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31)오직 나의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삼상 2장 18-26절)
오직 나의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2장 18-26절(구 410쪽)
찬송: 419장(주 날개 밑; 통479), 488장(이 몸의 소망; 통539)
설교: 2019033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얼마 전에 한 목회자의 일을 잠깐 도와드리러 갔다 잘 마치고 돌아오는데, 이분이 갑자기 교회 세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교회 세습’이란 담임 목사가 은퇴하고, 그 자리에 담임 목사의 아들, 사위나 친척 등이 담임 목사로 부임해서 운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 대형 교회들 중에는 교회를 세습하는 경우들이 꽤 있었습니다. 대형교회들로는 충현교회, 숭의교회, 금란교회, 광림교회 등입니다. 이 교회들은 교인의 수가 10,000명 이상 되는 교회들이고, 이보다 규모가 좀 작지만 이미 세습한 교회들은 수십 개, 수백 개나 됩니다.
‘좀 작다’는 표현을 쓰면, 대곡교회만한 교회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곡교회처럼 작고 미약한 교회는, 세습을 허용한다고 해도 절대 안 하려고 하죠. 세습하려는 교회들은, 세습이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작고 미약한 교회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절대 안 합니다. 왜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서도, 작고 쉬운 십자가는 안 지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습하려는 교회들은 수백 명, 수천 명 이상의 대형교회들입니다.
그런데 함께했던 목회자가 이 문제를 꺼냈어요. 그저 이 문제를 염려하는 것이었으면, 듣고 지났을 것인데,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세습이 금지되긴 했지만,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세습했지만 잘 운영되고, 잘 성장하는 몇 교회들을 예로 들었는데, 어떻게 제 생각을 잘 아셨는지, 하나 틀리지 않고, 제가 아주 싫어하는 교회들뿐이었습니다.
이분이 세습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담임목사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그 교회에서 자라서, 그 교회의 사정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목사가 왔을 때 겪어야 하는 문제들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담임목사가 그만큼 교회를 잘 성장시킨 것은, 그 목사에게 특별한 능력과 은사가 있기 때문인데, 교회를 이어받는 아들이나 가족들도 이 능력을 받을 것이기에 교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좀 얌전한 척을 잘 합니다. 또 이분은 저보다 연세가 꽤 많아서, 그런 문제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납득도 안 되고, 좀 화도 나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교회에서 세습 금지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세습이라는 게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고, 만들었으면 지켜야 한다. 그런데 총회장을 지내고, 그 교회에서 세습 금지법이 통과되었는데, 그걸 어기고 세습하려는 것은 맞지 않다. 그렇게 법을 어기는 교회는, 규모와 영향과는 별개로, 기독교와 교단과 교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쳐내야 한다.
또 세습한 교회들을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보겠나? 그렇게 세습해서 몇 백 명이 늘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 세습이 있을 때마다, 교회를 등지고, 신앙을 버리는 이들이 수없이 많을 텐데, 이에 대해서 누가 책임지겠나? 세습한 교회들도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겠지만, 사람들은 그런 곳을 개인 사업체로 여기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겠나? 아마 이분은 속으로 ‘이놈이 좀 얌전하고, 괜찮은 놈인 줄 알았는데, 오늘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이야기처럼, 교회를 아들이나 사위나 가족에게 세습하는 걸 좋게 여기는 근거로 삼는 것들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어려서부터 그 교회에서 자라서 교회 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고, 아버지가 받은 특별한 은사와 능력을 아들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여쭤 보면, ‘교회 세습의 잘못된 점들을 내내 이야기해 놓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두 가지 점을 성경 속에서 찾아보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18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으로, 기도를 통해 아들을 낳은 후에, 한나는 여전히 신실하게 하나님을 잘 섬겨서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얻었고, 사무엘은 사람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22절부터 나오는 것으로,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나의 이야기와는 정반대입니다. 오늘 본문 앞 2장 12절부터 엘리의 아들들이 행한 악행들이 기록되었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자기의 욕심을 위해 멋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도 자기들 것부터 챙겼고, 욕심을 채우려 허락되지 않는 세 살 갈고리를 만들어 도둑질했습니다. 또 당시 율법에는 금지되었던 생고기를 먹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가졌지만, 전혀 제사장답지 못 했습니다.
이들의 죄악에 대해 17절에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심함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소년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들이 제사의 규례와 절차를 모른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만, 소년들이 아니라 이미 결혼할 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다만 늙을 만큼 나이가 많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소년들’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단순한 착각이나 한 번의 실수로 죄를 지었다는 게 아니라, 반복적이고 고의적이었음을 뜻합니다. 자기들의 욕심과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했습니다.
이것만 해도 이들의 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심각하고 무서운 죄를 짓습니다. 22절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라는 말씀처럼, 회막의 일을 도와주는 여인들과 동침하기까지 했습니다.
