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915)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며 사십시오(삼상 12장 1-15절)

청명하늘 2019. 9. 15. 15:43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며 사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121-15(425)

찬송: 405(주의 친절한 팔에; 458), 380(나의 생명 되신 주; 424)

설교: 2019091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래 전에 TV에서 방영되었던 것들 중에 고교생일기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찾아보니 1983년부터 3년간 방영되었다고 나옵니다. 당시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누가 출연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는않지만, 그럼에도 제목이나마 흐릿하게 기억되는 까닭은 주제가의 가사 때문입니다.

 

일부 가사 내용을 보면,

1. 그리움이 많은 고교 시절에 무지개를 보듯 내일을 본다

물을 담아 두면 물단지 꿀을 담아 두면 꿀단지

우리들은 꿈단지 꿈을 담아라

2. 콩을 심은 데는 콩 나고 팥을 심은 데는 팥 난다

우리들의 가슴에 이상을 심자

 

 

가사 중 기억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서 확인해봤더니, 당시에는 잘 모르고 지나갔어도, 2절의 콩을 심는 데는 콩 나고, 팥을 심은 데는 팥 난다라는 가사는, 덜 다듬어진 듯해서, 좀 유치해 보이기도 하고, 재밌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노래가 지금까지 기억되고, 간혹 흥얼거릴 수 있는 까닭은, ‘물을 담아 두면 물단지 꿀을 담아 두면 꿀단지 우리들은 꿈단지 꿈을 담아라는 가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건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쓰임새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이크의 목적은 분명하죠? 소리를 크게 멀리까지 전해주는 것입니다. 냉장고는, 안에 보관하는 음식물의 온도를 낮춰서, 내용물이 오랫동안 변질되지 않도록 보관하는 것입니다. 가스레인지는 가스를 연료로 사용해 음식을 조리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한 가지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입니다.

 

반대로, 만들어진 것은 같지만, 그 쓰임새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단지라 불리는 작은 항아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정해서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만들어도,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결정됩니다. ‘물을 담아 두면 물단지, 꿀을 담아두면 꿀단지라는 가사처럼, 그 안에 무엇을 넣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바뀝니다.

 

푸대라고 많이 부르시는 포대는 그 안에 무엇을 넣고 보관하느냐에 따라 달리 불립니다. 나락을 넣었으면, 모양과 크기와는 상관없이 나락 포대라 불립니다. 도정한 쌀을 넣은 포대는 쌀 포대라 불립니다. 같은 크기와 모양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보리를 넣었다면, ‘보리 포대라 불립니다. 보리 포대였어도, 보리를 모두 꺼내고 그 안에 콩을 넣으면 이제는 콩 포대가 됩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이름까지 바뀌는 경우입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한 물건에 가까운 것 같습니까? 아니면 속에 담긴 것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까? 만약 인간이 로봇처럼 정해진 대로만 따라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한두 가지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매순간 수없이 많은 길을 대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리 불리게 됩니다. 언제나 자기 이익이 되는 것만 선택하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면 이기적인 사람이라 불립니다. 상식과 약속을 넘어서 자기 맘대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불리게 됩니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남 위에서 지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낮고 부족한 것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사람 역시 그 안에 무엇을 어떻게 담고 있느냐에 따라 가치와 수준이 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불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무엇을 속에 품고, 어떻게 살아야 그 이름에 맞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사무엘의 고별사가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왕이 없이 재판관의 일을 하는 사사들이 나라를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로서 책임을 잘 마쳤는데, 그의 두 아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백성들은 이를 핑계로 왕을 세워달라고 했고, 사울이 첫 번째 왕으로 오르게 됩니다.

 

왕의 자리에 오른 사울이 처음엔 왕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하고, 겨우 밭가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길르앗 야베스 지역에 적이 침략해 오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시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동안 사사로서 나라를 다스렸던 사무엘은, 나이도 많은 데다, 이제는 사울 왕이 왕답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여기고, 백성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는 것입니다.

