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128)말씀을 기억하며 사는 제자의 삶(막 8장 14-21절)

청명하늘 2018. 6. 24. 18:53

말씀을 기억하며 사는 제자의 삶

 

성경: 마가복음 814-21(67)

찬송: 320(목마른 내 영혼; 409), 420(너 성결키 위해; 212)

설교: 20180128. 주일낮예배

 

 

 

겨울 추위가 한참인 때임에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사실을 알고 느끼는 감각이 여러 가지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만져보고, 맛보는 것 등입니다. 이런 감각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설명을 많이 들어도 이해가 안 되었다가도, 눈으로 한 번 보면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여러 감각들 중에서,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각이 다른 감각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사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감각임에도, 사실은 시각마저도 완벽한 감각이 되지 못 하고, 관심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또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의 뜻입니다.

 

잠깐 그림 하나 볼까요? (르벤스의 노인과 여인’)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화면이 작아서, 그림이 잘 보일지 몰라서 잠깐 설명을 드리면, 감옥처럼 보이는 곳에, 손발이 묶인 한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고, 그것을 병사들이 쇠창살 너머로 지켜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어떻습니까? 좀 외설스럽다는 생각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그림들이 많을 텐데, 저렇게 외설스러운 그림을, 교회에서 그것도 예배시간에 보여줄 필요가 있는가?’ ‘목사의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천박하거나 외설스러운 게 아닙니다.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 그림이고, 그 내용도 굉장히 감동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저도 그림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만, 이 그림은 루벤스라는 사람의 작품으로 노인과 여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사슬에 묶여 있는 노인은, 큰 죄로 잡혔고, 곧 처형될 예정에 처해 있습니다. 게다가 처형될 때까지 물과 음식마저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처형되거나, 그 전에 굶거나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젊은 여성은 노인의 딸입니다. 아버지가 죄로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딸로서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특히 음식과 물마저 금지된 아버지의 고통이 너무나 안타깝지만, 음식을 가져다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지 오래지 않아서 모유가 나오는 것을 아버지께 먹여드리는 방법을 이용한 것입니다.

 

다 커서 결혼한 여성이, 아버지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아버지의 고통을 줄이고,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그런 방법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연과 내용을 알고 보면, 그림이 전혀 달라 보이지 않습니까? 모르고 봤을 때는,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상스러운 그림처럼 여겨졌지만, 그림의 상황을 알고, 내용을 이해하고 나니, 그림이 외설스럽거나 천박하지 않고, 부모에 대한 딸의 효심 때문에 아름답고 고귀하게 여겨집니다.

 

