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1001)하나님의 생명을 품은 자들(막 5장 14-24절)

청명하늘 2018. 5. 11. 23:22

하나님의 생명을 품은 자들

 

성경: 마가복음 514-24(60)

찬송: 96(예수님은 누구신가; 94), 435(나의 영원하신 기업; 492)

설교: 2017100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영상을 잠깐 보겠습니다. EBS 방송의 명의라는 프로그램인데, 교통사고나 추락 등으로 심하게 다친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수술하고 치료하는 곳에서 일하는 이국종이라는 의사의 모습을 보여준 내용입니다. (명의 3.0.E01.130830.골든타임-운명의 1시간, 중증외상센터, 35:15-40:15)

 

시간이 허락되면, 언젠가 한 번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함께 본 내용은, 교통사로로 크게 다쳐서 이 병원에 왔는데, 이 환자의 경우, 많이 다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간암 말기 환자라는 점입니다. 말기 암 때문에, 6개월밖에 못 산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도 너무 크게 나서, 장기 이곳저곳을 잘라내야 합니다. 보통 장기 하나만 다쳐서 수술하는 것도 큰 수술인데, 이분은 장기 몇 개를 수술하거나 떼어내야 합니다. 수술해도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고, 수술이 아주 잘되었다고 하더라도,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서 6개월 이상을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수술이 잘 되어서 생명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 침대에서 중환자로 보낼 가능성이 높고, 수술이 안 되면, 그나마 남아 있는 6개월마저도 못 채우고 죽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저 환자의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어떻게 결정할 것 같습니까? 환자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만일 잘 모르거나, 혹은 그리 가깝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술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합리적인 계산에 따르면, 사실 저렇게 중상을 입은 사람은 수술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저런 대수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비용이 들어갑니다. 어떤 보험에 들어 있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같은 병원에서 비슷한 정도의 수술을 받은 분의 이야기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 분은 보험에 가입 안 된 차량에 부딪혀서 엄청난 수술을 받았는데, 이틀만에 3,700만원 정도가 청구되었고, 한 주만에 1억 가까이 나올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영상에서 나온 분도 비용으로 보면, 그에 못지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비용이 들여서 수술한다면, 수술이 잘 된다는 보장이 되든지, 수술로 건강을 회복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두 가지 다 보장을 받지 못 합니다. 수술을 받아도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혹시 수술을 아주 잘 받아서 살 수 있어도 어차피 6개월 이상을 살기 어렵습니다. 이것저것 계산해 봐도, 손해만 나는 수술처럼 보입니다. 잘 모르거나, 관심 없는 입장이라면, ‘그깟 몇 개월 살아도 그만, 못 살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가장 앞에 나옵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잘라내고 병원 침대에서 몇 개월 사는 게 과연 가치가 있나하는 삶의 질과 가치라는 내 계산법으로 재봅니다.

 

그러나 만일 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생각과 계산은 정반대가 됩니다. 실제 영상에서 보여준 그 부인의 선택처럼, 무엇을 들이고 희생하든 그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수술이 잘 된다 하더라도, 암 때문에 6개월 안에 죽는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단 며칠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에 들어가야 하는 모든 희생과 비용마저도 그깟 것이이 됩니다. ‘그깟 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언젠가 유명한 코메디언 한 분이,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어머니와 한 시간 대화할 수 있다면, 내 수명의 10년을 줄여도 좋다.” 사람의 가장 큰 욕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모든 계산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고, 최종 목적 역시 자신의 이익과 편의와 성공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인 10년을 줄여서라도, 어머니와 한 시간만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바라다보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고, 나와 별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는, 그에게 들어가는 돈과 희생과 수고가 더 크게 보이고, 내가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는, 그에게 들어가는 그 어떤 것도 작고 부족해 보입니다. 심지어는 나의 재산과 시간과 생명마저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그 까짓 것이 됩니다. 반대로 별로 관심이 없고, 마음과 애정이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모았는데?’ ‘왜 내가?’ ‘그 사람들이 뭐라고 내가 왜?’라는 계산들이 앞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생명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생명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자신의 생명은 또 어떻게 보이십니까? 우리가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기를 원하실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의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거라사 동네에서 군대 귀신이 들렸던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이 사건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돼지 2천 마리를 잃어버린 주인도 아니고, 돼지 떼를 책임져야 하는 일꾼도 아닌 동네 사람들, 돼지 떼와 전혀 상관없던 이들이 사건의 현장에 이르러,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 마을을 떠나 달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면, 자신들에게 새롭게 요구될 것이 많기 때문이고,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과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귀신에 들린 사람, 자기들 생각에는 세상에서 없어도 되고, 심지어는 없는 것이 더 나을 정도의 사람에 불과한데, 그런 하찮은 사람을 위해, 그렇게 엄청난 재산마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예수님의 방식이 자신들에게까지 요구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있었던 거라사라는 지역은,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내쫓으셨던 곳은 그렇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맞은편으로 가셨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 예수님의 동족들의 지역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오시자,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자기의 딸을 고쳐 달라고 엎드려 간청합니다. 회당장이란, 회당을 관리하고, 설교자를 섭외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을 회관 같은 곳의 책임자 정도라 할 수 있어서, 요즘으로 보면, 마을 이장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 큰 권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 동네에서 지도자급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행동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서 돌아오셨지만 아직 마을에 들어서지도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바닷가에 계십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거라사 마을에 가시면서, 언제 돌아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언제 자기 동네로 오실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을 향해 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다시 자기 마을까지 돌아오실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직 마을에 들어가시지 않고 바닷가에 계실 때, 회당장은 체면, 지위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낮은 자세로 나아가 구하고 있습니다.

