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5)주님을 사랑하면 따릅니다(막 9장 1-13절)
주님을 사랑하면 따릅니다
성경: 마가복음 9장 1-13절(신 68쪽)
찬송: 491장(저 높은 곳을; 통543), 545장(이 눈에 아무; 통344)
설교: 2018022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예전 한 TV 오락 프로그램(20130622. 무한도전 335회)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답하는 것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함께 여행을 떠나는 젊은 연인에게 “서로에게 얼마까지 돈을 빌려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장난스럽게 던졌습니다. 먼저 질문을 받은 남자가 애인에게 “5만원을 빌려줄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번엔 똑같은 질문을 여자에게 던졌더니, 자신에게 5만원까지만 빌려줄 수 있다고 답한 남자에게 화가 나서, 여자는 1만원까지 빌려 줄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재미를 위한 프로그램이고, 그래서 답하는 사람도 어쩌면 농담식으로 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보면서, 답을 들은 여자가 왜 기분이 상했는지, 또 그래서 왜 남자에게는 만원까지만 빌려줄 수 있다고 답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답했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입니다. 결혼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재산을 같이 관리합니다. ‘주머닛돈이 쌈지 돈’이라고, 보통의 경우엔, 누가 벌든지 같이 쓰고, 같이 관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준다’고 하지 않고, ‘빌려준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돈을 함께 쓰거나 관리하는 게 아니고, 주고받는 것을 분명히 하는 관계, 즉 가까운 사이일지는 모르지만, 돈을 함께 쓰는 부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확신할 만큼 사랑하지 않거나, 가깝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가까울수록 아낌없이 줍니다. 남녀관계에서도 정말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을 확신할 정도가 되었으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5만원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빚을 내서라도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빚을 내서라도 준다고는 못 하더라도, 가진 것을 전부 준다고도 하지 않고, 거액을 준다고도 하지 않고, 5만원을 이야기한 까닭은, 사랑이 식었거나, 반드시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 확신을 못 했거나, 아니면 이제 사귀기 시작해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랑의 크기에 따라, 상대에게 주고 싶은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싫은 사람에게는 푼돈도 아깝죠.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아는 사람에게는 몇 만원의 돈도 아깝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는 내게 있는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주어도 더 주지 못 해서 아쉽습니다. 심지어는 가족 중에 몸의 일부를 이식해야 할 상황이면, 생명에 가까운 몸의 한 부분을 떼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크고 중요한 것을 주고, 큰 것까지 해줄 수 있는 사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할수록 주고 싶은 것이 귀하고, 크고, 그러면서도 더 주지 못 해서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사랑하지 않을수록 줄 수 있는 금액이 적어지고, 줄 수 있는 것들이 소중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또 그러면서도 주고 나면,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아쉽고 후회되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우리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떨까요?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무엇까지 드릴 수 있습니까? 무엇까지 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기본은, 주님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니, 미워하고 싫어하지는 않죠? 주님을 위해 작은 일을 했다고 해서 후회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작은 금액까지는 아깝지 않은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작고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 다니고, 예배 시간에 앉아 있는 정도, 조금 기도하는 정도는, 주님을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점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는, 주님을 잘 모르는 사람도 여러 목적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 큰 교회에 가면, 신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사람을 사귀는 목적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예배에 많이 참여하는 이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서도, 사업을 위해 열심히 모이고, 교회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에 나아오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정도는 주님을 믿지 않고, 그냥 아는 정도인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수준, 주님을 얼마나 깊이 진지하게 사랑하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오늘 본문 앞 마가복음 8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엿새 후에 오늘 본문의 일이 있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높은 산에 오르셨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옷도 세상에서 만들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되었고, 또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같은 시기에 산 인물들이 아니라, 모두 구약성경의 인물들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이 오시기 1,500년 정도 전에 살았고, 엘리야는 900년 정도 전에 살았습니다.
