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923)끝까지 말씀대로만 사십시오(막 13장 3-13절)

청명하늘 2018. 9. 23. 14:33

끝까지 말씀대로만 사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133-13(77)

찬송: 488(이 몸의 소망; 539), 492(잠시 세상에; 544)

설교: 2018092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요즘은 자동차가 많아졌고, 그만큼 운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운전을 과격하게 하는 편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정해진 속도를 지키려 하고, 속도를 안 봤다가 좀 넘으면 바로 속도를 줄이곤 합니다.

 

그런데 운전하며 가다 보면, 과속하고 또 과격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로마다 정해진 속도가 좀 다릅니다만, 110km/h로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에서, 그 속도에 맞춰 가는데, 뒤에서 갑자기 차가 쑥 나타나고, 하고 지나갑니다. 그런 차들의 속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규정속도보다 훨씬 빨리 달린다는 것은 분명하겠죠?

 

일반 성인이 한 시간에 걷는 속도가 4-6km 정도 됩니다. 걷는 속도면 한참 걸어도 멀리 못 가죠? 그런데 차를 타고 가는 제 옆을 순식간에 차가 지나갈 정도면 그 속도는 몇 십 km 더 빠른 것입니다. 몇 번은 뒤에 차가 순식간에 달려와서,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제 차가 휘청일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면, 제가 달리는 속도 110km/h보다 80에서 100km/h 이상 빠른 것입니다. 정해진 속도보다 두 배가량 빠릅니다. 그렇게 달리다 살짝만 실수해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야 본인 잘못으로 그랬으니 그런다 치더라도, 다른 차량이나 사람에까지 큰 피해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달리고, 과격하게 운전하는 사람들도 한 순간에 얌전하게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멀리 경찰차가 보인다거나, 과속 차량을 단속하는 카메라가 보일 때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많이 발달했죠? 처음 가는 길인데도, 다른 사람한테 한 번 물어보지 않고도 갈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길만 잘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게 아닙니다. 달리는 속도는 물론, 앞의 무엇이 있는지도 말해 줍니다. ‘과속방지턱이 있다’ ‘길이 크게 굽어 있다’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등을 계속 이야기 해줍니다.

 

과격하게 운전하고 과속하는 운전자들도, 다른 이야기는 잘 안 들으면서도,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말만은 참 잘 듣습니다. 그렇게 빨리 달리던 차들 중에는, 워낙 빨리 달리다 단속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서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속도와 방법으로 운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앞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것이나, 단속하는 경찰이 전혀 염려되지 않습니다.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만 하면 됩니다. 차라리 단속하는 카메라와 경찰이 있는 게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차량들도 모두 얌전하게 운전하고, 또 정해진 속도로 운전해서 더 안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도로 곳곳에 단속 카메라를 달고, 경찰이 곳곳에서 단속하는 까닭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바꿔 보면, 모든 사람이 정해진 대로 안전하게 운전하면, 단속 카메라가 있을 필요가 없고, 경찰이 시시때때로 이곳저곳에서 단속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해진 규정을 어기고, 운전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 있기 때문에, 애초에 필요하지 않는 것까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운전을 난폭하게 하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엄청난 속도로 달립니다. 그렇게 달리다 사고 나고, 생명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법과 원칙과 안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두는 것이라곤, 그저 범칙금과 벌점을 피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들은 근본적이고 꼭 필요한 것은 마음에 두지 않고, 그저 단속을 피해서 손해가 나지 않는 것만 생각하며 운전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하고도 근본적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작은 손해만 피하려 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운전에서 중요한 것은, 단속을 피하고, 범칙금이나 벌점을 부과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안전하게 운전하고,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안전운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그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작은 범칙금과 벌점처럼 하찮은 것들에만 관심 가지다가는, 언젠가 사고날 위험이 크고, 한 번 사고가 나면 그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원인과 까닭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당장의 어려움만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순간의 고통을 피하려 하는 목적으로 질문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다양한 부류들과 만나시고 여러 가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가장 큰 계명을 물은 서기관, 그리고 사람의 시선과 판단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헌금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모습은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자기 뱃속과 욕망을 채우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했으면, 예수님이 그곳을 정리하시고, 성전이 철저히 무너질 것이라 저주하시고, 성전을 뒤돌아 버리셨겠습니까?

