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0)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기도를 드린 한나(삼상 1장 9-20절)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기도를 드린 한나
성경: 사무엘상 1장 9-20절(구 408쪽)
찬송: 182장(강물같이 흐르는; 통169), 539장(너 예수께 조용히; 통483)
설교: 2019031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는데, 행색이 초라한 한 사람이 와서 “제사상에 개고기를 올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공자가 개고기로 제사상에 올려도 된다고 답합니다. 조금 더 길을 가는데, 옷차림이 화려한 사람이 와서 “조상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개고기를 올려도 됩니까?”라고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공자가 이번에는 개고기를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대답했습니다.
좀 이상하죠? 제사상에 올리는 문제, 그것도 개고기를 상에 올려도 되는가 하는 같은 질문을 두 사람이 던졌는데, 한 사람에게는 그래도 괜찮다고 답해 놓고, 다른 사람이 같은 질문을 던지니, 이번에는 안 된다고 답한 겁니다. 그래서 제자가 왜 그렇게 서로 다른 답을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공자의 답은 이렇습니다. 먼저 찾아온 사람의 초라한 옷차림으로 봤을 때, 너무 가난해서 다른 것을 제물로 드리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너무 가난해서, 일반적으로 제사상에 올릴 다른 고기나 생선 등을 살 형편이 안 됩니다. 그나마 개가 그 사람이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 개고기를 제사상에 올려도 된다고 답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은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고기와 생선 등을 사서 제사상에 올릴 수 있을 만한 여력이 됩니다. 형편이 되는데도,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개고기를 제사상에 올린다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라, 허락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공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형식과 내용을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즘엔 제사를 안 드리는 사람들도 많고, 또 제사 풍습도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 제사상에 올릴 수 있는 것들과 올릴 수 없는 것들이 구분되죠? 그리고 개고기는 제사상에 안 올리는 게 예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법이라는 형식을 넘어서는 것이 그 속에 담긴 정성과 마음이라는 겁니다. 제사의 근본은, 단지 고기를 올리느냐, 무슨 고기를 올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감사와 정성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상에 올릴 것이 없다면, 천한 고기로 여겨지는 개고기를 올려도 괜찮다는 겁니다. 무엇을 드리느냐 하는 모양과 형식보다는,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건과 형편이 허락함에도 천한 개고기를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옳지 않다는 겁니다.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 자세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는 형식과 내용 중에 어느 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까? 형식인가요? 그 속인가요?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입니다. 다른 종교들의 경우 대개 형식과 겉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과 자세로 신앙생활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정해진 순서를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얼마나 바치느냐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디에서도 속과 내용보다 겉과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많이 헌금하고, 헌신하는 것을 원한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 우리의 속사람을 보시고 바라십니다.
그러면 기도는 어떨까요? 하나님은 기도에 대해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실까요?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얼마나 많이 드리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아니면 우리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얼마한 간절함과 믿음으로 기도하는지에 큰 관심을 가지실까요? 하나님은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마음과 어떤 믿음으로 기도하는지를 보십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정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는 까닭은,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기도의 응답을 잘 받기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시간과 형식입니다.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해야 응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날짜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 된다고 말합니다. 이보다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게 더 잘 응답된다고 말합니다. 산에서 기도하는 게 좋고, 밤을 새서 철야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 받는다고 말합니다. 목소리를 크게 해서 기도해야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언젠가도 한 목사님과 새벽기도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작은 교회라 새벽기도회라고 해도, 참석하는 분은 몇 분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소리를 내서 기도하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면 사모님이 뭐라 하신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처럼, 소리를 크게 내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처럼 글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면 엉뚱하게 해석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절에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9절에서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라 하십니다. 글자대로 읽고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몸이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산에서 기도하는지, 골방에서 기도하는지, 큰 목소리를 내며 기도하는지,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는지, 밤에 기도하는지, 낮에 기도하는지에 대한 것보다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마음과 믿음으로 기도하는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나의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기도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 해서, 적수라 할 수 있는 브닌나로부터 온갖 무시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남편은 한나에게 다른 사람의 두 배의 고기를 주었지만, 한나로서는 그 고기 한 점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한나를 향한 남편의 애틋함과 사랑과 정성이 한나의 고통과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사무엘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2장 21절에 나온 것처럼, 이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나실인으로 살게 하겠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가장 큰일들을 해내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어떻게 기도의 응답을 받고, 바라던 것보다 훨씬 큰 복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기도의 형식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본문 12-14절에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실로에는, 제사를 총괄 책임지는 엘리라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는데,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 취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의 특징들 중 하나는, 멀쩡할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일단 술이 들어가면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죠? 이보다 더 심한 사람들은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이죠? 답해줘도 몇 초만에 또 같은 말로 괴롭힙니다. 평소에는 좋은 사람 같았는데, 술만 들어가면, 폭언을 내뱉고, 폭력적으로 변한 사람들도 많죠?
