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401)소망의 줄이 모두 끊겼어도(마 28장 1-10절, 부활절)

청명하늘 2018. 8. 27. 14:10

소망의 줄이 모두 끊겼어도

 

성경: 마태복음 281-10(신 51쪽)

찬송: 161(할렐루야 우리 예수; 159), 171(하나님의 독생자; )

설교: 20180401. 주일낮예배(부활절)

 

 

 

부활절을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이 나오고, 또 다양한 이유로 모범을 보인 분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희생과 온유함으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었습니다. 많은 재앙들이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 내려졌습니다. 또 홍해가 갈라지기도 했고, 먹고 마실 것이 없을 때도 모세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능력이 큰 사람이었고, 그러면서도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도 대표적인 신앙의 위인입니다. 다윗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고,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골리앗이라는 적장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했음에도, 그 누구도 싸울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골리앗이 워낙 크고, 또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리고 경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가 싸워 골리앗을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도 믿음과 신실함으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지만, 이들도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부족한 모습들을 보였습니다. 모세는 온유한 성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기 성질을 참지 못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만스럽게 답해서, 자기가 이끈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모세 본인은 들어가지 못 하고, 가나안이 보이는 산 위에서 죽었습니다.

 

다윗도 믿음이 신실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자기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내서 간음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신 일들을, 마치 자신이 이룬 업적으로 여기며 백성들의 수를 세는 교만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성경 속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모세와 다윗도 물론 위대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오점을 남긴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에 많은 기록을 남기면서도 흠이나 죄가 없는 인물,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고 여겨지는 인물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은, 모세처럼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큰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윗처럼 칼과 창을 들고 나아가 용감하게 싸워 이긴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이 가장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 까닭은, 고난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을 가졌고,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어려움을 이겨냄으로써 복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형들이 요셉을 다른 나라로 팝니다. 심지어는 팔기 전에 죽이려 하다, 반대하는 형제들이 있어서 팔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판다는 것은 종으로 내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팔려서 이집트의 경호대장의 갔습니다. 그곳에서 충실하게 자기 임무를 다했는데, 경호대장의 부인이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아서, 이것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요셉의 입장이었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가장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하는 형제들로부터 미움과 시기를 받았고,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으로 팔렸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고난인데, 정직과 믿음 때문에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이 과정들은 믿음의 끈마저 흔들리게 하는 큰 시험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요셉에게는 붙잡고 일어나고, 그래서 어려움을 이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정의 끈은 일찌감치 끊어졌고, 정직하고 의롭게 살면 잘될 거라는 소망의 끈도 끊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돈과 권력과 사람의 끈은 형들에 의해 팔린 순간에 가장 먼저 끊어졌습니다.

 

누구나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붙잡은 이 모든 끈들이 끊어졌으니, 그 누가 이런 요셉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누가 요셉의 문제와 아픔이 풀리고 해결될 거라 기대하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거나 사는 거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인생은 산산조각나고 실패하고 끝장난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끈이 끊어지고,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요셉은 결국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그것도 종으로 팔려온 사람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흉년으로 어려움을 당한 가족들을 이집트로 불러오게 되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 그나마 파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만큼 나쁜 형들과 그 처자식까지 불러와 살렸습니다. 요셉이 살아간 이 과정들은, 모든 소망의 끈이 끊긴 절망의 상황에서, 소망의 불씨가 살아나고, 부활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모든 소망의 끈이 끊기고, 이제 슬픔과 고난의 길을 걷던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안식일 다음 날, 즉 주일 새벽에 무덤을 보려고 갔다가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가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두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듣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과정은 온통 가시밭길이었고,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혹시’ ‘어쩌면이라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흩어져버린 고통과 아픔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망과 아픔의 길에서, 기대하지 못 한 때에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영광과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에서 다른 마리아로 기록된 사람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름이 같아서, ‘다른 마리아라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가장 먼저 듣고, 또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의 이야기가 마태복음 2756, 61절에서도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곱과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기까지의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그렇고,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잡히시고,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일들이 너무 당황스럽고 힘들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죽으실 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할 일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에서 사형시킨다는 것은, 반역을 일으켰다거나,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죄인들에게만 내리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역이나 살인과 같은 중범죄와는 전혀 거리가 먼 분이셨고, 오히려 그런 자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예수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형당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산과는 달리,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끌려가셨고,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많은 이들이 지켜봤지만, 성경은 유독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영광을 보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겪고 지나쳐 와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2756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결국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세 여인이 지켜봤습니다. 이 과정이 받아들일 수 없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평소 예수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지켜봤던 사람들은,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고, 그 누구도 쫓아내지 못 하는 귀신을 쫓아내셨고, 죽은 자마저 살리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비록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이 숨만 쉬시더라도, 기적을 행하셔서 내려오실 수 있을 거라 기대할 만했습니다. 2749절에서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라 한 것은 비난과 조롱의 뜻이었지만, 예수님의 온갖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보면서도, 두 여인은, ‘때가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고, 수난의 시간이 끝날 것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약한 이 소망마저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것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설마’ ‘이렇게 끝날 수 없다’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가느다란 소망마저 사그러들고 말았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아리마대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고, 무덤에 넣고,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는 것까지 이 여인들은 지켜보고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까지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이고, 낙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들은, 무덤에 묻히시고, 문이 닫히기 전까지는 작디 작은 소망이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죽어 상여에 실려 가던 과부의 아들을 예수님이 살리신 일도 있었고, 요한복음에서는 죽어 무덤에 묻힌 지 4일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기억 때문에, 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더라도, 다시 숨을 쉬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실지 모른다는 것을 바랐을 것입니다. 무덤 문이 닫히기 전까지는, 다시 살아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보다 얇은 소망의 끈이 이 여인들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작고 희미한 마지막 소망마저 점차 사그러들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넣고, 무덤 문을 닫는 순간에, 그 동안 바라고 가졌던 모든 소망 끈마저도 재처럼 타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슬픔과 절망만 남고 말았습니다.

