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209)사랑과 헌신의 수준을 높여서(삼상 19장 8-17절)

청명하늘 2020. 2. 9. 14:48

사랑과 헌신의 수준을 높여서

 

성경: 사무엘상 198-17(441)

찬송: 412(내 영혼의 그윽히; 469), 540(주의 음성을 내가; 219)

설교: 2020020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 할 만큼 꽤 오래 전에, TV에서 북한에서 제작한 짧은 만화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보통 북한에서 만든 것이라 하면, 정치적인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때 본 내용은 그렇지 않고, 교훈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부자와 가난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교훈을 주기 위한 영화나 드라마, 만화 같은 곳에서 부자는 대부분 어떻게 표현되는가요? 가진 것이 많으니, 아량이 넓고 잘 베푸는 사람으로 나오는가요? 아니면 자기만 알고,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옹색한 사람으로 그려지는가요? 대부분은 놀부처럼, 자기 배만 불리고, 남의 어려움과 배고픔을 생각하지 않는 인색한 사람으로 그려지죠?

 

그 만화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자는 언제나 좋은 것을 입고, 좋은 것을 먹고, 편하게 살면서,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못되게 굴었습니다. 배를 곯은 사람들이 와서 식량을 좀 꾸어 달라고 해도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곳에 엄청난 홍수가 났습니다. 모든 집이 잠길 정도였습니다. 시간이 충분했으면 높은 산으로 피했을 텐데, 물이 갑자기 불어서 멀리 가지 못 하고, 부자와 가난한 청년 둘이 큰 나무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물을 피해 도망갈 정도라는 것은, 아래 집이 무너지고 떠내려 갈 수 있다는 뜻이죠? 집에 있는 어떤 것도 다시 쓰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집에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챙겨 올라가야죠? 그래야 물이 빠진 후에 다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집에서 어떤 것을 가장 먼저 챙기시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예전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경책이나 십자가를 가지고 올라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성경책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면, 그럴 필요 없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몇 만원이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가진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쌀은 물론이고, 땅문서, , 폐물도 가득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있는 황금을 한 상자 가지고 올랐습니다. 가난한 청년은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쌀 몇 되를 가지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잘한 것 같습니까? 일반적으로는 황금을 선택한 부자가 훨씬 유리한 할 것입니다. 황금 한 조각만 해도, 쌀 몇 가마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물이 빨리 안 빠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빠져야 일단 나무에서 내려와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데, 며칠 동안이나 물이 안 빠져서, 두 사람은 계속 나무 위에서 있어야 했습니다.

 

이때가 되면 황금을 가진 부자와 쌀 몇 되뿐인 청년 중에 누가 더 유리할까요? 이제는 청년이 훨씬 유리해졌죠? 황금이 아무리 가치가 크고, 또 많이 있어도, 그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먹는다고 배가 부르고, 힘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무 위에서도 끝까지 거드름 피우던 부자가 며칠 굶으니 청년에게 쌀을 몇 줌만 달라고 사정합니다. 하지만 그 동안 부자에게 괄시를 당하고 살아온 청년은 안 준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는 부자가 자신에게 있는 황금 모두를 줄 테니, 쌀 몇 주먹만 달라고 사정합니다만, 청년은 그것마저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기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뀐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상황이라면, 황금은 지금도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가장 귀한 가치를 가집니다. 현재 금 한 돈은 20만원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돈의 무게는 겨우 3.75g입니다. 이 정도로 작고 가벼운 것이지만, 쌀을 산다면 무려 80kg을 살 수 있습니다. 밀가루 종류가 많지만, 평균으로 계산해도 무려 300kg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의 가치는 높습니다. 이것을 교환 가치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무엇으로 교환될 만한 가치가 있느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만약 은 한 돈이라면 어느 정도 가치를 할까요? 시세가 계속 바뀌긴 합니다만, 얼마 전의 시세로는 2,300원정도였다고 합니다. 같은 무게로 따지면 금의 1/100밖에 가치가 안 됩니다. 은 한 돈으로는 쌀 1kg정도밖에 살 수 없습니다. 이처럼 금은 훨씬 많은 것들로 바꿀 수 있어서, 가치가 있다고 하고, 은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주 적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세가 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부자와 가난한 청년의 이야기에서처럼, 상황이 바뀌면 가치가 바뀔 수 있습니다. 가치 있던 황금이 쌀 몇 줌의 가치도 안 될 수도 있고, 쌀 몇 줌이 황금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 사무엘상 19장에서는 다윗을 향한 한 가족 세 사람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딸인 요나단과 미갈입니다. 이 세 사람은 한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삶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만, 이 가족의 모습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데, 왕이 되기 전까지는 겸손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만, 이후에는 하나님이나 사람 보기에 안 좋은 모습들만 보였습니다. 시기심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도 쉽게 무시했습니다. 자기 보기 좋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못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은 전혀 다릅니다. 특히 다윗을 향한 모습들을 보면, 어떻게 사울 같은 사람에게서 요나단과 같은 인물이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로서 왕의 자리가 약속된 사람입니다. 이런 때에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면서 떠오르게 됩니다. 왕의 자리를 두고 경쟁할 수 있는 적수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정말 사랑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고, 자기 아버지의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구하려고 애씁니다. 악령에 눈이 뒤집혀 살기등등한 자기 아버지 앞에서도 다윗을 옹호하고, 다윗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과감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의 모습이 소개되었습니다. 본문 앞에서 요나단이 사울을 잘 설득했습니다. 다윗은 나라에 좋은 일만 행했으니 죄가 없고, 이런 다윗을 죽이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들의 이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이 좀 잠잠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블레셋 민족이 공격해 왔고, 다윗이 나가서 무찔렀습니다. 적들을 무찔렀으니,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높이고 인정했겠죠? 이렇게 되니, 다시 악령이 사울을 사로잡았고, 사울의 질투심과 분노가 터졌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고, 다윗이 피해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미갈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 남편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들을 보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숨겼다가 밤에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여기에서 미갈의 모습을 보면, 다윗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 같습니까? 큰 것 같습니까? 별로인 것 같습니까? 다윗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친구인 요나단의 사랑이 큰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아내인 미갈의 사랑이 더 큰 것 같습니까?