‘회막’이란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입니다. 건물로서 세워진 것은 아니고, 천이나 가죽 등을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잠깐 사진을 보실까요?
그래서 회막을 영어로는 ‘Tent of Meeting’이라고 합니다. 번역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천막’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성전처럼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곳이 건물로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하기 위해서는 천막으로 된 회막으로 나아와야 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예배당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얼마나 거룩합니까? 그런데 제사하러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결하고 거룩한 몸과 마음으로 나아오는데, 엘리의 두 아들은 그곳에서 온갖 죄를 저질렀습니다. 심지어 회막에서 여러 일들을 도와주는 여인들과 잠을 자는 악행까지 저질렀습니다.
제사장을 요즘으로 바꿔 보면, 여러 다른 점들이 있지만, 목회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신앙인들에게 전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인도하는 것으로 보면, 제사장과 목회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이니,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더 거룩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를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를 더럽히는 데 앞장섰습니다.
한나의 가정 이야기와 엘리 가문의 모습을 보면 어떤 것 같습니까? 이 둘이 바뀐 것 같죠? 한나의 아들인 사무엘은 나중에 커서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지만,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회막에서 심부름하고, 잡일 하는 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또 하나님께 기도한 것들은 변질시키지 않고 철저히 행합니다.
한나 가정과 엘리 가문의 행실에 따라 그 결과도 정반대였습니다. 한나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는 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26절의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는 말씀처럼, 사무엘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나 엘리 가문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한순간에 망하고 맙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하나님과 제사를 무시하며 악행을 저질렀던 두 아들은 전쟁에서 한 날에 죽고, 그 충격으로 엘리도 죽고, 둘째 며느리도 죽습니다.
한나 가정과 엘리 가문이 정반대로 살아가고, 그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한 것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교회나 신앙에 대해 많이 듣고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 회사는, 회사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업체는 이익을 더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회사가 무슨 일을 하고, 누가 어떤 자리에 잘 맞는지 잘 파악해야만, 더 많은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욕심과 계산 위에 세워지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세워졌지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가치는 곳이 아니라, 위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향해야 하는 곳입니다.
세상의 방식만으로 판단한다면, 엘리의 두 아들의 모습들도 크게 나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자기 욕심을 위해 이용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드릴 제사는 드렸습니다. 제사의 절차와 횟수로만 판단한다면, 이들만큼 모든 순서를 잘 알고, 또 많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회막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회막에서 제사는 잘 드렸을 것입니다. 제사장인 아버지와 살면서, 어떤 제사는 어떻게 드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절차와 내용을 잘 알고,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제사를 인도한 엘리의 두 아들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멸한 것으로 여기시고 벌하셔서 죽이셨습니다. 누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가 교회의 여러 절차를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은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오직 누가 그 중심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진실하게 믿으며 사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두십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어떤 교회든지 필요로 하는 목사는, 목사의 아들인 목사가 아니고, 교회의 내부 관계를 잘 아는 목사도 아니고, 오직 말씀을 바르게 알고, 가르치고, 해석해 전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해석과 방식 이외의 것에 따라 세워진 교회라면, 그래서 그 교회를 잘 아는 목사만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잘못된 교회, 어쩌면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사업체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한나 가정과 엘리 가문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와 능력은 철저히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처럼 사람들의 관계에 따라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가 혈연에 따라 주어진다면, 엘리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받은 은사와 능력과 은혜를 사무엘보다 훨씬 크게 받아야 합니다. 엘리 가문은 대를 이은 제사장 가문이었고, 또 엘리는 사사로서 40년이나 활동했습니다. 왕이 없던 시절에, 재판관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서열을 정한다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만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이나 교육으로만 보면, 엘리의 두 아들들만큼 기회와 은혜를 받은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럼에도 두 아들은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한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하나의 말씀과 계명과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한나의 모습을 봐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무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것을 귀히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받은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그의 아들들은 받지 못 했지만, 사무엘의 부모들이 받지 못 했던 특별한 은혜와 선택을 사무엘은 받았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모가 받은 선택과 은혜가 그의 자녀들과는 전혀 별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 목회자가 받은 특별한 능력이 그 자녀와 가족에게서 나타나고, 더 유익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과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그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의 윗대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으면, 그것을 기억하며 우리도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부모와 선조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와 능력을 받지 못 했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지금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하나님은 그에 따라 넘치는 복과 은혜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와 선조에 따라 복을 주시거나, 거두지 않으시고, 지금 우리의 중심과 신실함을 보시고 복과 저주를, 은혜와 징계를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가장 신실함을 원하십니다. 겉으로 몇 번 예배를 드리고, 기도와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하는 것보다 이를 더욱 원하십니다. 이것이 복을 받는 길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한나 가정과 엘리 가문의 삶을 기억하고, 엘리 가문처럼 형식만 채우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말고, 오직 한나와 사무엘처럼, 신실함과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찾는 자녀에게 주시는 넘치는 은혜와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