13절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는 말씀을 보면, 엘리가 보고 마치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한 까닭은,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데, 한나는 입만 움직일 뿐 소리를 내지 않아서 오해한 것인지, 아니면, 보통은 소리나 입술의 움직임마저 없이 속으로만 기도하는데, 한나는 입술을 움직여서 기도해서 오해한 것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나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리 기도했음에도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형식을 보고 응답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하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특별한 은혜와 응답을 베풀어 주셨겠습니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본문에서 답을 찾아보면 19절 끝부분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다’는 표현을 ‘불쌍히 여기다’ 혹은 ‘형편을 보다’는 뜻으로 풀이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기억하다’입니다. 그래서 한나에게 가장 크고 어웠던 문제와 고통이 해결되고, 바라던 것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게 응답받은 까닭은 바로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무엇을 기억하셨겠습니까?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한나의 무엇을 기억하셨기에, 이처럼 큰 은혜와 복으로 응답하셨겠습니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풀이합니다만,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 두 가지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는, 자신이 처한 아픔과 어려움을 푸는 데 있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봤습니다. 한나가 살던 시대는, 종교적으로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에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었고, 그 아들들이 대를 이어 제사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들들은 오히려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제사장이면 제사장답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 인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앞장서서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는 2장 25절 말씀 하나만으로도 요약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할 제사장들마저 이렇게 하나님과 맞서고,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할 정도면,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한나가 어떻게 이처럼 순전하고도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남편 엘가나는 그나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정도였지만, 나머지 삶을 보면 엘가나가 한나를 이런 수준의 신앙으로 이끌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다른 누구의 모습을 봐서도 아니고, 누군가에 배워서 그런 것 같지도 않음에도, 한나는 억울함과 아픔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갑니다. 제사장이 술 취해 주정부리는 것으로 착갈할 만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고, 간절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신 또 다른 까닭은, 한나가 신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실’(信實)이란 알맹이가 있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한나의 믿음은 겉만 그럴듯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인정하실 만큼 순수한 믿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들을 낳은 후의 모습을 통해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나에게 자녀란 단순한 후손의 의미가 아닙니다. 억울함과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었고, 그만큼 어렵게 얻은 사무엘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까지 낳았으니, 그 동안 자신을 괴롭힌 브닌나에게 보란 듯이 자랑할 수 있고, 남편의 사랑까지 내세워 되갚고도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세운다고 서원해서 어쩔 수 없다면, 성년이 되기 직전에야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서는 머뭇거리거나 변질시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과의 약속을 실행합니다. 보통 아기들은 늦어도 18개월이면 젖을 뗀다고 합니다. 만 2살도 안 된 때입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세 살 되었다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할 때입니다. 너무 비정해 보일 만큼 한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한나의 이 믿음과 약속을 기억하셨기에, 한나에게 넘치는 복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단지 서원기도를 해서 혹은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한나가 기도로 하는 모든 약속들이, 단지 아쉬운 때 쉽게 내뱉고, 쉽게 잊어버리고, 나의 유․불리에 따라 변질시키는 게 아니고, 마음을 다한 기도였고, 응답을 받은 이후에도 한치의 변함이나 망설임 없이 실행할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들, 해결되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모든 것을 구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십니다. 한나처럼 잘못된 주위환경에 따라 믿음을 변질시키지 말고, 나의 유익에 따라 쉽게 약속하고, 쉽게 어기는 자 되지 말고, 오직 신실하게, 간절하게, 순전하게 믿고 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신앙을 품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복을 받고 살아 나아가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