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728)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십니다(삼상 9장 15-24절)

청명하늘 2019. 7. 28. 14:42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십니다

 

성경: 사무엘상 915-24(421)

찬송: 449(예수 따라가며; 377), 435(나의 영원하신 기업; 492)

설교: 2019072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노회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와 있었습니다. 평시에 노회에서 오는 문자는 목회자나 그 배우자, 또는 그 부모의 별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라 생각하고, 확인했는데 어느 교회 목사님이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문 가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로 종일 고민했습니다. 너무 큰 아픔을 겪은 분에게 제가 찾아가는 게 도움이 될지 판단이 안 섰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제가 그 아픔과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이기적인 염려가 컸기 때문입니다. 주저하고 고민하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안 떨어지는 발걸음으로 겨우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목사님을 뵙긴 했는데, 제대로 한 마디도 못 하고, 손만 잠깐 잡아주고, 눈물만 흘리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은 언제나 마음을 서글프게, 아프게 합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을 보내는 것도 그렇긴 합니다만, 이른 나이에 있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그 강도가 훨씬 커집니다이 문제로 한 주간 내내 아파하고 고민하며 되새겨 보길 반복했습니다. 너무 큰 아픔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목회자로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설명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낮예배 시간에는 사무엘상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죠? 다음 본문이 정해지기 때문에, 보통은 주일이 지나고 나면, 본문에서 주제를 정하고 원고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주일 밤에 주제를 정하고, 제목까지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십니다라고 정해 놨습니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 안타까운 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으니 고민이 너무 컸습니다. 주제와 제목을 바꾸는 게 가장 쉬운 해결책이긴 하지만, 그러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고, 연설에 불과합니다. , 평소와 달리, 주제와 제목까지 먼저 정해지게 하고, 그런 슬픈 소식을 듣게 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본래의 본문과 주제, 그리고 제목까지 바꾸지 않고 그대로 풀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월요일 점심시간에 한 집사님과 식사하며 사고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님이 제게 이런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고와 아픔이 생깁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에게 견디기 어렵고, 납득조차 안 되는 아픔을 주십니까?

 

먼저는,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이 부르시면 군말 없이 가야 하는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냐, 무슨 일을 하느냐, 몇 살이냐 하는 것 등을 기준으로 내놓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건강하고 오래 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신앙인들의 기준으로는, 선교사나 목회자 등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과 주위 사람들까지 잘되게 하는 복을 받고, 건강하게 장수하는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기준이고 바람일 뿐입니다. 생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기준들은 하나님의 기준과 너무 다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우리의 기준과 바람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을 따르게 됩니다.

 

모세는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뽑힐 만한 인물입니다. 평생 이집트의 왕자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지도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목적했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바라보는 것까지만 허락하시고, 모세의 생명을 거두십니다. 심지어 죽을 때도 모세의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정정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수많은 일꾼들이 있죠? 수십 만 명의 교인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행한 능력과 공로와 수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세 같은 사람마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많아 죽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기면서도, 나이가 적으면 죽지 않아야 하고, 혹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 잃으면 잘못되거나 저주라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그것도 평균보다 일찍 잃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이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만으로 저주라거나,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의구심을 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섭리와 과정을 우리로서는 알 수 없고, 더불어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결정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측할 수 없는 때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아픔을 겪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죽음에 관한 모든 답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당장은 아픔과 어려움을 겪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 이후에는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구원과 영생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 한 사람에게는, 이 과정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 시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마저도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이 생기는 과정과 까닭을 모두 이해할 수 없고, 당장은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짓누르긴 하지만, 그러나 그 결과가 우리에게는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 첫 번째 왕으로 세워지기 전의 일인데, 사울은 사환 하나를 데리고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이곳저곳을 향해 다녔습니다. 하지만 사흘이라는 시간과 수고가 헛되이 아무것도 얻지 못 하고 포기하려던 순간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다음 날 사울이 찾아올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과 고통에서 건져낼 인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서 사무엘이 사울을 봤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무엘에게 전날에 말씀하셨던 인물이라며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아마 사울의 초라한 행색 때문에, 사무엘이 사울을 왕이 될 만한 인물로 생각하지 못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여전히 잃어버린 나귀에만 관심이 있는 사울을 먼저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선택과 사명을 알려주면서, 30명가량의 손님들이 있는 방으로 데려가서 가장 어른의 자리에 앉게 하고, 고기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을 따로 준비해 두었다가 사울에게 주었습니다. 이때 초대되어 방안에 있던 30명가량은 모두 민족의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을 것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장차관이나 여러 기관장으로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사울은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받았던 것입니다.