예수님보다 그렇게 오래 전에 살았던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신 그 자리에 나타나고, 예수님과 대화하고, 또 이 사건을 성경에 기록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건의 의미와, 기록한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 앞 8장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려면, 각자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로 주님을 따르는 자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 중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엿새 후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엿새 후’라는 시간을 명확하게 기록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 게 아니고, 수십 년이 지난 후 기억을 떠올리며 중요한 사건과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의 간격을 ‘엿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 까닭은, 어떤 까닭에서든지 그 기억이 분명하다는 것이고, 더불어 오늘 본문의 사건이 앞의 사건과 연결되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신기한 모습으로 변하신 것 자체보다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이 누구며, 어떤 보상을 받는지를 알려줍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서도 대표적이고 가장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민족인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렸습니다. 그리고 북쪽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왕들이 다스렸습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이들 모든 왕들에 대해 “악했다”고 평가합니다. 당연히 나라는 평화로울 수 없었고, 200년 조금 넘는 기간 유지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19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서 어떤 왕은 6개월, 어떤 왕은 한 달 다스리고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단 7일 왕이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악하고 저주 받은 왕들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을 꼽으면 아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합은 정치적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웃 나라의 공주인 이세벨과 결혼했습니다. 왕이 정직하고 바르게 나라를 잘 다스리면, 그 나라는 평안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왕이 악하고, 잘못 다스리면 그 나라는 반드시 기울어지고,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합은 자기 욕심을 위해, 하나님이 모르는 사람을 왕비로 데려왔으니, 그 이후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 훤합니다. 왕비로 온 이세벨은 자신의 나라에서 섬기던 우상을 그대로 가져와서 백성들에게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3년 반 동안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저수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지금도 두세 달 비가 안 오면 고통스러운데, 저수 시설이 안 되어 있던 아합 시대에는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비가 안 내렸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왕까지 물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짐승들마저 먹을 것이 없어서 대부분 굶어죽어서, 당시 왕궁에도 말 몇 마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활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당시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는, 가뭄의 저주가 엘리야 선지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찾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는 모두 죽고 아무도 안 보였습니다. 마치 홀로 악한 세력과 싸워야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때에, 엘리야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자기의 판단과 생각을 앞세웠다면, 사역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야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엘리야는 자기 판단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었습니다.
엘리야와 함께 등장한 모세의 삶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 모세는 유대 민족이 우리 성경에서는 애굽이라고 부르는 이집트에서 약 400년 동안 종살이하는 중에 태어났지만, 이집트의 왕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풍요롭고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왕자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내고 바라는 삶입니다. 반면에 유대인으로 사는 길을 선택하면, 자신도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민족의 길을 선택하면, 삶이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이 두 길에서 그 누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의롭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이런 선택이 현실로 다가오면, 모두가 흔들리고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런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기 민족은 지독히도 거칠고, 고집 센 민족입니다. 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기로 결심하는 순간, 모든 편함과 인생의 즐거움이 사라질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민족과 함께하기로 다짐하는 순간, 모세 앞에는 풍성한 음식 대신에 쓴 나물, 누룩 없이 만든 딱딱하고 맛없는 음식이 주어집니다. 편하고 화려한 옷 대신에, 사방이 낡고 해진 옷을 입어야 하고, 자신의 말 한 마디면 모두가 순종하는 사람들 대신에, 고집 세고, 불만투성이인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편하고 빠른 말을 타고 다니던 것 대신에, 거칠고 모난 길을 두 발로 끝없이 걸어야 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집트에서 왕자로 사는 게 편하고 쉽고 좋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딱 한 가지를 제외하면, 이집트의 왕자로 사는 것은 단점이 없고,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사는 것은 장점이 없습니다. 한쪽으로 너무 기울인 갈림길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하늘의 상과 복을 주시고, 함께해 주시겠다는 이 약속 때문에, 모세는 자기 백성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길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따르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왜 자신이 져야 하냐고 불평하고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가 지기로 선택한 고난과 십자가의 이 길이, 어리석은 길 같고, 실패한 인생처럼 보였지만,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마가복음 8장 35절 말씀처럼, 결국은 모세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실패의 길 같았지만, 결국엔 성공의 길이었고, 우리 보기엔 죽는 길 같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하시고,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했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어떤 상을 받는지를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시는 자리였습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생과 영광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구원과 영생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진짜 나의 하나님으로 여겨지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들 중에서 어디까지 바칠 수 있습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정말 나의 하나님, 성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면, 오늘 본문 7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이란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 다니고, 예배하고, 조금 봉사하는 정도로만 끝난다면,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주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서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까지 바칠 수도 있고,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비록 이 길이 어렵고 실패한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예수님과 함께 나타나도록 하심으로써, 주님이 말씀하신 길이 사실이고, 진리이며, 우리에게도 똑같이 생명과 복의 길임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길이 우리의 판단에는 어렵고 힘들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약속대로 사는 것이 영광과 부활의 길이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진리임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욕심과 욕망을 누르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감으로써, 모세와 엘리야가 받았던 영생과 영광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