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729)하나님의 권위만이 영원합니다(막 12장 13-17절)

청명하늘 2018. 9. 3. 20:57

하나님의 권위만이 영원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213-17(75)

찬송: 320(나의 죄를 정케; 350), 210(시온성과 같은 교회; 245)

설교: 20180729. 주일낮예배

 

 

 

가장 더운 가운데서도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주에 우리나라의 유명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또 하루 차이로, 여성 정치인 한 사람이 암으로 숨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생전에 정치적 성향이 극과 극으로 달랐던 것만큼 마지막 모습도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한 사람은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한 사람은 마지막 길을 선택했고, 한 사람은 질병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정치 성향과 마지막 모습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게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이 두 사람에 대한 태도와 평가입니다. 인터넷에 기사가 나면, 그 밑에 자기들의 생각을 쓸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의 사망 기사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열 명 중 아홉은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반대로 열 명 중 아홉은 온갖 욕설과 비난이 가득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났겠습니까? 한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나 흠이 없이, 천사처럼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잘한 것 하나 없이, 오직 허물만 가득했기 때문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그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까닭은, 사실 불법적인 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으로 받아 쓸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 있습니다. 또 받은 것은 반드시 신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자기 동창이 주는 후원금이라고 생각하고 받았고, 이것을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받고 무엇을 해주겠다고 하면, 대가성으로서 큰 죄가 되지만, 후원금을 신고하지 않고 사용한 것은 사실 큰 죄가 되지 않습니다. 모르긴 해도, 국회의원들이 대부분이 신고한 금액만으로 정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대가를 약속하고 받은 것은 아니지만, 신고하지 않은 돈을 받은 것에 대해 본인 스스로 실망하고, 또 좌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죽음에 대해 몇 사람들이 잔치라 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의 대다수는 본인들이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는 일들, 내뱉는 말들을 보면, ‘보수라는 말의 뜻을 모르거나,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수옛것을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무조건 옛것을 지킨다고 해서 보수가 아니라, 지킬 만한 것,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런 기본적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냥 변하기 싫어하고, 자기들이 가진 권력과 재산과 지위를 지키려 애쓰는 것을 보수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뿌리는 독재와 쿠데타 세력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지난 정권의 여권입니다.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권력자, 그리고 그 밑에서 함께 일했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자기들 사람들을 고위직에 세워 달라고 청탁하는 사람들이 드러났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무려 여섯 명이었습니다. 증거를 보여 주었음에도, 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내가 아닌 것 같다” “기억이 안 난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지역민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시험들을 합격할 만큼 머리 좋고, 기억력 좋은 사람들이, 남이 한 일도 아니고, 수십 년 전의 일도 아닌데 왜 기억을 못 하겠습니까? 자기들이 저지른 불법은 많은데, 왜 남의 작은 불법과 편법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죽을죄로 평가하겠습니까?

 

남의 불법을 말하고, 그에 대해 정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기의 모습을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식이 있고, 사람답고, 다른 사람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라 하려면, 최소한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욕하고 탓하고, 정죄하기 전에, 자기는 그와 같은 죄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의 죄와 불법과 잘못이 큰데도, 자기의 잘못을 고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들추고, 비난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에게는 동일한 잣대와 기준이 없거나, 똑같이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에게는 분명하고 좋은 기준이 없습니다. 한 가지 있다면, 자기들의 이익이 늘어나면 그것은 좋은 것이고, 자기들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면 무조건 나쁜 것입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어제의 적마저도 친구로 함께하기도 하고, 손해가 되면 어제의 적마저 오늘의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기적인 기준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옳은 길이면 그것을 지지하고 함께합니다. 자신이 이익이 되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면 기꺼이 그것을 거부할 줄 압니다. 바른 기준, 마땅한 길을, 자기 이익과 손해에 따라 바꾸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길과 기준을 인정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주신 기준과 길에 따라 묵묵히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과 신앙생활 속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기준과 길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달리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금하더라도, 그것은 신앙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자기의 기준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그 속에 사악함을 감춘 채, 오직 하나님의 기준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3년 반 가량의 공생애를 마치시며,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전국에 오직 한 곳만 있는 곳이었고,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거룩한 곳이어야 했습니다. 세상의 자리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변할 수도 있고, 욕심이 있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본래 세상은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지고, 하나님의 것으로만 채워져야 하는 성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죄악과 판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들어가신 성전은,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세상보다 더러웠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하나님의 이름을 달고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참지 않으시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을 모두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의 장사꾼들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받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에서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이 너무나 못마땅했습니다. 자신들이 성전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성전을 더 거룩하다고, 제사를 많이 드릴수록 하나님이 좋아하신다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몰려들 것이고, 더 많은 헌금이 나올 것이고, 더 많은 제물이 거래되면서 이익이 많아질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계속 바른 소리만 하면, 자기들의 입김과 이익이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에서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이 잘못되었고, 그런 곳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하면, 그곳에서 제사하고 헌금하려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성공과 이익을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다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중 몇 사람을 보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가이사는, 영어 이름으로는 시저라고 하는데, 로마의 황제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넓은 지역을 통치했고, 현지의 왕이나 총독을 두어 다스렸습니다.(사진: 로마가 나눈 이스라엘의 행정구역)

