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0723)하나님의 말씀은 법칙입니다(막 4장 1-9절)

청명하늘 2018. 4. 27. 19:36

하나님의 말씀은 법칙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41-9(58)

찬송: 254(내 주의 보혈은; 186), 546(주의 약속하신 말씀; 399)

설교: 20170723. 주일낮예배

 

 

 

연중 가장 무더울 때, 여러 일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주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요즘 날이 정말 덥습니다. 어제가 한 해 중 가장 덥다는 중복이었으니, 더운 게 당연할 때입니다. 날이 더워서 활동하고 일하기엔 너무 힘들긴 하지만, 더운 날씨 덕에, 논밭에 있는 작물들이 잘 자랍니다. 작물들이 얼마나 빨리 크는지, 하루 하루가 다르고, 아침과 저녁의 모습이 다를 정도입니다.

 

날이 더워도 감사할 수 있는 또 다른 까닭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충분한 비가 내렸다는 점입니다. 올 상반기를 돌아보면, 겨울부터 시작된 가뭄이 얼마나 심하고 길었는지 모릅니다. 겨울에 눈도 별로 안 내린 데다, 7월 초까지 제대로 된 비도 안 내려서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농사짓는 분들이 이번 초여름까지 가장 많이 한 일이 아마 논과 밭에 물을 주시는 일이었을 정도였습니다. 만일 그 동안 비도 안 오고, 날까지 지금처럼 더웠으면, 정말 올해 농사짓기 힘들었을 텐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충분한 비가 내렸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동안 가뭄이 너무 길고 심해서, 매일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몇 번씩 보는 게 일기예보였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있어서, 어디를 가서도 수시로 날씨 를 확인할 수 있는데,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일기예보를 보는 게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많이 하는 일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수시로 일기예보를 확인하면서 드는 생각은, 일기예보가 참 많이도 틀린다는 것입니다.

 

예보라는 것은, ‘미리 알려준다는 뜻인데, 워낙 많이 틀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일기 보도라고도 했습니다. 미리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알려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일기보도마저 틀리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2주 전에도, 비올 확률이 20%라고 예보된 날이 있었습니다. 비올 확률이 20%라고 하면, 안 올 확률이 80%잖아요. 그러면 비가 안 오거나, 와도 아주 조금 와야 합니다. 그래서 밤에 교회 이곳저곳의 문을 열어놓았는데, 비가 몇 시간 동안 거세게 와서 한밤중에 나와서 문을 닫은 적도 있습니다. 이 정도로 일기예보가 워낙 많이 틀리니, 도대체 일기예보를 믿어야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정도로 못 맞힐 정도면, 차라리 허리 무릎이 안 좋은 분들을 모아놓고, 날씨를 알아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일기예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정확하지 못 하지만, 사실 일기예보를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많은 돈이 투자됩니다. 인공위성도 이용되고, 컴퓨터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좋은 컴퓨터를 사용합니다.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가 일이 백 만원 정도 하는데, 일기예보에 사용되는 슈퍼컴퓨터는 몇 백 억 원씩 합니다. 또 곳곳에 첨단 장비를 두고 조사합니다. 그만큼 일기예보에 들이는 비용과 인력이 엄청납니다.

 

일기예보에 들이는 비용과 인력이 이렇게 엄청남에도, 예보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예전엔, 비가 온다, 안 온다, 기온은 어느 정도라고만 예보했는데, 요즘엔, 비올 확률이 몇 %라고 합니다. 비올 확률이 50%면 비 온다는 것인지, 안 온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확률로 계산하고 보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비싼 것들인 인공위성과 컴퓨터를 사용함에도, 정확하지 못 한 것은 물론이고,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짓지 못 하고, 그럴 수 있는 확률 몇 %, 안 그럴 확률 몇 %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자료와 도구를 통해 예측해 보지만, 실제 결과는 어떻게 될지 자신들도 확신하지 못 하기 때문에, 확률로 말해서 결과에 대해 책임을 피하려는 것입니다.

