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4)봐야 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막 9장 9-13절)
봐야 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들
성경: 마가복음 9장 9-13절(신 68쪽)
찬송: 263장(이 세상 험하고; 통197), 200장(달고 오묘한; 통235)
설교: 2018030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달 24일에 나온 뉴스들 중에, ‘여신도 폭행 뒤 암매장한 교주 징역 30년’(http://news.donga.com/Main/3/all/20180224/88827491/1)이라는 제목이 올라 왔습니다. 내용을 보니, 자신이 ‘살아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몇 명을 신도로 데리고 있다가, 한 여성이 예배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때려서 사망하게 된 사건입니다. 사망 사고는 작년 4월에 일어났고, 교주가 잡힌 것은 작년 8월인데, 며칠 전에 죄에 대해 30년을 살도록 선고한 것입니다.
가장 무거운 죄들 중에 살인죄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했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과 이유에 따라 형량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살인죄 중에서도 가장 높은 형량은, 2명 이상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경우에 선고될 수 있는데, 이때는 징역 23년 이상에서 무기징역까지 내려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여신도를 폭행 살해한 뒤 암매장한 교주에게 징역 30년이 선고되었다는 것은, 살인죄 중에서도, 가장 무겁게 선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봤더니, 교주가 자신을 ‘살아있는 하나님’이라면서, 자신은 기적도 행한다면서 설교했습니다. 거기에 교주의 부모와 배우자도 동조했고, 그러다 40,50대 삼남매가 거기에 빠져서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 믿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기독교 이단, 사이비들의 민낯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살아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미쳤고, 자신의 아들이어서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진짜 하나님으로 믿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교주의 부모도 미쳤습니다. 교회를 다니다, 그곳이 죽음과 멸망의 길인지도 모르고, 여기에 혹해서 넘어가서, 가족 한 사람이 죽게 만들고 더불어 범죄자가 된 삼남매도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더 답답한 일은, 이렇게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 그리고 거기에 빠져서 가정과 삶이 망가지는 이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교회,’ ‘기독교,’ ‘성경,’ ‘하나님,’ ‘성령,’ 등의 이름을 쓰지만, 신앙과는 전혀 동떨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은 이들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이들, 그리고 거기에 빠지는 이들은, 시기와 규모와 다를 뿐 언제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후에도 그랬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교주와 그 무리들은 소수였지만, 92년도에는 규모가 엄청 커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92년 10월 28일이 되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이 끝난다며, 이 때를 준비하라는 ‘다미선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집과 땅을 팔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교회에서 맞이해야 한다며, 가정을 뒤로하고, 매일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세상 마지막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때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36절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때란, 세상의 마지막 날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심판하실 때인데,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 아실 뿐, 이를 알 수 있는 사람도, 방법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 누가복음 17장 23,24절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도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능력을 행하고,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더라도, 모두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종말과 하나님,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타협이나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이라 하거나,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신다고 계시를 받았다거나, 세상이 언제 어떻게 끝나는 비밀을 환상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다시 볼 것도 없을 만큼 거짓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끊임없이 많은 이단이 생기고, 또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생기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두려움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려하지 않고, 욕심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성경 속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것들만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도 역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찾아 그대로 전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골라서 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멀면, 아무리 크고 밝은 것이라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두려움에 눈이 멀면, 아무리 크고 확실한 말씀과 증거조차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순수한 믿음과 용기가 없으면, 진리를 왜곡시키고 뒤틀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눈으로 보고 체험했음에도 사실을 바로보지 못 하는 제자들과,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면서도, 자기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말하고자 하는 것만 말하는 서기관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셨고, 그곳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변하셨는데,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일 다음에 있던 일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두 가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신 후에 살아난다 하시는데, 도대체 죽은 사람들 중에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은, 구세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던진 첫 번째 질문인, 어떻게 죽은 자들 중에서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 질문을 던진 시기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9절에서 보면,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라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산에서 모양이 변하시고,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시고 내려오는 중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산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엘리야와 모세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훨씬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엘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900년 전에 살았고, 모세는 약 1500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전에 살았던 두 인물이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대화할 수 있었겠습니까? 엘리야는 몸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했지만, 모세는 죽어 땅에 묻힌 사람들입니다.
1500년 전에 땅에 묻힌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던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 몸이 죽은 자들 중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은 모세를 살리셨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이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산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변하시고, 죽었다 살아난 모세, 엘리야와 대화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까닭은, 앞장인 마가복음 8장 34,35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것을 직접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그것도 몇 년이나, 몇 달 된 것도 아니고, 몇 시간 전에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보았으면서도, 죽은 자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를 다시 묻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확인했음에도 왜 이렇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을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살게 될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온 것을 경험하지 못 했음을 핑계로, 주님이 말씀하신 고난과 십자가의 짐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했음에도, 죽은 자들이 산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던진 두 번째 질문은, 서기관들의 주장으로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과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또 성경을 손을 베껴 쓰는 일 등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쉬운 말로는 ‘율법학자’라고 하는데, 성경과 율법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구세주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이라, 서기관들은 성경에서 구세주에 대한 말씀과 가르침을 연구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구약성경 말라기 4장 5,6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는 말씀을 통해, 메시아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 선지자가 올 것이라는 약속을 발견했습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백성들이 가장 먼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도 잘 알만큼, 시대를 잘 읽는 이들이었지만,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그 누구도 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말씀과 진리를 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 한 까닭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자기 민족을 구해줄 구세주는 고난을 받는 모습이 아니라, 능력과 영광의 모습으로 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면서도, 외진 동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섬기는 그리스도라 하시고,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사야서 53장을 3,4절에서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메시아로 오시는 분은, 인간의 죄를 지시고 고난과 멸시의 길을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이사야서 53장 2절에서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하시면서, 외모로 따지면, 모양도 별로고, 풍채도 별로고, 그럴듯한 모양마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할 것을 알 만큼 성경을 잘 알고 바르게 알았다면, 메시아가 고난받는 모습으로 오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님이 가난하고 고난 받으신다는 이유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욕심과 고집만을 주장하느라,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지 않고, 자기들의 판단에 따라 선택해 읽고, 그럴 듯한 것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죽은 자들 가운데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제자들, 그리고 메시야 전에 엘리야가 와야 할 것을 인정하면서도, 고난받는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는 서기관들도 모두,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입장에 따라, 선택하거나 버리며 읽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증거로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다가오는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역사를 외면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욕심 때문에,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고난과 버림받는 메시아에 대한 말씀들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렇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편한 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힘들고 어렵게 한다고 그 부분을 빼거나, 엉뚱하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필요로 하는 부분만 인정하고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자기 욕심에 따라 분명하게 기록된 부분을 외면하고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경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빼기도 하고, 더하려 하다가는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경의 가장 마지막은 요한계시록인데, 요한계시록 가장 마지막 장 22장 18,19절에서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에다, 말씀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이나 이익이나 손해 때문에라도, 말씀을 일부만 받아들이거나, 일부를 제외해서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욕심이나 이익을 위해 선택하거나 버리도록 기록된 게 아닙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사는 것이 가장 복되고, 우리의 영생을 보장하는 길이 됩니다. 성경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사람이 복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보는 사람, 하나님이 들려주시고자 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 복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살아감으로써,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더욱 복되고 기쁘게 살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