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1119)한적한 곳에서 생각하는 능력, 은혜(막 6장 30-34절)

청명하늘 2018. 5. 14. 20:58

한적한 곳에서 생각하는 능력, 은혜

 

성경: 마가복음 630-34(63)

찬송: 301(지금까지 지내온 것; 460), 591(저 밭에 농부; 310)

설교: 20171119. 주일낮예배(추수감사주일)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교회마다 규모와 움직이는 모양이 조금씩 다릅니다만, 최근 상반된 방향으로 차이가 더욱 커지는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모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그렇지만,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모임을 만들고, 많은 교인들이 그 모임에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유도합니다. 이런 모임에 많이 참여할수록 신앙은 성장하고, 더 많은 복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주일낮예배는 물론, 주일오후예배, 수요기도회, 금요철야예배, 새벽기도회 등 예배와, 성경공부와 교육, 이 외에도 기도회와 전도 모임 등 다양한 목적으로 이러저러한 모임들을 만들어 참여토록 합니다. 이런 교회에 속하면, 주일은 온종일, 이 외에도 주중에도 교회에서 자주 모여서, ‘아예 교회에서 산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기존부터 내려왔던 모습입니다.

 

그러나 최근엔 이와는 정반대의 경향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모임을 최소화합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외국의 교회들처럼 다른 예배 없이, 오직 주일낮예배만 드리고, 그 외의 모임은 없앱니다. 교회 안에서 모이는 것보다, 교회에서 듣고 배운 것들을 교회 밖 생활에서 드러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습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것이 더 좋은 교회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곡교회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까? 여긴 시골이고,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하긴 하지만, 여건만 되면, 다양한 모임을 만들어 교회에서 많이 모이도록 하고 싶습니까?

 

교회에서 여러 목적으로 모이는 게 옳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근거들 중 하나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히브리서 1025절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주 모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세상의 끝날이 다가오는 지금 교회에서 많이 모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에서 자주 많이 모이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서 자주 모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대단했습니다. 숨어서 신앙생활해야 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다 발각되면,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죽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하려면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고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예배와 기도를 위해 모이다 죽을까 두려워해서, 모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당시는 교회에 모인다는 것은 곧 신앙생활한다는 뜻이고, 두려워서 모임을 피한다는 것은 신앙을 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 때에 주신 말씀이니, 박해와 핍박이 두려워서 신앙을 포기하고 모이지 않는 사람처럼 하지 말고,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신앙생활을 꾸준하게 잘 해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25절 말씀으로, 교회에 많이 모이는 무조건 좋고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무조건 모임을 줄이는 게 좋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자주 많이 모이느냐, 적게 덜 모이느냐 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모이는 바른 목적을 알고, 그 목적에 맞는 마음을 가지고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많이 자주 모이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고, 교회 밖에서 다해야 하는 책임을 피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여정 가운데, 자기 일에 빠지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업적을 자랑하며,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으려 사람 많은 곳에 있으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돌아보기 위해, 사람이 없는 철저히 한적한 곳으로 가라고 하신 본문 말씀을 지키지 못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 많이 모이고, 자주 모이는 게 자칫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것들을 내세우고 자랑하기 위한 것일 수 있고, 마땅히 마주대해야 하는 영적 고독감을 피하려는 까닭으로부터 시작된 도피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앞에서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악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과, 병을 고치는 능력을 함께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사역의 자리에서 겪었던 일들, 또 제자들을 통해 나타났던 기적들을 예수님께 보고하는 내용인데, 이에 대해 30절에서는,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밖에 나가서 겪고 행한 일들, 또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들에 비하면, 한 줄이라는 너무 짧은 기록처럼 보이지만, “낱낱이 고하니라는 말씀만으로도 당시 제자들의 모습이 어땠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밖으로 나가, 전도하며 가르치라고 하시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팡이 하나, 입은 옷 한 벌, 신고 있는 신발 외에는, 돈이나 먹을거리나, 잠자리마저 준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일 나들이를 하려 해도, 준비하고 챙겨야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아무런 준비나 계획 없이 긴 선교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인지라 제자들도 그렇게 따르긴 했지만, 살아온 날들이 길고, 경험이 많은 제자들에게는 도저히 안 맞는 말씀입니다. 세상살이의 셈법에 익숙한 제자들로서는 염려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이해되지 않고,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막상 선교를 떠나서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하자,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나았고, 아무런 약속이 안 되었음에도, 어느 집에 들어가더라도 그들에게 먹을 것과 머물 곳이 주어졌습니다. 제자들 생각하기에도 너무 이상한 일들이었고,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은 일들입니다.