 

확률과 대비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법칙입니다. ‘법칙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있는 보편적이며 불변의 관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단 하나의 예외 없이, 오류나 실수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중력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위에서 물건을 놓으면 낮은 쪽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칙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세계 어디를 가든 예외 없이 그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물을 쏟으면 바닥으로 떨어지죠? 어린 아이들이 해도 똑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이나 중국 어느 지역을 가도 똑같기 때문에, 이것에 법칙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만일 모든 곳에서 똑같이 되었는데, 딱 한 곳에서는 물이 위로 올라갔다고 하면, 이것은 법칙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론이나 확률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많이 읽고 들어 잘 아는 말씀입니다. 네 가지 땅에 씨를 뿌렸는데, 씨가 뿌려진 곳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네 가지 땅에 모두 씨앗이 뿌려졌다는 공통점이 있고, 반면에 땅의 상태에 따라 얻게 되는 열매가 전혀 달라졌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말씀하신 까닭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시거나, 좋은 밭을 설명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1절에서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큰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 본문에서도 무리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군중’ ‘보통 사람들로 표현되는 이들은, 특별한 목표의식이나 방향이 없이, 쉽게 이리저리로 흔들리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습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하면, 하루 이틀 거리를 오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밤낮 주님이 계신 자리를 향해 나아오지만, 그 바람이 이루어지고, 욕망이 채워지면, 세상적인 욕심과 욕망을 향해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자기 바람과 소원이 기준이고, 주님 앞에 나아온 까닭이니, 이들은 자기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필요할 때는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이 한적한 곳으로 피하심에도 예수님을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권력자들에게 붙잡히고, 고난을 받으시자, 주님을 향했던 이전의 그 열광과 찬양이 조롱과 비난으로 바뀌고 맙니다. 자기들의 병을 고치고, 구원해 달라던 그 간절함이, 주님을 십자가에 목 박으라는 외침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리와 별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 무리들처럼, 세상 속에서 어울려 살면서, 삶의 중심을 세상에 두고, 필요할 때만 겨우 한 발 정도만 주님께 내밀며 살아갑니다. 이것만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세상에 더 큰 중심을 두고 있으니, 세상이 풍파에 따라 뒤틀리고 출렁거릴 때마다, 그에 따라 우리 삶도 이리 흔들, 저리 비틀거립니다. 이렇게 세상에 중심을 두고, 세상 흐름에 따라 살면, 그 결과가 뻔합니다. 아무것도 맺지 못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길 가, 돌짝밭, 가시덤불이 가득한 밭에 뿌려진 씨앗들은 하나도 열매를 맺지 못 합니다. 어떤 것은 싹이 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한참 잘 자리기까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먹거나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 하고, 그 전에 먼저 죽거나 시들고, 오직 좋은 밭에 부려진 씨앗만이 열매로까지 성장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우리 삶의 결과는 둘 중 하나로 결정될 것입니다. 구원을 얻거나 멸망당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못 얻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란 없습니다.

 

네 가지 땅으로 비유된 마음의 밭에 대해 여러 가지로 풀이합니다만, 오늘 본문 뒤 14(4)에서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고, 더불어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어떻게 바라보고 믿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씨앗이 길 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시작되기 전에, 사탄에 의해 믿음을 빼앗겨 영생을 향한 걸음이 끝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믿음이 조금 생겼으나, 어려움과 고통이 생기자, 이것을 이겨낼 만한 담대함과 참을성이 부족해서, 결국 그 믿음이 끊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가시덤불이 가득한 땅에 씨앗이 떨어졌다는 것은, 믿음이 어느 정도 성장하고 자란 것 같은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등으로 인해 중도에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땅들에서는, 그 크기와 자라는 정도에서 차이가 나긴 하지만, 열매까지 자라지는 못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믿음에 적용해 보면, 세 종류 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실한 신뢰를 보이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틀리지 않고, 그래서 안 될 것 같은 현실에서조차도 변치 않는 법칙으로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어야 함에도, 세 가지 땅과 같은 사람들은 이것을 확신하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어느 때는 그럴 수 있고, 그렇게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 할 수도 있다는 확률로 여기며 다가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전혀 믿지 못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이 땅에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봅니다. 성경 속 이야기들을 과학이라는 잣대를 드리우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데, 사람이 어떻게 물에 빠지지 않고 그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성인 어른만 5000명 정도를 먹이셨다는데, 먹으면 줄어들어야 하는 음식이, 오히려 비교가 안 될 만큼 늘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올 수 있습니까? 이렇게 사람의 계산으로 성경과 말씀을 계산해 보니, 예수님이 좋은 말씀도 하시고, 훌륭하게 사시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윤리책일 뿐 거기까지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들과 기록들은 모두 아주 먼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상 속 이야기로만 여깁니다.

