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623)하나님만이 구원을 베푸십니다(삼상 7장 12-17절)

청명하늘 2019. 6. 23. 17:07

하나님만이 구원을 베푸십니다

 

성경: 사무엘상 712-17(419)

찬송: 382(너 근심 걱정; 432), 300(내 맘이 낙심되며; 405)

설교: 2019062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닭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닭을 가져온 시기와 종류로 나눈다면 셋입니다. 세 번으로 나눠서 가져왔고, 육계, 청계, 백봉오골계로 세 종류로서 총 40마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몇 마리나 된 줄 아신가요? 아침에 확인한 후에 한두 시간 내에 더 죽지 않았으면 21마리가 살아 있습니다.

닭을 키우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닭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도 어딘가에 있겠지만, 보통은 닭을 키워서 알을 얻거나 고기를 얻으려고 합니다. 무작정 오래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니다 보니, 때가 되어 잡아먹어서 닭이 줄어드는 것은 큰 잘못된 게 아니죠?

그런데 닭을 가져와 키우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된 줄 기억하세요? 처음 닭을 가져온 날이 4월 마지막 날일 것입니다. 5월 첫 주일에 닭을 가져와 키운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닭들이 커서 알을 낳고, 또 부화시키면, 교회가 곧 부자가 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두 번에 나눠서 병아리 20마리를 더 가져왔습니다. 가장 먼저 가져온 것도 채 두 달이 안 되었고, 늦게 가져온 병아리들은 채 한 달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닭이 죽었다고 말씀드리면,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 목사가 닭을 키운다고 하더니, 지 몸보신한다고, 교인들 모르게 쩨깐한 것들까지 다 잡아먹었나 보네.’ 그렇지 않습니다. 닭을 지키라고 갖다놓은 타니()가 두 마리 죽였고, 삵인지 고양이인지가 몇 마리 죽였습니다. 나머지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죽었습니다. 어찌되었든 40마리 중에, 목적을 가지고 잡은 것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닭을 키우면서부터 가졌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닭고기를 먹더라도 건강하고 좋은 고기를 먹자는 것입니다. 닭고기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가까운 곳에서 신선하고 좋은 닭을 싼 값에 사겠죠? 풀어 키우면 건강하고 더 맛있는 고기를 얻을 수 있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또 일부는 알을 낳게 해서, 건강하고 좋은 알을 먹거나, 혹은 일부는 판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절반에 가까운 수를 이미 잃었고, 지금도 별로 안 좋아 보이는 녀석들이 더 있으니, ‘닭을 키운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키우다는 말은 보살피고 돌보아 자라게 하다는 뜻인데, 보살피고 돌보기는 하는데 자라게 하지는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닭을 죽이고 있다는 말도 좀 이상하죠?

닭을 아주 사랑하시는 분, 그래서 닭이 자꾸 눈에 아른거리는 분이 계시면, 주일에 오셨다 가실 때마다 사진을 찍든지, 못 해도 꼭 인사는 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녀석의 마지막 모습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준비를 전혀 안 하거나,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나름 몇 가지를 준비했죠? 자리를 제공해 주신 분, 자리를 작업해 주신 분, 닭을 가져다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저도 아침저녁으로 물과 사료를 꼬박꼬박 주고, 병이 생긴 것 같아서, 두 번에 걸쳐 가축약국에 가서 상담을 받고, 약을 사다 먹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름 기대와 준비를 거치고, 노력해도 닭이 많이 죽고, 병에 걸리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닭 전문가가 아니구나. 닭에 관한 한 철저히 무지하고, 또 무능구나하는 것입니다. 닭 전문가들이라면 저처럼 키우지도 않을 것이고, 키워서도 안 되죠? 저야 키우는 닭의 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가 사라진다고 해도, 기분은 좀 안 좋을 수는 있지만, 앞으로도 살아가는 데 큰 타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몇 천 마리, 몇 만 마리를 키우는 분들이 절반을 잃었다면 타격이 크고, 실패한 것이죠?

직업적으로 닭을 잘 키우는 사람들은 닭에 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병에 걸리거나 죽지 않도록 해야 하고, 예방을 잘 해야 합니다. 또 병에 걸렸으면, 빨리 알아채고,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저처럼, 많은 닭이 죽을 때까지 심각성을 알아채지도 못 하고, 또 병든 닭도 고칠 수 없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처럼 닭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한 사람에게는 닭을 맡겨서는 안 되겠죠? 여러분이 닭을 키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시 한 달 정도 어디를 가야 해서 닭을 키울 수 없다면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물론 죽으면 그만, 살면 다행이라는 계산으로, 닭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한 사람, 비전문가에게도 맡길 수 있죠? 그런데 아주 귀하고 또 소중한 닭이라면 다르죠. 한 달 내에 살 수 있는 확률 50%, 죽을 확률은 50%, 살았지만 병들 확률이 또 50%라고 한다면 안 맡기시겠죠?