이것을 보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이 말이 맞는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것을 듣고 봐도,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따라 전혀 달리 이해하고, 달리 행동한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 부족해 보이고, 3년 반 동안 이런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메시아임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거부하시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본문에는 잘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때문에, 예수님께서 몹시 분노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좋은 의도로 표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해서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표적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급하게 제자들에게 그 자리를 떠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로서도 예수님의 채근에 워낙 경황이 없어서,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음식 챙기는 것을 그만 잊고 말았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이 갑자기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비롯해 여러 제자들이 함께 먹으려면 빵이 많아야 하는데, 떡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장 먼저 챙기고 계산해야 할 만큼 자주 필요하고, 또 꼭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음식을 챙기지 않았으니, 이것 때문에 서로 책임을 따졌을 것입니다. 본래 빵을 담당하는 사람에게는, 왜 가장 기본인 빵을 챙기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돈을 관리하고 있는 가룟 유다는 미리 충분한 빵을 사지 않았다고 비난 받았을 것입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열두 명 제자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 했다고 추궁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을 보면, 당시 제자들이 어떤 생각으로 가득 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머릿속에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알아들을 만한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습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마음에 두고,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봤다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수수께끼도 아니고, 갑자기 아무런 상관없이 하신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계속 마가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앞에서부터 읽어보면, 예수님이 누구와 큰 갈등을 겪고 계시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8장이지만, 예수님이 계속 바리새인들과 다투시고, 이들을 꾸짖고, 저주하시는 내용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3년 반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한두 달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비록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지 않더라도, 조금만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기울이고, 예수님의 생각을 읽을 줄 알았다면 이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왕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들만이 아니라, 헤롯 자신도 세례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헤롯은 자기의 체면을 차리고,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당시 이런 상황과 헤롯의 악행을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오해하거나 잘못 판단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열두 제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 했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 사람의 시선만 생각하는 잘못된 형태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만 가졌지, 이들의 삶과 생각은 제자와는 전혀 상관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함께 움직이고, 함께 자면서 3년 넘는 시간을 제자로 살았지만, 예수님이 무엇을 생각하시며, 무엇 때문에 고민하시고,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왜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고, 왜 이적을 거부하시기도 하시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것을 마음에 두고 따랐다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기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체험했으니, 예수님이 먹을 음식이 부족하다고 책망하시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고,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는지, 왜 여러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면서도, 사탄의 시험과 바리새인들의 시험 때에는 왜 기적을 거부하셨는지를 알지 못 했고, 관심조차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엉뚱하게 행동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영향력, 생각, 가치관 등을 본받지 말라는 것임에도, 제자들은 그것을 알고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안 되어 있어서, 전혀 엉뚱한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반죽 전체가 부풀게 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큽니다. 처음엔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전체를 변질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차라리 시작부터 본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면,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암이 처음부터 아프고, 몸에 이상을 가져온다면 암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암이 진행이 더 되기 전에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가르침, 잘못된 생각은 들어 온지도 몰라 무시되다가도, 어느 순간에 돌아보면 우리의 삶 전체를 철저하게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 헤롯의 누룩이 바로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내용은 무시하고, 형식만 지키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틀을 잘 갖추지만, 그 속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내용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23절에서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것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겉모습만 보면 더 이상 좋은 신앙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정의에도 관심이 없고, 긍휼이나 믿음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도 관심 밖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좋은 신앙처럼 보이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외식한다고, 위선적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들어오는지조차도 모르게 들어오고,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결국엔 이것이 우리의 신앙 전체를 망치게 합니다.

 

헤롯의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이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세례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두려워하여 보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헤로디아의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요한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것을 중시하나 하나님의 것, 영적인 것을 버리는 자세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헤롯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몇몇 신하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도록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육체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의 삶으로서 끝나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육체를 위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과 헤롯 모두 사람의 것들로 삶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에서, 오직 사람들의 평가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고, 사람들의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펼칩니다. 헤롯도 하늘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이 땅에서의 약속을 생각하고,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 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누룩이 없습니까? 우리 자신도 모를 정도로 아주 작게 들어오는 외식과 위선, 이 땅의 것들만 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속에 품지 않고 살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우리는 여러 가지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형식과 틀에 극히 익숙했던 바리새인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의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은 헤롯을 두고 보면, 찬양을 많이 알게 되고, 기도를 유창하게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받는 것 등이 좋은 신앙임을 보증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종교생활에 익숙해지고,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삼는 것 자체가, 이미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의해 변질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형식과 틀을 넘어서는 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관심사와는 별개로,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큼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들보다, 하늘의 것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 땅의 삶은 마치 나그네와 같은 과정임을 인정하며, 더 크고 긴 하늘의 영원한 삶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없는 거룩하고 온전한 삶이고, 주님이 바라시는 삶입니다.

 

경황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몹시 괴롭거나 바쁘거나 하여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나 흥미가 전혀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경황이 없으면 깊이 생각하지 못 해서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우리 신앙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주님의 말씀하신 바 그 뜻을 알 만큼 주님의 것을 마음에 두고, 주님의 자녀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몸은 교회 가까이 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것들에 두고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거나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덜 된 채 전혀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작은 변심과 변절을 허용하거나 타협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의 삶과 생각과 신앙생활에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과 같은 것을 허용해서도 안 되고, 주님의 것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소에 하나님의 것을 힘써 찾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변질되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하는 자녀들을 찾으십니다. 바쁠수록 그리고 익숙해질수록 거짓과 위선의 누룩을 버리고, 변질되지 않는 참 마음으로 예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칭찬과 복을 누리며 사는 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