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7)부활과 영생을 기억하십시오(막 16장 1-8절)
부활과 영생을 기억하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16장 1-8절(신 85쪽)
찬송: 258장(샘물과 같은; 통190), 486장(이 세상에 근심된; 통474)
설교: 2019012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2008년도에 일본에서 만든 영화들 중에 ‘굿바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굿바이’는 헤어질 때 하는 영어 인사로서 “안녕!”이라거나 “잘 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제목처럼, 사람들의 작별을 다루는 것입니다. 헤어짐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겠지만,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겪어야 하는 작별이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이겠죠? 죽음이 무엇이고,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아니고, 죽은 이들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은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악단에서 첼로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속해 있던 악단이 갑자기 해체되고 맙니다.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직업을 찾다가 ‘연령 무관, 고수익 보장’이라는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시신을 씻기고 화장하는 일을 하는 업체입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납관’이라고 하는데,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옷으로 치장하는 작업이니, 우리나라에서는 ‘염습’ 혹은 ‘염’이라는 절차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음악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염이나 장례에 관한 절차도 잘 모릅니다만, 악단에서 전문적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라 하면 왠지 고급스럽고, 나름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시신을 만지고, 장례 절차를 담당하는 일은 많은 사람이 기피하는 일로 여겨집니다. 이 영화에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아내마저도, 남편이 장례지도사의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고 또 반대합니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연령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마저도 고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대사 중에 “죽기 싫으면 먹을 수밖에 없지. 먹는다면 맛있는 게 편이 좋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대사는 이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염’ ‘염습’이라는 것은 매장하거나 화장하기 전에 시신을 깨끗이 닦고, 옷을 입히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시신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분장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입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만큼이나 시신의 상태도 다양하겠죠? 상태가 온전한 시신도 있을 것이고, 죽은 지 시간이 꽤 흘러서 크게 부패한 시신도 있겠죠? 이런 시신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가장 아름답고 예쁘게 분장한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시신을 가장 예쁘게 꾸미고 분장하는 까닭은, 마지막 이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분장을 하든, 그냥 죽은 그대로 장례를 치르든, 죽은 사람이야 상관없겠지만, 죽은 사람을 보내야 하는 남은 사람들의 마음은 달라집니다. 갑작스레 죽으면, 마지막까지 미안함과 마음을 풀어내지 못 한 채 영원히 작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가장 아름답게 분장함으로써, 마지막 이별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내용들 중에, 여자가 되기를 바라다가 죽은 남자 청년이 있습니다. 남자임에도 여자처럼 옷을 입고, 말과 행동도 여자처럼 했습니다. 아직도 이런 것에 대한 반감이 많죠? 이 남자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남자 청년이 바람과 현실 사이에서 힘들어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족들로서는 아들의 방황이 안타깝고 또 반대했지만, 목숨을 끊을 정도가 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차라리 아들이 원하는 대로, 여자로 사는 것을 허용했으면 그래도 살아 있을 텐데 하는 마음에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염습을 하는 사람들이 죽은 청년을 여자의 모습으로 분장시킵니다. 가족들은 여자처럼 분장되어 누워 있는 아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말을 전하고,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풀고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하고, 모든 이들과 이별해야 합니다. 어차피 작별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작별하는 게 좋습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면, 맛있는 게 좋습니다. 같은 음식이면, 깨끗하고 예쁘게 만들어지고 차려진 게 더 좋습니다. 미움과 아픔과 미안함을 풀어 없애야 하고, 전하지 못 했던 사랑을 전하는 게 좋습니다. 같은 조건이더라도 더 좋은 상황을 선택하는 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 답하기 어렵습니다. 겨우 답을 찾는다면, 보내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조금 더 느끼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그나마 조금 덜 느끼는 길은 될지 모르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아 있는 것처럼, 아무리 예쁘고 또 아름답게 분장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죽었고, 보내야 하는 사람은 보내야 합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겠지만, 먹을 때 잠깐 우리의 입맛을 즐겁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별로 없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속으로 들어가면 똑같고, 맛없는 음식도 속으로 들어가면 똑같습니다. 예쁘게 만들면 잠시 눈을 즐겁게 하고, 더 맛있게 보이도록 도움을 주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입속으로 들어간 순간부터는 보기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달라지는 것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기 좋고, 예쁘게, 맛있게 만들며 노력하는 것을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근본적인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런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일들에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들은 이렇게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취를 감췄고, 여인 몇 명만이 계속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던 빌라도의 선고에 의해 처형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목숨을 걸고 나서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빌라도의 허락을 받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고 가서 굴에 넣고 앞을 큰 돌로 앞을 막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시는 순간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했던 여인들은 세 명입니다. 일곱 귀신이 들려 고통당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해방된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두 제자의 어머니인 살로메,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입니다. 