 계속되느냐 하는 기로에 있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도 그렇습니다. 광야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광야는, 고난과 두려움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광야에는 바위와 돌이 많아서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 합니다. 그래서 식량을 얻을 수 없고, 물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제대로 살 수 없고, 오직 공포와 들짐승들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광야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들짐승들이 많지 않습니다. 있어도 인가와 떨어져 있어서 들짐승들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는 드물고, 농작물이나 논밭이 조금 망가지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 이스라엘 지역의 들짐승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표범, , 멧돼지 등이 광야에서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손길도 없고, 그 누구도 함께해 줄 수 없는 외로운 곳에서,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인 들짐승과 함께 지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먹을 것, 마실 것도 없고, 밤이면 추위에, 들짐승들이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무려 40일을 지내야 했으니, 이 과정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사랑을 받는 분이셨지만 그렇게 온갖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탄을 이겨서 시험이 끝났다고 언급합니다만, 마가복음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고, 들짐승과 함께 계셨는데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중을 들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속에서 홀로 계시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시고, 천사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아들, 쉼 없이 시험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가 질문할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인을 받았고 성령님을 받았는데 왜 저주와 고난의 장소인 광야로 몰리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열심히 믿고 성령님을 받았는데 왜 고난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향해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씀을 하셨으면서도, 왜 그렇게 시험의 장소에다 냉정하게 내모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시면서도, 우리가 처한 고난의 삶에서 건지시지 않고 버려두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고난의 장소로 보내셨지만, 그 고난의 장소에 홀로 버려두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의 장소에 천사를 보내시고, 수종들도록 하셨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천사가 수종들었다는 것이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모양으로든 아들이 고난 받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기울이시고, 또 함께하셨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이 끝났다는 내용이나, 예수님이 시험에서 승리하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불어 천사들의 수종이 끝났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 동안에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모든 시험과 고난이 끝나기 전까지는, 천사가 반드시 수종들도록 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소망이 되고, 확실한 약속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성령님 충만한 것 같은데도, 주어진 상황이 우리의 판단과 계획과 소원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어려워지고, 힘들어지고, 몸은 더 아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오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기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이 고난을 받게 하셨으나,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함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과 그 방법대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처한 모든 상황과 갈림길에서도,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이기도록 돕는 천사들을 이미 보내시고, 또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모든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고난 중에 있는 자녀를 향해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바라보시고, 이기도록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고, 참고 이김으로써, 하나님의 인도와 구원을 받는 자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