 

또 돌짝밭처럼 믿음을 갖기 시작했으나, 믿음이 깊지 못 해서, 믿음보다 더 큰 갈등과 어려움이 오면 믿음이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통해, 감동도 되고, 믿음대로 살겠다는 다짐을 갖긴 하지만, 곧 현실은 성경이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지 않는다며 포기하고 맙니다. 신앙생활이 길었으면, 마음 깊은 곳에 믿음의 뿌리가 있어서, 회복할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 해서 결국 믿음과 영생의 길을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 같은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습니다. 신앙도 오래되고, 조금 더 참으면 좋은 열매로까지 성장할 수 있는데, 그 고비를 넘기지 못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고, 더 많이 갖고 누리고 싶은 욕심이라는 마지막 시험과 유혹을 이기지 못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들이 확실하게 여겨졌으면, 성공과 돈에 대한 욕심마저 이길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도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과 수단이 훨씬 더 그럴 듯해 보이고, 더 좋은 방법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될 확률이 50%로 같고, 세상의 방법은 70%로 보이는 정도일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수단대로 하는 것이, 돈도 더 벌고, 더 잘되는 것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만일 세상적인 방법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믿을 만하고, 확실한 법칙으로 보였다면, 세상적인 환난이나 유혹과 욕심이 있다고 해서 믿음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땅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변하지 않는 법칙으로서 믿지 못 하고,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확률로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확률에 대해, 길가처럼 극히 낮은 사람이 있고, 가시밭처럼 조금 더 큰 확률로 본 경우는 있으나, 이 세 종류 모두 하나님에 대해 법칙처럼 확실한 것으로 보지 못 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반드시 그대로 된다는 법칙으로 믿지 못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약속을 확실하게 믿지 못 하는데, 어떻게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삶을 절대로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그 약속을 믿지 못 하는데,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오는 근심과 염려, 걱정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약속들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눈에 잘 보이고, 더 뚜렷해 보이는 세상적인 유혹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어쩌면 그럴 수 있는 확률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칙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세상의 모든 가르침, 수단과 방법, 판단들은 법칙이 아닌 확률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조차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법칙과 같은 성공법이 있다고 말하지 못 합니다. 어느 것이 조금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어느 것이 더 적합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확률이고, 더욱이 영생과 구원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길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변치 않고, 틀리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법칙으로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좀 더 큰 확률로 계산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판단과 계산과 방법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된다는 법칙으로 믿고, 그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그럴 듯하고, 확실해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것을 법칙으로 믿어야만, 세상으로 이끌려는 모든 시험과 걱정과 유혹을 이길 수 있고, 그래야만 영생과 구원의 길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씨를 뿌리시고, 그 씨앗들이 열매까지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밭을 갈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밭이 길가 같고, 돌짝밭, 가시덤불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로까지 성장하지 못 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 날, 그 자리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밭에서 뿌려졌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의 삶이 결코 실패할 수 없으며, 그래서 이것을 믿고 사는 자들을 끝까지 붙잡으시겠다는 약속을 법칙으로 믿고, 의지함으로써, 오늘도 주님 안에서 평안과 소망을 얻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귀한 열매들 가득 맺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