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112)디딤돌로 살아가기(삼상 18장 1-5절)

청명하늘 2020. 1. 12. 15:22

디딤돌로 살아가기

 

성경: 사무엘상 181-5(438)

찬송: 261(이 세상의 모든 죄를; 195), 212(겸손히 주를 섬길 때; 347)

설교: 2020011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는 교회에 아주 먼 곳에서 출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멀다고 하면 어느 정도일까요? 교회가 여기에서 가까운 곳인데, 서울에서 출석하고 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교통이 많이 발달했습니다만, 쉽게 오가기 어려운 거리입니다. 고향이고, 부모님이 계시는 곳임에도, 서울 정도 되는 거리면 몇 번 오가지 못 하죠? 1년에 몇 번 오가는 것도 많다 할 수 있는 먼 거리입니다.

 

교회에 출석한다면 매주 오가야 합니다. 또 교회에 중요한 행사나 일이 있을 때마다 와야 합니다. 거리도 멀고, 또 오가는 때가 대부분 차가 많이 막히는 시간대라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10년이 넘는 동안 계속 여기까지 오가고 있습니다. 부부만이 아니라, 아들 부부까지 토요일에 와서 자고, 주일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로 봉사한 후에,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서 직장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것 같습니까? 정말 대단하죠?

 

서울까지 오가면서 드는 시간과 비용도 적지 않죠? 한 번 오가는 데만 해도 10시간이 넘을 것 같습니다. 차를 가지고 오가면서 필요한 연료와 고속도로 이용비까지 포함하면, 한 달에 몇 십 만원이 되겠죠? 이것만이 아닙니다. 한 주 동안 직장 생활하다가 잘 해도 이틀 쉬는데, 매주 먼 거리를 오가야 하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웬만한 각오와 믿음만으로는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이고, 대단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산골이라 해도, 교회 없는 곳이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동네에 교회가 없다 해도, 몇 분만 가도 교회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도심에서는 교회 십자가 조명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비난을 들을 만큼,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그분들이 사는 동네에도 교회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 먼 곳까지 오가고 있으니, 칭찬하고 기억할 만한 일임엔 분명합니다. 저도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라서 옆에 계신 분들에게 몇 번이고 물어 확인할 정도입니다.

 

최근 이분들과 관련해 다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분들이 다니는 교회 담임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고, 다른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목사님이 적응하는 데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새로운 교회에 부임해서 사역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전혀 모르는 교인들과 알아가고, 사역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힘들어하는 까닭 중 큰 부분이 바로 서울에서 출석하는 분들 때문이라는 겁니다.

 

까닭을 들어보니 이렇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행정에 관한 책임은 담임 목사에게 있습니다. 책임이 있는 만큼, 교회의 모든 일에 대해 잘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출석하는 분들이 교회 재정을 수년 동안 계속 맡고 있습니다. 큰 교회에서는, 몇 년 기한을 두고 재정부를 바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교회는 사정상 그렇지 못 하고, 재정 담당이 바뀌지 않고 계속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분들이 재정을 오래 동안 담당했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새로운 목사님께 재정 보고조차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부 자체를 안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이해 안 되는데, 심지어는 목사님이 바뀌기 전부터 수년 동안 제직회나 공동의회에서도 재정 보고를 전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작은 교회도, 최소 1년에 한 번은 보고하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훨씬 큰 교회임에도 헌금이 얼마 들어왔고, 어디에 얼마가 지출되었는지 교인 모두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까지 들으시면, 매주 그렇게 먼 곳에서 출석하는 분들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매주 12일로 여기까지 와서 예배하고, 봉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대단하고, 기억하고,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여전합니까? 그렇진 않죠? 칭찬하고, 본받기에는 뭔가 잘못되거나 부족한 것 같죠? 왜 그렇습니까? 이분들의 어떤 모습이, 처음 가졌던 좋은 생각들을 부정적으로 바꾸도록 만들었겠습니까?

 

서울에서 오가는 분들에게 크게 감동을 받은 한 분이 다른 분께 자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은 놀라워하고 칭찬하죠?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분이 대뜸 교회에서 자기들 맘대로 하려고 그러고만... 틀림없이 교회에서 손에 쥐고, 누릴 만한 것이 있으니 그런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큰 교회는 물론이고, 도심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어느 개인이 함부로 해서도 안 되고, 또 아주 어렵습니다. 법과 원칙대로 하지 않으면, 그에 반대하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은 시골 교회이고, 또 교회 질서나 행정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보니, 그렇게 몇 사람이 전횡을 휘둘러도 지적하거나 고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다니는 분들은 이를 알고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 오가는 수고와 비용과 피곤을 감수할 만큼, 교회에서 주인공 노릇하기가 좋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즘 기독교에서 큰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감투입니다. 교회에서 맡기는 직분을 감투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감투를 쓰고, 큰소리 치고 싶지만, 이를 이루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투 쓸 곳으로서 교회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형 교회에서도 감투 쓰기 어렵고, 힘과 명예를 자랑하기 어렵습니다만, 사회에서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쉽습니다. 작전을 잘 짜고, 사람들 눈에 자꾸 띄게 하다 보면, 직분을 받고 감투를 쓸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고 쉽습니다. 게다가 작은 교회일수록, 몇 번만 참석하면 중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투 쓰기에 아주 쉬운 길이라는 겁니다.