 

이 때 이 여인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말 그대로 모든 소망의 끈이 끊기고, 소망의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 때가 아니겠습니까? 소망의 기미마저 찾을 수 없고, 너무나 길고도 암흑 같은 터널을 지나는 때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소망을 잃고, 절망과 슬픔을 안은 이 두 여인은,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이 묻힌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거라는 기대로 찾아간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라는 말씀처럼, 무덤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거나, 혹은 그리움과 아픔 때문에 찾아간 길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믿지 못 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절망과 슬픔만 잔뜩 안고 힘겨운 걸음을 한 이 연인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 한 때에, 기대하지 못 한 일을 겪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듣고 놀라 도망갈 수밖에 없는 천사들의 환영을 받고, 그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하신 소식을 듣습니다. 또 천사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습니다.

 

성경에서 이 여인들이 보고 확인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계속 기록한 까닭은, 소망의 끈 하나 없는 절망의 길에서 어떻게 부활이라는 큰 은혜와 소망을 갖게 되었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것은 그렇더라도 제발 이것만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마저 철저히 무너지고 사라져 버렸지만, 이제는 어떻게 이 기적이 내게...” “어떻게 이것까지...”로 바뀌는 과정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요셉이 겪어야 했던 절망의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터널이 끝없이 계속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 두 여인이 보고 겪은 어려움과 아픔들이 우리의 삶의 여정에도 많습니다. 다른 것 하나 없어도, 지켜주시기 바라는 마지막 소원과 소망마저도 철저히 무너지고 망가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의지하고 사랑하던 가족의 끈이 끊기기도 하고, 어느 날 건강의 끈이 툭 끊어지기도 합니다. 나름 자신 있던 경력과 지혜의 끈이 끊어지기도 하고, 튼튼하고 영원할 것 같은 돈줄이 썩어 사라지기도 합니다. 왜 내게 이런 고난과 시련을 주시느냐고, 왜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님에도 이런 어려움을 주시냐고 원망스러운 상황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 과정의 모든 까닭을 알 길 없지만, 그래서 우리 삶이 더욱 망가지고 실패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주님이 주신 길대로 묵묵히 살아가면서,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 가면, 기대하지 못 한 때, 기대하지 못 한 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시고 여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볼 수 없을 만큼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고난과 아픔을 지나 만날 세상은,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새롭고 복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누구도 살아나지 못 했던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두 여인은, 모든 소망이 끊긴 절망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걸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결국은 가장 큰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고난과 어둠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도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절망의 길을 걷고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 소망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소망의 끈이 잘리고 끊겼더라도,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과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빛줄기 하나 안 보이는 길이라 하더라도, 주님이 주신 말씀과 약속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감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소망과 은혜를 얻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