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1202)영혼의 눈을 청결케 해야 합니다(막 14장 43-52절)

청명하늘 2018. 12. 2. 22:21

영혼의 눈을 청결케 해야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443-52(81)

찬송: 288(예수를 나의 구주; 204), 338(내 주를 가까이; 364)

설교: 2018120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신학대학교는 신학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를 뜻합니다. ‘신학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신 하나님과 말씀과 계시 등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함께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에 대해서 연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인이죠.

 

신앙인들이 모인 학교라고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일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갈등이나 문제가 없고, 기쁨과 찬양이 매일 넘쳐날 것으로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로 신학대에 다니다 보면 금세 실망하게 됩니다. 제가 일반대학을 안 나와서 그 차이를 명확하게 모르기도 하겠지만, 기대만큼 좋은 모습만 있는 곳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생각해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죠. 신앙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라면, 규모가 크든 작든, 바깥세상의 모습과는 달라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모습이 언제나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은 아니죠? 교회가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 한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는 교회들도 많고, 또 그런 교인들도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왜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하는 신앙인들의 모임이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을 만큼 부족하고 잘못된 모습을 많이 보일까요?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과 연결해 답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하더라도 자기중심의 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신학대학교에서 수업하는 중에, 한 교수님이 교회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문제와 말썽을 일으킨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고, 특히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말썽을 많이 일으킨다고 하니, 더더욱 이해할 수도 없고,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현장에서 겪고, 또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기도란 종교와 상관없이 하죠?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드립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왜 많은 말썽을 일으키겠습니까?

 

그것은 자기중심의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도라고 하면 대부분 시간과 형식을 먼저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길면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고, 기도 형식에 따라 응답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에 대한 바른 생각입니다. 많은 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금식하며 기도하거나 작정 기도하는 것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뜻을 알고자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절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지 않고, 순수하고도 순진한 눈으로 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 기도와 관련해 보면, 기도 많이 하는 신앙인들, 기도의 능력이 있다고 하는 이들은 이런 점에서 쉽게 실수하곤 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에게 좀 불리하거나 어려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맙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죄인입니다. 이것은 모든 이의 영이 순수하지 못 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더불어 영의 문제에 대해 모두가 오염된 안경을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염되고 먼지투성이의 안경을 쓰면 흐릿하게 보이거나 왜곡되어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 위해서는, 안경에 묻어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오염된 것을 깨끗이 닦아 내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와 기도의 응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기도의 응답 등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눈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죄가 전혀 없을 만큼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겸손해야 하고, 욕심과 욕망이라는 오염을 끊임없이 닦아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바른 뜻과 말씀이 보이게 되고,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아내는 게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이기심과 오염된 판단을 제거해야 하고, 그렇지 못 하면 잘못 행하게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내시는 시간이 막바지에 이릅니다. 예수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시는데, 오늘 본문 전후의 시간은 목요일에 있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하루, 그것도 그때를 분명하게 안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이 많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할 것이 전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시간을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끝나자, 예수님을 팔기로 서로 약속한 유다가 왔고,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사람들도 함께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제자들은 잠깐 대항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결국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여기에서 유다를 포함한 제자들의 반응을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 때문에, 제자들은 전혀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이 구약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만 여러 능력이 나온다는 예수님의 말씀, 또 제자들도 많은 능력을 행했다는 내용들을 보면 제자들도 모두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인데 모두 같은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고, 좋은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닙니다.

 

먼저, 가룟 유다는,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스승인 예수님을 파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유다도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기도하고, 많은 능력을 행하기도 했고, 또 예수님이 기적 행하시는 것을 수없이 많이 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팔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을 법한 사람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유다가 이처럼 저주의 길을 선택하고, 앞장선 까닭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다도 기도했지만, 자기 욕심과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왜곡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성공적이고 평탄한 길을 걸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예수님을 따라 살면, 자신의 삶이 번성하고 바람대로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길은 유다의 기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유다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다음에 우리가 영원히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며 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몇 년 누리는 것에 욕심 부리며 살다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과 응답이란, 지금 당장 이 땅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일 수 없다고 여겼으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다는 성공과 편안함에 욕망이라는 안경을 쓰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봤으니, 예수님은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년이 넘는 시간을 예수님의 제자로 믿고 따라 살았으나,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권력을 얻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동안 잘 먹고 누리며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다고 하니, 유다는 차라리 예수님을 파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기도 응답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기도와 응답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제자들의 두 번째 모습은, 본문 50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중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베드로를 비롯해 모두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라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결과는 제자들의 계획과 예상대로 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자기 입을 통해 맹세할 만큼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이들의 다짐이 무너지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단 몇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다짐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다짐과는 달리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제자들의 모습은, 아무리 다짐하고 노력해도, 쉽게 무너질 만큼 인간이 연약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또한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는 기도가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드러나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고난과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을 만큼 믿음이 성숙하고, 그래서 고난과 아픔마저도 기꺼이 받아들 정도가 되었으면, 죽음의 위협에 처한 예수님을 모두 버리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 응답,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는 세 번째 모습은 본문 47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 제자들 중 몇은 칼로 대항하려 했고,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 제자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는 이 사람이 베드로라고 기록했습니다.

 

신앙인들이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상에서의 폭력은 없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의로운 폭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뉩니다. 나라와 가족과 교회를 지키고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힘으로라도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비폭력주의자들처럼 어떤 경우라도 폭력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생각의 차이와는 별개로, 오늘 본문에서 폭력을 보이는 베드로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론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승인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행한 폭력이니, 의미가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의를 위한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폭력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베드로의 이 행동과 반항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 중 하나를 칼로 공격해 쓰러뜨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최소 수십 명은 되었을 것이고, 그들을 모두 물리쳤다 하더라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뒤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을 기도와 응답의 관점에서 보면, 근본적인 도움이나 해결책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것만 해결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단지 칼을 들고 싸우려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붙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고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와 연결해 보면, 기도와 응답에 대한 태도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제자들 모두는 성숙하지 못 했습니다. 신앙에 대한 자세도 잘못되었고, 기도와 응답에 대한 판단과 기준마저도 잘못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보여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여주고, 버려야 할 것들은 붙잡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들은 버리고 마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지거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바른 기준을 갖지 못 하면, 우리도 역시 제자들처럼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게 됩니다. 유다처럼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뻔한 인생을 선택하기도 하고, 크고 근본적인 것은 행하지 않고, 잠깐의 해결책을 붙잡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길은 모두 신앙인들이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들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누리고 갖는 것보다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도, 철저히 우리 욕심과 욕망 가득한 안경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나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뒤로하고, 하나님의 뜻은 받아들이고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비록 내게 유익이 되고, 성공하는 길이라 하더라도 버릴 줄 아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권리이자, 하나님 나라에서 약속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욕망과 거짓의 시선을 버리고, 오직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의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날마다 우리를 복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