 

앞장 181절에서는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고 하고, 20절에서는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나단도 다윗을 사랑했고, 미갈도 다윗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했다는 점에서는 요나단과 미갈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크기에서 보면, 아내인 미갈보다는 오히려 친구 요나단이 다윗을 훨씬 더 사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쉽게 확인하거나 비교할 수 없습니다만, 여기에서 요나단과 미갈이 다윗을 위해, 무엇을 각오하고,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비교해 보면 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왔을 때, 요나단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왕자를 상징하는 옷과 군복도 주었습니다. 또 생명이나 다름없는 칼과 활까지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것도 대단합니다만, 다윗이 아버지로부터 쫓기고, 죽을 위기에 처할 때는 다윗을 숨겨주고 격려하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내인 미갈도 다윗을 아끼고 사랑한 것은 맞습니다만, 요나단의 사랑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다윗에 대한 미갈의 사랑은, 다윗이 가장 성공하고 잘나갈 때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러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때, 미갈도 사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을 아끼고 사랑할 때도, 다윗이 블레셋 민족을 무찌르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미갈의 사랑은 딱 이 수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을 구해 주긴 했습니다만, 정말 다윗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부고, 사랑하는 남편이니 목숨 걸고 다윗과 함께해야 합니다. 다윗이 장군으로 있다가 쫓기는 입장이 된다 하더라도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미갈은 그 정도의 사랑을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이 자기 아버지로부터 쫓겨서 여기저기로 도망할 때 미갈은 여전히 궁전에 있었습니다. 편하게 지내다가 자기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하자 그대로 떠나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다윗에 대한 미갈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다윗이 잘되고, 성공하고, 사람들이 높여줄 때는 다윗을 사랑하고, 위험도 어느 정도 감수합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이나 지위나 보장된 삶을 버리고서라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차라리 다윗을 포기하고 돌아설 사람이었습니다. 미갈의 사랑은 영광과 성공만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친구로서 다윗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많은 적들을 무찔러서, 수많은 사람들의 높임을 받을 때도 사랑했지만, 다윗이 죽을 위기에 처할 때도 사랑했습니다. 다윗이 왕의 무기를 맡고 있을 정도로, 이름과 지위가 높아질 때도 사랑했지만, 다윗이 광야로 도망해 거치처럼 살 때도 여전히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상황과 조건을 계산하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사랑의 수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수준은, 우리를 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외아들을 주실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길 원하시겠습니까?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는 정도를 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미갈이 사랑하는 정도를 원하시겠습니까?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정도를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면, 사랑의 수준은 오히려 미갈에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이 잘되고, 내가 편하고, 부담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한다고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해냅니다. 그러나 내가 져야 하는 부담과 짐이 커지고, 내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 할 것 같으면, 한 쪽에 언제든지 떠날 계산을 품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이 정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미갈정도의 사람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미갈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 요나단의 수준에 이른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미갈과 같은 수준의 사람을 지키시고, 복을 주시는 게 아니고, 요나단과 같은 신앙과 헌신과 수고를 인정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요나단과 미갈의 이후 삶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미갈은 조건에 따라 이리저리로 흔들리며 살았습니다. 다윗이 위험을 피해 미친 사람처럼 지낼 때도, 미갈만은 여전히 편하고 쉽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왕이 돌아왔을 때마저, 여전히 계산적으로 살다가, 다윗으로부터 버림받았고,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자녀를 낳지 못 한 채 쓸쓸하게 삶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비록 자기 아버지와 함께 전장에서 함께 숨을 거두었지만, 그 후손은 다윗 왕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복을 받고 살았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무엇까지 각오할 정도입니까? 무엇까지 각오할 수 있습니까? 당장의 복과 평안이 보장될 때만 함께하는 미갈의 사랑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고난과 죽음까지도 각오할 만한 요나단의 사랑에 가깝습니까?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의 영향을 받아, 미갈과 같은 수준으로 머물고 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이르지 못 하고, 약속하신 복과 평안을 받지 못 하고 끝나곤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수준을 요나단정도로 높여만 하나님의 넘치는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나단과 미갈의 모습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실 만한 수준에 이름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만이 주시는 영생과 더불어 이 땅에서 참된 복과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