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126)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삼상 18장 17-30절)

청명하늘 2020. 1. 26. 15:41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

 

성경: 사무엘상 1817-30(440)

찬송: 369(죄짐 맡은 우리; 487), 342(너 시험을 당해; 395)

설교: 2020012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몇 주 전, 연초에 폭행치사 사건이 뉴스로 올라 왔습니다. 서울에서 있었던 일인데, 새해를 맞이해서 많은 사람들이 술 마시고, 춤추는 곳에 몰렸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젊은 청년 셋이 한 여성에게 접근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남자친구가 막자, 시비가 일었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청년이 이 남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폭행했습니다.

 

3명이 한 명을 폭행하면 견디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게다가 폭행한 세 명은 태권도를 전문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태권도로 유명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도 태권도를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또 그 중 하나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들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 세 명 모두 태권도 쪽에서는 이름도 나고,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앞날이 보장된 이들 같습니다. 폭행이 말 그대로 죽을 정도로 심했는지, 아니면, 피해자가 맞아 넘어지며 어디에 부딪혔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그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일이죠? 여자 친구를 지키려다, 폭행을 당해 사망한 피해자도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폭행을 휘둘러 피해자를 사망하게 한 이들은 어떨 것 같습니까? 자기들이 함께 때려 이겼다고 좋아할까요? 자기들이 그 동안 배워온 태권도가 헛되지 않았다고 자랑스러워할까요? 또 이들의 부모는 어떨 것 같습니까? 어려서부터 태권도에 재능을 보여서,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선생님들한테 배우도록 했더니, 상대를 쉽게 무찌를 수 있을 만큼 태권도를 잘 한다며 기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가 밖에 나가서 맞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차라리 싸우더라도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크게 다치고, 또 이번처럼 사람이 죽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죠? 죽으면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법적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사고로, 사망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삶에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본인들의 가족에도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인들 인생에도 얼마나 큰 피해와 손해를 끼쳤겠습니까? 이런 일이 아니었으면, 태권도로 꽤 성공적인 삶을 계획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이 꽤 넓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 동안 쌓아오고, 또 가질 수 있을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고 말았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그 누가 가까이 하려 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국가대표로 경기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체육관을 차린다고 해도,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그 누가 그곳에 가서 배우려 하겠습니까?

 

이런 면들을 보면, 세 사람은 자기들 삶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기름을 품고 불속으로 들어간 꼴입니다. 이들의 부모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자녀들이 차라리 몸이 다쳐서, 태권도를 못 하게 되었으면 하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본인들도, 그 시간에 다른 문제 때문에 그런 일에 가담할 수 없었으면 하는 뒤늦은 후회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을 이용해 싸우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길수록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는 싸움도 있습니다. 복싱이나 이종격투기 같은 경기들입니다. 유명 선수들, 또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 한 번 경기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한 번의 경기를 이기면, 수백 억 원을 벌어들이는 경우도 있고, 가장 많은 돈을 받는 선수는 한 경기에 천 억 원 이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 한 경기를 위해서는, 수년 간 이것 하나만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또 그 수준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경기를 치러야 합니다. 그럼에도 한 경기에 수백 억 원, 천 억 원 이상의 돈을 받을 만큼 사람들이 인정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종류는 좀 다르지만, 싸움의 영역을 더 넓게 볼 수도 있습니다. 권투나 격투기 시합처럼, 이겼다고 해서 당장 인정과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큰 가치를 가지는 싸움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인류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 질병과의 싸움을 벌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민족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분들도 많습니다.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을 때,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편안함을 위해 일본의 앞잡이 노릇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의 안위와 생명마저도 포기하고, 독립을 위한 험난한 길을 택하고 싸운 분들이 계셨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 정치가 부패했을 때, 민주화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이분들은 이 싸움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이나 보상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만, 나라와 민족의 발전과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기에, 그 수고와 희생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 기억되고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싸움이라고 해서 모두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찬다는 점, 그리고 힘으로 혹은, 작전을 통해 상대를 이기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폭행은 삶 전체를 망가뜨립니다. 피해자의 삶도, 자기와 가족의 삶마저 망가지게 만듭니다. 폭행을 통해 이익을 얻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규칙 안에서 휘두르는 주먹과 발길질은, 상대를 많이 넘어뜨릴수록 돈과 명예를 가져다 줍니다. 상대를 많이 잘 무너뜨릴수록 그 가치는 더욱 올라가게 됩니다. 또 인류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일하는 것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인정받아 마땅한 일들입니다.

 

이처럼 싸움의 가치는, 누가 어떤 기술을 발휘하고, 얼마나 센지 하는 그 자체로 판단되기보다는, 싸우는 목적에서 가장 크게 나뉘게 됩니다. 남을 해치는 것에 힘쓰면, 모두를 망치는 싸움이 됩니다. 그러나 규칙 안에서, 돈과 강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그나마 꽤 인기와 돈을 받습니다. 또 자기보다는 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귀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싸움의 목적이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울 왕의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의 싸움입니다.