 

성전이 곧 철저히 무너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너무 놀랐습니다. 성전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헤롯이 주도해서 지은 곳이고, 당시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자들이 최고의 기술로 지은 완벽한 건물이었습니다. 또 신앙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성전만큼 튼튼하고 웅장하고 완벽한 건물은 없을 것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곳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성전만은 무너질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최고의 기술과 자재로 만들어진 까닭이기도 했고, 신앙의 관점에서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을 위해 지은 건물이라도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 흔치 않는데,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면,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직접, 그 성전이 철저히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셨으니, 제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얼마나 큰 재앙이 임해 성전까지 무너질 것인가 하는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가장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웅장하고 튼튼하고 잘 지어진 건물이 왜 무너지느냐 하는 것이 첫 번째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 바친 거룩한 건물, 신앙인들의 중심지인 성전이 무너지는 까닭이 무엇인지, 원인과 이유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성전이 철저히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 몇 명이 다른 사람들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라는 게, 성전이 왜 무너지는지, 무너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전이 무너지기 전의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이유, 그리고 무너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성전이 무너질 만큼 험난한 때를 어떻게 막거나 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세상 마지막 날에 자신들에게 피해와 아픔만 없으면, 성전이 무너져도 크게 마음 두지 않고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정작 꼭 물어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 것에만 관심을 두는 제자들의 질문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 중 하나는, 언제 세상이 끝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 날이 임하는지를 아는 것은, 그 때에 있을 고난과 재앙을 대비하고 피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이후에 기독교에서 가장 큰 질문이었고,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관심사입니다. 또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장 쉽게 시험하고, 구원을 받지 못 하도록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세상 끝날의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5,6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너뜨리려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다면, ‘능력자’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달고 오는 경우는 얼마나 많고 쉽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런 어리석은 가르침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약 한 달 전에도, 과천에 있는 은혜로 교회라는 곳이 그것이 알고 싶다는 프로그램에 고발되었습니다. 이미 교단에서 이단적인 문제가 있는 곳으로 분류되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목사가 교인들을 폭행하는 것은 물론, 가족들끼리 타작마당이라는 이름으로 폭행하도록 교사했습니다. 또 신도 400여명을 피지라는 외국 땅이 낙토즉 낙원과 같은 곳이라며 그곳으로 보내서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상식만 있어도, 말도 안 되는 것들임에도, 400명이 외국으로 옮겨 살고, 자기 재산을 모두 교회에 헌납하는 정도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속여서, 재산을 빼앗고, 가족들끼리 폭력을 행하도록 만들고, 외국으로 옮겨 살도록 만들었다면, 그 방법과 수단이 대단하고 교묘한 것 같아도 사실 별것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든지, 그렇게 해야만 세상 마지막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언제까지나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그런 것을 보고 겪어도 또 속습니다. 신앙인들의 관심사, 가장 큰 취약점이 무엇인지가 여기에서도 확인됩니다. 세상의 종말이 곧 오니, 어디 무슨 교회에 모여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시험이고 관심사입니다. 또 앞으로도 계속될 문제고 시험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끝날이 언제인가 하는 것에만 신경 쓰며 염려하는 것은, 단속 카메라와 경찰이 어디 있는지만을 생각하며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해진 규칙과 원칙대로 운전하는 이들에게는, 단속 카메라와 경찰이 어디 있는지 전혀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원칙대로 사는 신앙인에게는, 종말이 염려거리가 되지 못 합니다. 아니 정해진 대로 운전하면, 단속 카메라와 경찰이 있는 게 더 유익하고 반가운 것처럼,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 신앙생활면, 세상 끝날과 그 고난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이 됩니다. 지금 고난과 시험을 통해 내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세상 마지막이 오는 그때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가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때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13절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징조가 있는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끝까지 변질시키거나 잃지 않고 견디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종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우주적 종말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만드신 온 세상이 한 번에 모두 망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망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436절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면, 세상 끝날을 알 수 있는 길도 없고, 알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때를 안다고 말하는 이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에게 말씀해 주셔서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모두,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해서 함께 멸망하게 하려는 사탄의 세력입니다.

 

종말의 다른 한 가지인 개인적 종말은 개인의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 즉 육체의 죽음을 일컫습니다. 우리 각기 태어난 시간과 자리는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은 개인에 따라 조금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 망하는 우주적 종말이든,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의 종말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루를 산다는 것은, 바꿔 보면 종말에 더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그 끝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의 날은 하루 더 짧아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그 시간은 짧아지고, 가까워질 것이라면, 그 시간이 언제가 될 것인지 하는 것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지금 살고 있는지만 돌아보고, 하나님의 길과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무슨 어려움이 있든, 어떤 상황이 오든 믿음을 바르게 지키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때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또 그 날이 어떻게 오든 상관없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른 믿음을 변함없이 지키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세상의 종말, 또 각자의 끝날에 하루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날들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또한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지만, 끝날의 시기와 장소보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날과 그 자리를 아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그날에도 변함없는 바른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하나님의 인정과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말씀을 통해 알려주시는 말씀처럼, 엉뚱한 것에 힘쓰다 정작 중요한 것을 잃지 말고, 주님의 말씀의 뜻과 원칙만을 기억하며, 매일 그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있든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빗나가지 않고, 주님의 것을 지켜 행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