 

우리나라로 예를 든다면, 서울은 왕이 다스리게 하고, 경기도는 총독을 보내 다스리게 하고, 전라남도는 다른 분봉왕을 두고 다스리게 했다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일왕은 본문의 가이사와 같고, 헤롯은 고종이나 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당시 엄청난 힘을 가진 로마를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반란을 일으킬 것인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도록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한 무리가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두 무리였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한 무리만 오면 되지, 왜 두 무리를 보냈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떤 답을 하시더라도, 함정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정반대의 사람들입니다.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헤롯당은 당시 왕이었던 헤롯과 그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고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이 헤롯당이 된 까닭도,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헤롯을 따르는 게 자기들에게 이익이라 당을 이루었으니, 자기들의 성공과 권력을 위해 당연히 로마 황제인 가이사를 지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은 정반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계속 이들과 갈등을 겪으시고, 또 이들을 저주하시는 일이 많아서, 이들이 세속적인 사람들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서, 세상의 죄와 욕심으로부터 분리되려는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신앙과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신앙과 율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는, 자기들의 신앙도 오염될 것이 염려되어, 따로 신앙생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지어 율법에,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전쟁 중에 적이 공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맞서 싸우지 않고 있다가 전멸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상극입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당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 욕심을 위해 세상과 더불어 산다고 증오했고, 헤롯당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의식을 가식적이라며 증오했습니다.

 

이렇게 싫어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이 두 무리가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시험에 빠트리고,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또 얼마나 간교한지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면,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민족의 배신자, 매국노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성모독하는 자라 여기며 잡아갔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면, 황제를 무시하고 반란을 꾀한다면서 헤롯당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답도 할 수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이렇게 답하면, 저쪽 사람들이 달려들어 죽일 것이고, 반대로 답하시면, 이쪽 사람들이 달려들어 죽일 것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동전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동전에도, 동전 종류에 따라 인물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동전에는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가 새겨져 있으니 가이사 것이고, 가이사의 것이니 가이사에게 바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예수님을 죽이려 던진 올무를 피하는 지혜로운 것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은, 사람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영원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로마의 황제로 최고 권력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넓은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는 권력자라 하더라도, 그게 영원하지 못 합니다. 당시는 그렇게 큰 땅을 통치하는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크기와 인구를 가진 이탈리아의 수도로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것은 영원합니다. 사라지지도 않고 변질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 던져진 질문, 예수님의 대답을,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과 연결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이 질문과 답이 나온 까닭은,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답은, 성전에서의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영원해야 하고, 변질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관련한 권위로 보면,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그 누군가의 이익과 성공과 욕심을 위해 그 권위가 변질되거나 손상되어서는 안 됩니다. 잠깐 있는 사람의 권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영원한 하나님의 권위처럼,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위해 만들어져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그저 일꾼으로서 철저히 겸손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도 교회가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의 권위를 하나님이 영원히 가지고 계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겸손히, 순수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