 

블레셋 민족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앞에 골리앗을 내세웠습니다. 골리앗은 거인이었고, 어려서부터 전장에서 수많은 싸움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거대한 덩치도 무섭지만,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힘은 보는 이를 기죽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였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모두 겁을 먹고 포기했지만, 다윗만은 달랐습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골리앗의 거대함과 무서움이 안 보일 리 없었겠지만, 그러나 다윗은 그 너머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이 보기에, 너무 터무니없어 보이는 막대기 하나와 무릿매를 들고 나아가,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 다윗이라는 새로운 영웅이 생겼습니다. 이제 왕이 세워지고, 나라가 발전되기 시작한 때에, 다윗과 같은 사람을 하나 얻는 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어떤 자리에 놓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서도, 유비는 제갈공명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자기의 체면과 명예를 버리고 세 번씩이나 찾아갑니다. 그리고 제갈공명이라는 똑똑한 참모 한 사람을 얻자, 나라가 점차 발전하고 성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중요한 자리일수록 그에 맞는 좋은 사람을 두면, 발전하고 성장하게 됩니다. 반대로 어리석고 형편없는 사람을 중요한 자리에 놓으면, 본인에게도 손해일 뿐만 아니라, 조직을 망가뜨려 손해가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잘되고 성장하기 좋은 인물들이 꼭 필요한 때에, 다윗과 같은 인물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겠습니까? 사울 자신만의 힘으로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면, 좋은 인물을 찾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는데, 다윗처럼 좋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감사하고 상과 기회를 주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다윗이 큰 업적을 세웠다는 소리를 듣고, 사울의 시기심이 불같이 일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 두 번이나 창을 던졌습니다. 다윗이 피하자 사울은 자신의 두 딸을 이용하기로 작전을 바꿉니다.

 

먼저는 메랍을 이용하려다 상황이 바뀌자, 다시 미갈을 이용합니다. 사울이 왕이고, 미갈은 공주니, 평민인 다윗이 결혼하려면 그에 걸맞는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합니다. 그것은 블렛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 블레셋 사람을 100명을 죽이고, 그 증거품을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를 명령하면서, 17절에서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표현합니다. 그냥 블레셋에 가서 100명을 죽이고 오라고 해도 되는데, 그 싸움을 여호와의 싸움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사울이 이처럼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싸움이라 하면, 거부하지 않고 무리한 싸움을 향해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아갈 때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앞장 45-47절에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움을 자신의 욕심과 성공을 위한 싸움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힘과 지혜로 싸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싸움, 하나님 때문에 싸우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고, 하나님을 위해 싸웠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담대한 모습을 사울이 악용하려 했습니다. 다윗은 공주와 결혼해서 명예와 지위를 얻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싸움에 관심이 컸습니다. 왕의 사위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싸움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싸울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어서, 다윗이 거절하지 못 하도록 여호와의 싸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싸움도 아닙니다. 오직 백성들로부터 자기보다 더 많은 칭송을 받는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욕심과 시기심이 만들어낸 싸움이었습니다. 다윗이 바보도 아니고, 이를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믿음의 사람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블레셋으로 갔고, 사울이 말한 것보다 두 배인 이 백 명을 죽이고, 증거품을 가져왔습니다.

 

사울은 자기 딸들을 이용해서라도, 다윗을 제거하고자 했지만, 이 계획도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이름만 높여주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진으로 들어가 100명을 무찌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데, 다윗은 아예 200명을 무찌르고 왔으니, 사람들이 다윗을 얼마나 칭송하고, 인정하겠습니까? 30절 말씀처럼, 다윗의 이름만 높여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딸 미갈마저도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시기해 죽이려 했는데, 29절에 나온 대로 다윗을 훨씬 더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울의 모든 계획은 실패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어려움과 고통만 커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잘되고 해결되고 나아지는 게 소망이고, 반대로 점차 나빠지고 잘못되고 실패하는 것은 절망이라 할 수 있으니, 사울은 모든 소망이 끊긴 절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이 이처럼 실패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반대로 다윗이 잘되고, 소망의 삶을 살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싸움의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 것이 싸움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사울이 이겼다고 해서, 사울의 삶이 세워지고, 소망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 앞에서 말씀드린 사건처럼, 혹 이겨도 함께 망하는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싸우는 목적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고,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복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알려주기 위해 싸웠으니, 다윗은 싸우기 전부터 이미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향해 나아가야 할 싸움이 바로 이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으로 싸워야 합니다. 이 길이, 시간이 흐를수록 잘되고, 복되고,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다윗과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공하고 이겨도 망가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싸우는 사울과 같은 사람을 버리십니다.

 

사울과 다윗의 싸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으로 나아가 싸움으로써, 다윗과 함께하시고, 그 길을 열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보호하심을 언제까지나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