귀한 것, 소중한 것, 가치가 큰 것일수록 전문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전문가일수록, 그것도 뛰어난 전문가일수록 더 건강하게 잘 키울 것입니다. 비전문가, 무능한 사람은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줄 모릅니다. 갈수록 피해가 커지고, 결국 귀하고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요? 인생이죠? 각자의 인생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합니다. 인생만큼 가치가 크고 귀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기에 그 외의 것들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돈은 넘치도록 있는데 이미 죽었다면, 그것은 내게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넓고 좋은 땅들을 많이 가졌다고 하더라도, 죽으면 그 넓은 땅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땅의 모든 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으려면, 반드시 내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 각자의 인생과 생명이란 귀합니다. 더욱이 생명은 딱 하나, 한 번뿐입니다.

이처럼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는 생명이라면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습니까? 전문가에 맡겨야 하겠죠? 전문가 중에서도 웬만한 전문가여서는 안 됩니다. 말 그대로 완벽한 전문가, 실수가 있어서도 안 되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완벽하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전문가여야 합니다.

인생에 관한 완벽한 전문가가 누구입니까? 세상에는 과학, 의료, 기술, 학문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관한 한 전문가는 없습니다. 가장 귀하고 한 번뿐인 삶이니, 가장 완벽한 전문가에게 맡겨야 실패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온전하게 살 수 있는데, 인생을 완벽하게 알고, 해결해 줄 인생 전문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길을 선택하고 걸어갑니다. 하나는 권력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 흔히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되게 해준다는 여러 신들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잘되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인생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돈과 권력 혹은 성공한 분야에 대해 전문가일 뿐입니다. 그것도 그저 조금 더 잘 아는 정도밖에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을 맡기기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부족하고, 수없이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이런 길을 선택한 사람은 결국 실패합니다.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만들지 않았고, 세상의 주인도 아니고, 모든 것을 알지도 못 하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과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전문가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상에게 삶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도 결국 실패하고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연속된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게 성경이고, 특히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사무엘상하의 흐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받은 땅으로 들어가 정착하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게 뭔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안심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시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차 불안해했습니다. 말씀에 따라 살면,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지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불안감을 참지 못 하고,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립니다. 이웃의 강한 나라들과, 농사와 목축업을 잘되게 해준다는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고 부자고, 좋은 것들을 약속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통째로 맡기고 의지할 수 있을 만큼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부와 풍요를 약속했던 우상들도 인생의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거짓 유혹에 넘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철저히 실패하고 망가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 억압을 받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때에 사무엘이라는 좋은 지도자가 나와서,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삶 전체를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분임을 가르쳤습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줍니다.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에, 실패하고 망가지는 삶을 회복시켜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거짓에 속아 온갖 고통을 겪었던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서야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마음을 고정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자, 사무엘의 가르침처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블레셋 민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고, 그 동안 빼앗겼던 땅들까지 모두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이 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본문 13절 뒷부분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짧지만 두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이라는 시기와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을 막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할까요? 반드시 기억하고 간직해야 하는 내용이,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기간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블레셋의 억압을 막아주셨다는 내용인가요?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이라는 표현 속에는, 사무엘도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영원히 살지 못 하는 존재라면, 사무엘도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만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이끈 아주 훌륭하고 신실한 사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따라 살 만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사무엘 본인이 인간의 삶을 책임지고, 회복시키고, 구원해 주는 것 아닙니다.

만일 사무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고, 온전해지게 만들었다면, 이제 우리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사무엘은 이미 몇 천 년 전에 죽었으니, 우리는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구할 수 없으니, 절망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정말 중요하고,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핵심은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을 막으셨다는 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삶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전문가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모든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모두 아시고, 온 세상과 우리를 만드셨을 만큼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시간과 자리의 한계를 받지 않으시니 우리의 고민과 아픔과 어려움을 모두 맡길 만한 전문가이십니다.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하는 모든 과정들까지 맡기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하시면서도,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신들처럼,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나 믿고, 보호와 도움을 받으실 분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키시고 함께해 주시지 않고,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만 함께하시고, 고통에서 구해 주셨겠습니까? 이것은 사무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은 까닭이기도 하고, 훌륭한 지도자인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난 까닭을, 그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사무엘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지 않고, 각자가 자기 보이기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과 전문가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이에게 자신의 삶을 의지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모양만 있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우상들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살 수 있는 길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영원한 안식처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고통과 죽음의 길을 걸어왔으니,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안심하고 맡길 만한 분이시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가르쳤습니다. 사무엘은 평생 이것 한 가지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가르침을 받고, 모든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갔으니, 하나님이 고난과 억압의 손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알고, 우리의 삶과 생명과 소망까지 맡길 수 있는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해서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깜빡 잊어버리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사악함이나 간사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들을 변치 않는 진리와 소망으로 삼고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섬기며 살면, 이 땅의 삶도, 이후에 주어질 삶도 평안과 영원한 기쁨과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무엘은 수 천 년 전에 떠났지만, 사무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의 길은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선택에 따라, 삶의 모든 과정과 그 결과가, 이후의 영생과 영원한 형벌로 나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과 영생과 복과 평안을 보장하실 분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과 모든 여정들을 맡기면, 우리는 실패하지 않고, 반드시 복과 은혜와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이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돌아온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구원의 복을 모두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