 

회당장인 야이로가 왜 이렇게 낮은 자세로 또 간절하게 구했겠습니까? 자기 딸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정도로 위급한 상태입니다. 만일 자기 딸이 아니고, 자녀가 아니고, 사랑하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야이로는 그렇게까지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동네 지도자라는 체면을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자기 가족,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아프고, 생명이 위독하니 이것저것 가릴 수 없습니다. 이것만큼 절박한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이로가 자기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는 이 사건이,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 다음에 나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과 회당장 야이로가 보인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대하는 태도와 간절함이 달랐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돼지 2천 마리를 버리고 한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손해나고, 어리석은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방식에 동의하면, 그런 방식이 자기들에게까지 요구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귀신 들린 사람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있으면 좀 귀찮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사람이 자유롭게 되고 깨끗하게 되는 대신, 자기의 것을 버려야 하고, 이익이 줄어든다면, 차라리 귀신 들린 사람은 계속 귀신에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자신은 손해 없이 사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해방되는 것은 나름 괜찮은 것 같지만, 그를 대가로 자기들에게 다른 것이 요구되면, 차라리 그 사람은 귀신 들린 채로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자기들에게는 짐이 없는 쪽을 택할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딸이 아팠으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기 가족이 위독한 상태인데, 돈을 아끼고 지키겠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바라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다면 뭔가 정신적으로 이상하다든지, 아니면 진짜 사랑하는 게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생명에 대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거라사 사람들과 야이로의 이야기를 이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생명보다는 자기 것을 먼저 챙기고 중요하게 여기고, 그래서 자기들에게까지 너무 많은 부담으로 올 것이 두려워 생명과 능력의 주님을 떠나시게 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자기 딸의 생명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야이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하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생명을 어떻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이 두 가지 방식이 함께 있습니다. 나의 이익과 편함을 위해 생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길이 있고, 생명을 위해 나의 이익과 편함까지도 희생할 줄 아는 길이 있습니다. 생명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고, 생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것은 하나님 자녀들의 방식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는 몇 푼의 돈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경우가 있고, 한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사라져도, 그 자리와 일을 대신할 만한 사람은 많고, 차라리 한 사람이 희생하고, ‘우리가 함께 부유하게 사는 것을 원합니다. 이것을 합리적인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품어서는 안 되는 비겁하고 어리석은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는 지금 어떤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 이웃의 생명이 어떻게 여겨집니까? 또 나 자신의 생명은 어떻게 보입니까?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처럼, 내게 이익이 안 되면, 그 누가 무슨 일을 당하든, 어떤 아픔을 당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그 간절함과 함께 보이십니까?

 

모든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지만, 오직 인간 안에만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것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인정하면, 자기의 삶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잠시 그 생명을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면, 자기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이웃의 생명을 존중할 줄 알게 되고, 그 앞에서 겸손하게 됩니다.

 

어느 유명 한의사가 자기에게 배우는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한의사는 배우는 학생들에게 침을 직접 자기 몸에, 그것도 가장 아픈 부분에 침을 놓게 하고, 또 그 침을 건드려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도록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설명을 듣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침을 놓는 사람이 직접 그 고통을 느껴야만 환자들을 그저 돈벌이의 대상, 자신의 의술을 베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나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고, 그래서 귀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게 생명 주셨음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려 노력해야 하고, 우리 이웃 속에 있는 생명도 귀히 여기며, 그들의 삶도 존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주고, 도와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이웃 속에 심어주신 생명에 감사하며, 내 생명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으로 만들어 가며, 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웃까지 사랑하고 섬기며, 가족과 이웃과 자기의 생명까지도 소중히 여기며, 자기 몸을 대하는 모습으로 사랑함으로써,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