 

이때 사울의 행색이 어땠겠습니까? 지금 사울은 고위관리들이나 권력자들을 찾아 사무엘이 있는 곳으로 간 게 아니고, 사흘 동안 나귀를 찾다 실패해서 어쩔 수 없이 간 길이었습니다. 사울의 집안이 아무리 유력하고, 사울의 인물이 아무리 훤칠했다 하더라도, 사흘 동안 나귀를 찾아다닌 것을 생각해 보면, 그 행색은 말 그대로 거지꼴이 다 되었을 것입니다. 나귀를 찾아다니면서, 편하고 좋은 길로만 다닐 수 없습니다. 길이 아닌 곳들, 험한 산길, 낭떠러지, 진흙탕 길 등을 가리지 않고 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온몸은 할퀴고 긁히고 찔린 상처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3일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쉬지도, 씻지도 못 했으니, 행색으로 보면 쫓겨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이런 사울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좋은 자리에 앉히고,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합니다. 전국에서 찾아온 내노라 할 만 30명가량의 사람들이, 화려하고 멋지게 치장하고 와 있었지만, 사무엘은 행색이 초라하다 못 해 더럽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울에게 가장 큰 관심과 섬김을 베풉니다.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은 무리들은 뒤로하고, 사무엘은 왜 사울에게 집중하고, 왕의 자리를 약속합니까? 당장 가진 것 없고, 행색마저 말이 아니었음에도, 사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사울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전까지는 암나귀가 전부인 것처럼 죽을힘을 다해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 그것마저도 빈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깟 암나귀 몇 마리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어려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사환까지 보내서 반드시 찾도록 하고, 사울은 사흘 동안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까지 찾으려 노력해야 할 만큼 귀한 나귀들을 잃는 초조함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에도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은 그 고난과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좋은 것들을 넘치게 베푸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울의 외모와 형식을 보시지 않고 선택하시고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흘의 고난과 실패 때문에, 초라하고 지저분하고, 처진 어깨로 찾아온 사울을 돌려보내거나, 무시하지도 않고, 가장 좋은 자리에 앉게 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그것도 사울이 올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오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울이 겪은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도 겪고, 슬픔을 겪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목사님의 경우처럼, 상상조차 안 될 만큼, 너무 큰 아픔과 슬픔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가 받는 고난을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바꿔 주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눈으로 보면, 그 아픔과 슬픔이 어떻게 보상되고, 어떻게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과 간섭이 더 크게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상처로 찢기고 아프고 슬플 때도, 하나님의 것을 바라며 인내했다며,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시고, 가장 좋은 자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예기치 못 한 여러 일들을 겪습니다.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이를 갑작스런 사고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건강을 잃을 수도 있고, 심각한 장애를 앓을 수도 있습니다. 사고나 실수로 가진 것을 모두 하루아침에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택을 믿고,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외모를 바라보시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아무런 상처와 슬픔을 받지 않은 자만 받아들이신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하고 예쁜 손을 가진 사람만 하나님이 받아들이신다면, 몇 사람이나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도 다치거나 아프지 않은 건강한 사람만 받아들이신다면 그러면 우리 모두는 이미 버림받은 이들입니다. 한 번도 슬픔을 겪지 않고, 단 한 번도 원망 없이 살아온 사람만 하나님이 대접하신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큰 슬픔과 좌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상상할 수 없는 아픔과 눈물로 초췌해지고, 마음이 찢기고 상해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상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손을 붙들었다며, 겪은 상처와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와 상급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지나온 모든 날들의 슬픔과 눈물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위로와 사랑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정들만 기억하면 우리는, 아무리 크고 아픈 절망들을 겪었더라도, 지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과 아픔을 겪더라도, 또 시련의 파도가 아무리 거칠고 높아도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릴지언정 주저앉지 않을 것입니다. 넘어질지언정 드러눕지는 않을 것입니다. 속상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플지언정 좌절하지 않고, 소망 속에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전부로 여기는 불신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겪어야 하는 모든 고난과 아픔이 절망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지금 겪는 그 어떤 아픔과 고통도 하나님의 간섭과 사랑으로 이끄시는 길,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방법과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험한 세상살이에서 어떤 아픔과 어려움 속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통해 베푸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섭리하심을 바라보고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아감으로써, 모든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주시는 평강과 복을 넘치게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