 

도심이나 큰 교회에서 할 수 없는 주인공 노릇을 시골 교회, 작은 교회에서는 하기 쉬워서, 그분들이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고, 계속 출석하는 것으로 보는 의견입니다. 제가 그 교회의 아주 세세한 것까지는 잘 모르고, 또 그분들의 속마음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것으로 판단해 보면, 처음 받았던 감동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이분들이 정말 순수한 마음, 교회를 위한 마음으로 출석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분의 이야기처럼, 먼 곳까지 오가는 수고와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이는 까닭이, 정말 자신들의 감투 노릇하기 위함이라면, 차라리 그런 수고와 헌신을 안 하는 게 낫습니다. 지금처럼 한 주에 12일의 시간을 이곳까지 와서 봉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까운 곳에서 신앙생활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주인공 노릇을 위해 오가는 것은, 오히려 교회와 성도들에게 피해만 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서도 크게 손해가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 속에서 보여주는 요나단의 모습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가르침을 주는지 모릅니다. 요나단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을 주인공으로 두는 대신, 자신은 철저하게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앞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겼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나갈 수 없을 만큼 작고 약한 소년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의지해 골리앗과 맞서 싸웠습니다. 전쟁터에서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것들이 다윗에겐 전혀 없었습니다. 갑옷도 입지 않았고, 머리를 보호해 주는 투구마저 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왕의 칼마저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전쟁터에 어울릴 수 없는 소년, 싸움에 맞지 않는 무기를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고, 무릿매를 던져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숨어 있었던 이스라엘 군사들은 이를 보고 용기를 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적이 누구든지, 아무리 강하고 많아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블레셋 군사들을 크게 물리치고, 적이 가진 것들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 왕을 만나고 돌아오자 요나단이 맞이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나이차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참된 우정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돌아오자, 요나단은 자기 목숨처럼 다윗을 아끼고, 친구로 지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다짐이 말과 생각으로만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입던 겉옷을 벗어 주고, 군복과 칼과 활까지 모두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게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다윗과 요나단의 상황을 함께 보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입니다. 우리 표현으로는 세자로 시간이 지나면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오를 사람입니다. 그런데 골리앗과의 싸움 때문에 갑자기 다윗이라는 인물이 튀어나왔고, 다윗의 이름이 모든 백성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다윗은 요나단에게 정치적 경쟁자였습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책임을 잘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으면, 요나단이 자연스럽게 다음 왕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불순종해서 새로운 왕이 세워질 거라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은 다윗이 다음 왕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요나단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함께 왕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다윗이 왕에 오른다는 것은 요나단의 가문이 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보면, 요나단으로서는 다윗을 없애는 게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골리앗을 무찌르고 돌아온 다윗을 사랑으로 맞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겉옷을 주고, 군복과 칼, , 띠까지 모두 내주었습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입고 있던 겉옷과 군복과 띠에는, 이를 드러내는 상징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당시 이스라엘은 무기가 발달하지 못 했습니다. 철로 만들어진 칼이 왕과 요나단에게만 있었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칼을 들고 다니도록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인 칼과 활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칭찬과 격려의 상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윗에게 맡기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이 다짐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사울 왕 때문에 다윗이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다윗을 찾아가 격려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요나단의 이런 모습을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주인공 노릇 하지 않기로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왕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자신만이 왕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됨됨이와 행동으로 보면, 왕이 되었어도 꽤 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다윗이 왕이 되는 게 더 유익할 거라 판단한 것입니다. 그것도 판단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정말 그렇게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원죄로 불리는 인간이 처음 지은 죄도 역시 이런 본능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편한 곳에 살아도, 거기에서 하나님 아래에서, 하나님의 간섭과 지도를 받고 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때에 사탄이 와서 유혹한 것은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더 좋은 것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 한 가지, 하나님처럼 될 거라는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세상의 주인공처럼 맘대로 살게 될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본성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단에게도 주인공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왕자라는 이유나, 자신이 세운 공로와 업적도 크다는 이유로 다윗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았고, 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나라가 더 잘될 수 있으면, 그것 하나만으로, 왕의 자리마저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가 잘될 수 있으면, 자신은 도구로 사용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꾼도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주인공처럼 자기의 수고와 노력과 업적이 드러나야 하고, 이를 자랑하고 싶다면, 차라리 일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일꾼이 들어오고, 일을 잘해낼수록, 시기하고, 다투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자기 욕망과 자랑을 위해 일하는 사람, 이를 위해 함께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시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과 평안을 주시겠습니까? 이런 사람의 업적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지금은 요나단의 모습이 더욱 멋지고, 꼭 필요한 때입니다. 교회와 나라가 잘되도록 기꺼이 자기의 자리와 업적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자기는 그저 도구로 사용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위해 계단 하나 놓는 디딤돌이 되기로 각오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다윗을 위해, 기꺼이 영광스러운 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다윗을 살리고 돕는 데 애쓴 요나단과 같은 일꾼이 절실합니다.

 

요나단의 삶은 다윗만큼 화려하지는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를 희생한 요나단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의 어리석음 때문에, 왕이 되지는 못 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단의 후손들을 복되게 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요나단은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상급을 누릴 것입니다.

 

요나단의 자기희생과, 이에 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도 자신이 높아지고, 자신의 업적과 자랑을 위한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한 요나단처럼,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하심 가운데, 놀라운 복과 은혜를 누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