 

5절까지는 사무엘이 사사로서 나라를 지도하면서, 자신이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일을 행한 적이 없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 누구의 소나 나귀 등 재산을 빼앗거나 속인 적도 없고, 누구를 억압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뇌물을 받아서 잘못을 눈감아 준 적도 없다고 합니다. 백성들을 향한 마지막 자리에서 이런 사실을 다시 확인한 까닭은, 자기가 그 동안 얼마나 깨끗하게 이끌었는지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요즘 우리나라 언론들에 문제가 많죠? 언론과 관련해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도 가짜 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짜 뉴스란 언론의 보도처럼 보이나, 사실은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만들어 내고 유포된 거짓 정보를 뜻합니다. 가짜 뉴스들은, 실제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에서도 보도되기 때문에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쉽고도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언론이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온 언론이라면, 그들이 전하는 소식들에 대해 신뢰할 만합니다. 그러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처럼, 자기들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선동하고, 사실을 감추고, 거짓을 포장했다면, 그들이 무슨 말을 피를 토하며 말해도 그것은 거의 가짜 뉴스일 것입니다. 지금 보도되는 것들이 사실 여부를 결정하는 게 아니고,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들이 결정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경우는 아주 희박합니다. 그래서 사기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짓으로 봐야 합니다. 아무리 핏대를 세우고, 멋진 말을 내뱉어도, 거짓에 가깝습니다. 진실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싸워온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비록 그것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들이라 하더라도 사실에 가깝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서의 사명을 마치며, 백성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과정들을 다시 확인하는 까닭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이 최고 지도자의 있을 때, 그래서 이익과 욕심을 부릴 수 있을 때마저, 전혀 그렇게 살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말들은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확인시킨 후, 이집트에서 나오는 때부터 첫 번째 왕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대략적으로 언급합니다. 이 과정을 간략하게 보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고, 하나님은 그에 응답해 주시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좀 편해지고 먹고살만해지면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등집니다. 이런 백성을 하나님은 다른 적들을 이용해 벌을 내리십니다. 백성들은 다시 고통이 오면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이 구해주시면, 백성들은 다시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의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는 말씀처럼,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하나님의 통치와 간섭을 싫어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백성들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백성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밝힙니다. 사무엘의 발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백성도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징벌로서 내려진 고난이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잊고 돌아서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벌하심으로써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원인이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많은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 세상이 죄가 없고, 온전한 곳이라면, 고통과 죽음이 없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온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죄가 있고, 죄로부터 나오는 고통이 끝이 없습니다. 욕심이 있고, 욕심으로부터 생기는 아픔과 슬픔도 계속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역시 여기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는 대로 되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역시 고통과 슬픔을 수없이 당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도 아픔과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무엘이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어리석은 고집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라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에서 종으로 살아서, 그 어느 나라도 구해주거나 도와줄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라는 좋은 지도자들을 보내셔서 구해 주셨습니다. 이길 수 없는 적이 쳐들어 때도 사사들을 보내셔서 무찌르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고난과 어려움을 피할 길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지키시고, 이길 만한 길을 반드시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때에도, 하나님은 돕는 손길을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아픔과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속 간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잠깐 동안 편해지고, 여유가 생긴다 싶으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눈길을 돌리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에만 눈길을 고정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정도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그리고 함께하심을 믿으며 변치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고난을 넘어 역사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겨냈으면, 그것이 우연히 된 게 아니고, 당연히 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간섭과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되었으면, 이를 기회로 죄와 세상을 향한 계기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기쁨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신앙인들이라 불리는 우리 안에 품고 담아야 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고, ‘아들딸로 받아주셨습니다. 이를 인정하며 사는 사람들을 신앙인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무슨 일을 겪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배하고,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헌금하는 것과 같은 종교생활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그릇을 세상을 향한 욕심이나 헛된 것으로 채우지 않고, 순결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매일 보고 만지고 느끼는 확신으로 비로소 확인됩니다.

 

모든 인간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속에 무엇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그 끝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름을 가졌든지 상관없이, 우리 속을 세상 욕심과 욕망으로 채우면, 헛되이 사는 사람에 불과하고, 헛되이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살아가면, 지금은 좀 잘되고, 성공한 것 같으나 곧 실패할 사람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처했더라도, 받은 것에는 감사할 줄 알고, 일상의 누림에는 기뻐할 줄 알고, 어려움 속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믿을 줄 알면, 복과 구원이 약속된, 소망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품고 담아야 하는 모습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 그리고 도우심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진실한 삶으로써 증거하는 사무엘의 고백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소망과 약속이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고난과 아픔에 처하더라도, 일상의 평온함과 성공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변치 않는 믿음만으로 속을 채우며 살아감으로써, 삶이 회복되고, 이후에 주실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이 약속된 소망이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