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4)복 받은 자에 합당하게 사십시오(삼상 1장 1-8절)
복 받은 자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1장 1-8절(구 408쪽)
찬송: 320장(나의 죄를 정케; 통350), 430장(주와 같이 길; 통456)
설교: 2019022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작년 10월에 올라온 뉴스들 중에 ‘수레 끌던 할머니 돕다 사고로 숨진 20대 청년이 7명에게 장기기증을 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https://www.insight.co.kr/news/183403)
제주에서 있었던 일인데, 20살의 대학교 1학년 청년인 김선웅 군이 새벽 3시경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손수레를 끄는 할머니를 봤습니다. 새벽 3시면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드문 시간이죠? 그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했으면, 일의 종류와 시간과는 별개로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연세 많은 분이 무거운 수레를 끄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것을 도와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과속한 차에 치어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병원에 옮겼지만, 사고 이틀만에 뇌사 판정을 받고 말았습니다. 식물인간으로 있던 사람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뇌사 판정을 받으면 다시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청년이 대단해 보이죠? 자기 힘들고 지친 시간, 어두워서 보는 사람도 없으니 그냥 지나치기 쉬울 때임에도, 모르는 할머니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그 마음과 행동만 해도 칭찬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또 그런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어려움을 당했으니 귀한 삶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가족들이 이 청년의 몸을 장기기증했습니다. 뇌사는 뇌는 죽었지만, 다른 장기들은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뇌는 살아 있지만, 다른 장기들이 병들거나 다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청년의 신장, 폐, 각막 등을 기증해서 총 7명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청년이 장기기증을 결정하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이 청년의 어머니도 사고로 뇌사상태로 있다가 청년이 9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이때 가족이 모두 장기기증을 서약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청년이 뇌사에 빠지자, 그 서약대로 장기를 기증한 겁니다. 기증하기로 서약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면, 가족의 반대 등으로 실행하지 못 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청년이 살아간 과정도, 가족들의 희생도 귀하고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무엇보다도 착한 청년이 너무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깝죠? 이 청년의 소식을 전한 방송에서 어떤 사람은 “신은 왜 이런 착한 사람을 일찍 데려가느냐?”는 말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물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두 가지 이유로, 청년과 가족이 기독교인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청년이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장기 기증을 이미 약속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유교의 중요한 생각 중 하나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것입니다. 몸과 머리털과 피부를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게 효도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장기기증은 가장 큰 불효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 하고 일찍 죽는 것만으로도 불효인데, 병들고 다친 사람들을 살린다며, 신체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니, 얼마나 큰 불효이겠습니까?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한 사람이 희생해서 여러 사람을 살리는 게 더 큰 희생이고, 사랑이라 가르치고, 이 청년의 삶이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까닭은, 이 가족이 예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되었든지 자기 가족을 잃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젊고, 건강한 가족을 잃을수록 안타까움은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 청년은 젊고 건강할 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한 까닭이 더 안타깝게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 그것도 착한 일을 하다 사고가 나고 사망하게 되었으니, 가족으로서는 슬픔이 훨씬 클 것입니다. 선을 행했는데, 그에 대한 복과 보상은 받지 못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사망했으니,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하늘을 원망하고 욕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가족을 잃는 슬픔 앞에서, 다른 이들의 질병과 고통이 눈에 들어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원망과 슬픔만으로 그치지 않고, 남을 위해 더 희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몸을 희생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런 사랑과 희생은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들죠? 마지막까지 철저히 희생하고, 사랑을 베푼 것을 보면, 삶의 모든 과정에 대한 이 가족들의 생각이 보통 사람들과는 한참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보통 사람처럼 생각한다면, 이 청년과 가족만큼 불쌍한 사람들도 없습니다. 하지만 삶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이분들만큼 가치 있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생명과 복이 달려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면, 이분들처럼 남을 위해 자기가 희생하고 죽는 것을 높이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 살게 되는 몇 십 년의 시간보다, 하나님 곁에서 영원히 살게 될 날들을 더 크게 볼 수 있고, 그런 믿음으로 실천한 이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붙들어 주시고, 큰 은혜와 복으로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삶의 시간들과 과정들에 대해 반대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는, 이 땅에서 갖고 누리는 것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고, 이 땅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더불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갖고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베풀기보다는 이를 자랑하고, 더 나아가, 갖지 못 한 이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더 괴롭히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이런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브닌나라고 하는 여인입니다.