 

제자들의 경험과 계산에서 벗어난 일이었음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행하자, 실패하게 된 게 아니고, 일이 이루어지고 기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기적을 제자들의 감격과 성취감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큰 자신감이 생겼고, 자기들이 이 일을 해냈다는 자랑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이 겪었던 일들과 그 결과를 자랑스레 보고하느라 열을 올리는 모습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선교 결과를 보고하면서, 예수님이 자신들의 수고와 결과에 대해 칭찬하시고, 지금보다 더 큰일들을 해낼 거라는 희망찬 말씀을 기대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겪은 일들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는 약속을 제자들이 기대했을 법한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열띤 분위기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31절에서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는 말씀으로 분위기를 가라앉히십니다. 제자들이 인간적인 흥분과 성취감에서 깨어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는 말씀을 보면, 사도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지,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큰일을 해내고, 그리고 밥을 못 먹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에 휩싸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신 게 아니라, 큰 위기를 보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하시거나, 더 큰일을 계획하라는 희망의 말씀을 주신 게 아니라, 한적한 곳, 사람들이 없는 외떨어진 곳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자기들의 힘으로 이룬 것처럼 보인 그 일들, 기적들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그리고 그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 아무 것도 소유하게 하지 않도록 하신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 나가는 게 아니라, 일꾼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해내고 이루어 내든지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있고, 나를 칭찬하고,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면,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은 갖지 못 하고, 버려야할 것들만 잔뜩 안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 오는 그 수많은 사람들, 병이 낫기를 바라고, 집안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오는 사람이 많을수록, 제자들을 칭찬하고 찬성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이 기적들을 이루고,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 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신 한적한 곳은, 단순히 군중으로부터 떠나서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하기보다는, 혼잡함과 분주함에서 벗어나, 조용히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를 뜻합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있느라,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만을 바라며 사는 곳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꾸밈없이 솔직하게 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만한 자리를 뜻합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방향을 되찾고,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고, 현재 여기에서 우리에게 다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적한 곳으로 표현된 말은 외딴 곳,’ ‘따로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에 관해 말씀하시거나,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실 때와 관련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고,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시고, 34절에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모습이 그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무리를 지어 예수님과 제자들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생명이 없는 길로 가기에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있으면,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부분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들이거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로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있으면, 자기를 더 드러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그래서 과대포장하기 마련입니다. 잘못된 것이나 부족한 것은 감추려 영적 가면을 쓰기도 하고, 욕망을 멋진 말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수록, 그릇된 길로 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나를 감추거나 과시하고, 나를 자랑해야만 하는 많은 무리 속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 나를 감추거나 포장할 필요도 없고, 있는 그대로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한적한 곳, 조용히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한적한 곳은 과장되고, 포장된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으로 살아가게 하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세상은 우리에게 숙달된 연기를 요구합니다. 기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따라 기쁜 척 하기를 원하고, 썩어질 것들을 얻기 위해 불의와 거짓에 타협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익숙해지고, 이런 세상에 빠지면, 우리도 역시 세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잊게 되고, 생명이 없는 것들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신 한적한 곳이란, 세상의 흐름에 휩싸여 생명이 없는 곳으로 향하는 삶으로부터 빠져 나와,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어디만큼 왔는지를 다시 확인해 보는 자리입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 거짓이나 과장이나 포장도 필요 없는 곳,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돌아보게 하는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 없이 오직 나 혼자만 있는 광야, 한적한 곳에서 옷을 화려하게 입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혼자만 있는 곳에서 멋진 말로 자기를 포장하고,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꾸미고, 포장하고, 자랑하는 것들 모두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한 것들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주일로 지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저 헌금 많이 하도록 절기를 정한 것이겠습니까? 왜 절기를 정하고, 특별히 감사하라고 하겠습니까? 매주, 매일 감사하며 지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주일을 절기로 정하고, 예배하고 감사하도록 하는 까닭도 역시 오늘 말씀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주, 매일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람들의 평가에만 마음을 두고, 그렇게 살다보면, 사람의 것에 더 익숙해지고, 지금 내가 이루고 거둔 모든 것들을 내가 내 힘으로 다 해낸 것 같고, 내 능력이 대단해 보입니다. 당연하고, 내 업적과 자랑처럼 여겨지는 것들마저, 사실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고 선물임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의미로, 각자가 가꾼 것들을 앞에 이렇게 진열하고, 눈으로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올 한 해도 어느덧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힘쓰셨기에 지금 좋은 열매들을 얻고 있습니다. 계획했던 것보다 잘 거둘 수도 있고, 덜 거둘 수는 있지만, 해가 없고, 비가 없었으면 하나 거둘 수 없었을 것을 생각해 보면, 덜 거둔 것마저도 하나님이 주신 열매고 선물입니다.

 

교회를 돌아봐도, 작고 약한 교회로서는 생각하지 못 한 일들이 이루어졌고, 필요한 살림살이가 많아지고, 좋아졌습니다.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자리는 넓어졌습니다. 마음을 함께하고, 함께 노력한 결과이긴 하지만, 이것마저도 사실은 우연히 된 것 아니고, 사람의 힘과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우리가, 교회가 잘나고 능력이 대단해서 이룬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고 선물임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것, 이것이 영적으로 한적한 것이고, 주님의 것을 인정하는 자리와 시간입니다.

 

우리의 분주한 삶 가운데, 너무 많은 것들, 너무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려 하지 않는지 돌아보고, 지금 우리가 되고, 이룬 것들마저도, 하나님의 은혜고 능력이고 선물임을 인정하는 영적 빈자리로 나아감으로써,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