세 여인 모두 시골의 작고 가난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도 아니고, 그런 자들과 연줄이 닿지도 않은 말 그대로 작은 촌에서 온 노인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것이라곤 별것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 따라가고, 장사되는 과정과 장소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여인들이 예수님이 묻힌 굴에 찾아오는 때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이틀이 지난 후입니다. 요즘 우리가 세는 요일로 계산하면, 예수님은 금요일에 돌아가셨고,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날 바로 무덤을 찾지 않고, 이틀이 지난 후에야 찾은 까닭은, 장사된 지 3일만에 부활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토요일인 안식일에는 힘써 일하는 게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난 후 이틀이라는 시간이 이 여인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었을지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고 처형당하시는 순간에는 워낙 경황이 없었지만, 이틀 동안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되자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예수님이 묻혀 있는 무덤을 향합니다. 새벽에 무덤을 향했다는 것은, 이미 그 전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이 준비한 것은 향품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향품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지만, 이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직접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그때 발랐겠지만, 최고 권력자의 결정에 따라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이 여인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차 썩어갈 시신을 생각하며 향품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에서 보이는 세 여인의 정성은 대단해 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잘 드러납니다. 무서워서라도 웬만해서는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지 않을 상황임에도, 이 여인들은 거리를 좀 두었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아픔이 워낙 커서, 다른 것 생각할 겨를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는 때를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예수님의 무덤을 향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크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가면서, 죄수의 무덤을 찾은 것으로 처벌 받지 않을까를 가장 먼저 염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어떻게 옮기느냐 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이 대단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 수고하고 준비한 것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고 함께 아파한 것이 칭찬을 받을 일이긴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아파하며 향품을 준비한 정성도 칭찬을 받을 만합니다. 고난과 두려움을 이기고, 예수님의 무덤을 가장 먼저 찾아간 것도 대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과정이 실제 무슨 의미를 주고, 무슨 변화를 가져다 줄지를 생각해 보면,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권력 있는 자들의 결정에 의해 예수님이 붙잡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나이 많은 여인 셋이 그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향품이 아무리 좋은 냄새를 풍긴다 해도, 시신이 부패하며 내는 지독한 냄새를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새벽에 찾아가는 정성은 대단한 것이지만, 여인들로서는 다른 무엇보다 무덤의 돌을 옮겨야 하는 보잘 것 없는 문제부터 고민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세 여인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보이는 이 모든 과정이 마치 우리 인생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모두는 각자의 계산대로 살아갑니다. 성공의 길을 찾고 차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나아갑니다. 더 좋은 것을 갖고, 누리고, 먹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더 좋은 것들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를 위한 경쟁은 어려서부터 시작됩니다. 학교에 가고, 필요한 것들을 배웁니다. 이에 대해 좋은 것을 보고 배우기 위한 것이라 점잖게 말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해야 나중에 좋은 것들을 얻을 기회가 많아지고,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좋은 직장을 얻는 게 가장 큰 목표입니다. 그렇게 좋은 직장을 얻으려 혈안이 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더 많이 더 좋은 것들을 얻고, 더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으면 차를 사더라도 더 좋은 차를 살 수 있죠? 돈이 넉넉하면 집을 지어도 더 예쁘고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먹기 위해 살아야 하는데, 돈이 많으면 맛있는 것들을 더 많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부분의 인생 목표가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는 대로 좋은 것을 갖고, 누리고, 맛보고 살아도 그 시간이 영원하지 못 합니다. ‘저것만 얻을 수 있으면...’ 하는 것들이 있는데, 소원대로 갖게 되어도, 그 기쁨이 오래가지 못 합니다. 아무리 좋아하고 맛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몇 끼 먹고 나면 금세 물리고 맙니다. 아무리 좋은 집, 좋은 차를 사더라도, 그 기쁨도 역시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것,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사실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얻었다고 삶의 길이가 몇 배로 늘어날 것들 아니고, 소원대로 모두 이루었다고 해도 결국 죽음의 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이 없는 삶은 그 자체가 실패한 것이고, 보잘것없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여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맡겨진 일을 해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땀 흘려 일해서 좋은 것들을 얻어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만 인생의 최고 목적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몇 년 뒤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되고, 그때가 되면, 그토록 애정을 갖고 집착하며 노력했던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부활과 영생의 길을 약속하셨고, 예수님이 직접 가장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이 없으면, 지금 우리가 힘써 가꾸고 노력하는 과정은, 몇 년 혹은 몇 십 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 하게 됩니다. 돈 많은 게, 좋은 집을 가졌다는 게, 넓은 땅 많다는 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다는 게 죽음 앞에서 무슨 의미와 가치를 가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기억하며, 이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오셔서 직접 보여주셨고, 부활의 첫 모습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주어진 과정에서 노력하나, 우리에게 주신 부활과 영생을 기억하고 믿고 준비하며 살아감으로써, 이 땅의 삶이 끝났을 때 부활의 선물을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