지난주에도 같은 본문으로 말씀을 살펴봤습니다만, 오늘은 이같은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려 합니다. 본문은 사무엘이라는 신실한 인물이 나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나오기 전을 ‘사사시대’인데,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는 왕이 없이, 재판관의 역할을 하던 사사들이, 나라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던 때였고, 사사들 중에서는 삼손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때는 혼란스럽고 암흑과 같은 시기였습니다. 각자 자기 보기 좋은 대로 살았고, 바른 영적 지도자가 없으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이들이 많지 않았고, 다른 민족들의 영향으로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많을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엘가나라는 사람은 매년 하나님께 예배하러 실로에 올라갔습니다. 엘가나가 제사하러 가는 실로까지의 거리는 20km 정도 되는데, 여기에서 목포역 정도의 거리입니다. 요즘처럼 길이 잘 만들어졌어도, 몇 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제사하러 가려면, 사람만이 아니라, 제물로 드릴 짐승들까지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아마 오가는 데만 해도 이틀은 걸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에 나온 것처럼, 한나와 브닌나의 사이가 너무 안 좋습니다. 가면 뻔히 싸우고, 한 쪽에서는 울고 음식을 안 먹을 만큼 슬퍼하는 이가 있는데,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가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엘가나는 매년 하나님께 제사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만큼 엘가나는 당시에 찾아보기 힘들 만큼 신실하고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엘가나의 두 아내 사이가 아주 나빴다는 겁니다. 1년에 한 번 하나님께 제사하러 가는 날은, 다툼과 아픔이 특히 커집니다. 싸움과 슬픔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아이를 낳았느냐 그렇지 못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브닌나는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는데, 한나는 낳지 못 했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배로 받았지만, 더불어 브닌나의 시기와 질투를 몇 배로 심하게 받아야 했습니다. 이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평생 한 번 먹기조차도 쉽지 않은 고기, 제물로 드리고 난 후의 고기를 다른 사람보다 두 배를 받았지만, 한나는 한 입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없을 만큼, 아이를 낳지 못 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펐고, 이를 이용한 브닌나의 괴롭힘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 한 까닭을 5,6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의 원인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태를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곧, 이 세상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복을 인정하며 살아야 함을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반대로 브닌나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나의 태를 닫고, 아이를 낳지 못 하도록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두 번 연이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결정과 선택이 중요하다는 뜻이죠? 그러면, 브닌나가 아들딸을 여럿 낳은 것은 누구의 선택과 결정일까요? 하나님이시죠? 태를 닫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태를 열어 아이를 낳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죠? 이를 보면, 한나와 달리 브닌나가 여러 아들딸을 낳을 수 있는 복을 누리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브닌나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어떻게 이용하며 살아야 할까요? 마땅히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은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먼저는 감사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이 복을 선하고 옳은 수단과 도구로 이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브닌나는 정반대로 이용합니다. 자신이 받은 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를 이용해 한나를 괴롭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선하고 의로운 일에 사용하지 못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남을 괴롭히고,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 일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브닌나가 하나님의 선물을 더 악랄하게 사용하는 때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주일만이 아니라, 수요일이나 다른 시간까지 정해서 예배를 자주 드립니다. 자주 드리는 것 자체는 좋지만, 너무 많이 드리고 익숙해지다 보면,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예배를 드린 것도 아니고, 안 드린 것도 아니고, 말씀을 듣는 것도 아니고, 안 듣는 것도 아닌 것처럼 되곤 합니다.
그런데 1년에 한 번, 가족 모두가 함께 간다면, 그날을 위해 얼마나 정결히 준비하겠습니까? 더욱이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생사화복을 결정하시는 하나님께 제사하러 가는 날이라면, 그 마음과 자세가 어때야 할지 분명합니다.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삶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결심대로 살지 못 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하나님께 제사하는 날만이라도,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려 다짐해야 합니다.
하지만 브닌나에게서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거칠고, 자신이 받은 복들을 이용해 약자를 오히려 더 괴롭힙니다. 브닌나의 괴롭힘이 얼마나 심했는지, 6절에서는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하고, 7절에서는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하나님께 제사하러 가는 날에는 평소보다 더 심해졌으니, 과연 브닌나가 하나님께 제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옵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와 물질을 드립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그치고 말면, 브닌나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지만, 자신이 받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덜 가지고, 덜 누리는 이들을 여전히 괴롭히고, 슬프게 만든다면, 우리는 브닌나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가졌으면, 재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재물을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에 써야 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건강의 복을 받았으면,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건강한 몸으로 선하고 의로운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브닌나처럼, 오히려 이를 이용해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더 괴롭히는 신앙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좀 더 가졌다고, 덜 가진 이들을 무시하며 함부로 대합니다. 건강하다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고, 함부로 행동합니다. 예배와 헌금과 기도의 기회마저 갖기 어려운 이들을 위로하고, 함께 신앙생활하도록 돕기보다는, 자신만큼 예배하지 못 하고, 헌신하지 못 한다며 못되게 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다른 이들보다 중직과 직분을 맡았다며,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인격적으로 못되게 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브닌나와 같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자신이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 받았음을 인정하지 못 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이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복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교만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악하게 이용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악입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브닌나 같은 모습이 없는지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며 감사하되, 더욱 겸손히 선한 도구가 되도록, 말과 행동과 삶에서 더 조심하고 걸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더 큰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들을 바라며 살아가되, 받은 것들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의 이웃에게는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살아서, 뜻하신 바대로 살아가는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날마다 충만히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