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419)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십시오(삼상 23장 15-23절)

청명하늘 2020. 4. 19. 15:13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2315-23(449)

찬송: 435(나의 영원하신 기업; 492), 436(나 이제 주님의; 493)

설교: 2020041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기 바라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마냥 편하고, 건강하고, 부유하고, 우리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좌절하고 포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홀로 믿음으로 거인 골리앗에 맞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편하고 성공하고, 왕이 되는 과정까지 탄탄대로가 열려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계산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몇 년 동안이나 사울에게 끊임없이 쫓기면서, 광야에서 숨어 지내야 했고, 자기 목숨 유지하기 위해서 적국에 망명하거나, 미친 척까지 해야 했습니다. 다윗이 겪은 이 모든 과정을 보면, 마치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징벌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인물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입니다. 사울은 처음엔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다 자꾸 자기 생각을 대입하기 시작하고, 나중엔 자기 판단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앞세우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자신도 이기지 못 한 골리앗을, 전혀 모르던 어린 소년 다윗이 나와서 죽이고, 모든 백성들의 칭송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 했습니다. 사울의 시기심이 겸손과 믿음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과 생각대로라면 교만과 죄의 대가로 당장 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인 다윗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합니다. 왕권이 더 강화되었고, 자기 하고 싶은 일들을 맘껏 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사울은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사무엘상 마지막 부분에서 죽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린 기간이 무려 40년입니다. 사울은 40년 동안 누리고 통치하는 자리에 있었고, 다윗은 그에 버금가는 기간 동안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뜻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남을 미워하며 죄를 짓는 이들은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울은 죄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기울어지고 망가져야 합니다. 반대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사울과의 관계에서도, 세상에서도 언제나 승리하고 성공하고 점차 좋아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잘못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되 우리의 생각과 지혜보다 더 크고 좋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이것으로만 판단합니다. 당장 편하고, 잘되고, 성공하면 그것이 제일이고, 그것이 복의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녀들이 이런 수준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더욱 성숙한 자녀, 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자녀, 더욱 크고 놀라운 일들을 해낼 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녀들을 훈련하십니다.

 

훈련이라는 것 자체가 즐거울 리 없습니다. 언제나 고되고 귀찮고 힘에 겨울 뿐만 아니라, 훈련의 성과가 즉시 나오지도 않습니다. 훈련을 받는 목적도 훈련 자체가 아니라,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인데, 경기가 크고 중요할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승리하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바로 이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고통이, 더 크고 좋은 일들을 위한 훈련의 과정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는, 우리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과정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더욱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어려움과 장벽에 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이들을 보내시거나, 이기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는 것은, 다윗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렵고 힘들고 좀 느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만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괴롭히는 자들, 악의 편에 선 자들도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도구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며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과정이 우리를 성숙시키는 도구가 된다고 해서, 악하고 부정한 자들의 편에 서거나, 남에게 상처 주는 것까지도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숙하게 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자들의 심판이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늘 분문은 짧게 읽었지만, 다윗이 만나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입니다. 하나는, 악해서 자기 편하자고 남을 괴롭히고 악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사울과 도엑이라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결국은 자기들의 입장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로서, 그일라 사람들과 십 황무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자신의 이익과 성공보다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서, 남을 세우고,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는 부류로서, 여기에는 다윗의 절친인 요나단이 속합니다.

 

사울은 왕위에 있는 동안, 다윗을 경계하고, 쫓아가고 죽이려고 궁리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왕이라면 관심을 갖고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해서는 안 될 일들에 신경 쓰느라, 왕으로서 정작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 했습니다.

 

사울과 비슷한 삶을 산 또 한 사람이 사울의 부하인 도엑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기가 속한 베냐민지파 사람들만으로 요직에 앉혔습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도엑은 에돔 사람인데 사울 곁에서 중요한 일들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 기반이나 관련이 전혀 없는 사람이 요직에 머물기 위해서는, 왕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 도엑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을 찾아 죽이려 하는 사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도엑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고자질하고, 이 말을 들은 사울이 그 지역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명령하자, 다른 그 어떤 신하도 하나님이 두려워 나서지 않았는데, 바로 도엑 이 사람이 나서서 제사장들을 무려 85명이나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라이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바로 제사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대할 때, 하나님의 대언자와 중재자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곁에 있어야만 권력을 누릴 수 있던 사울의 심복들조차도 제사장을 죽이라는 사울의 명령에 나서지 못 했습니다. 제사장을 죽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맞서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엑만은 사울로부터 권력과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 다윗을 도와준 제사장만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던 모든 제사장을 죽였습니다. 세상에서 더 누리고, 더 갖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버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만나는 두 번째 부류는, 세상의 보통 사람처럼 자기 자신들을 위해 이리저리로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일라와 십 광야에 사는 사람들은, 다윗이 목숨 걸고 자기를 구해주었음에도, 자기들이 어려움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의 편에 섰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로운가 하는 것이 기준이고, 이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다윗에게 힘과 권력이 있었다면, 절대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 하는 것만이 기준이 되는 사람들로서,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만난 세 번째 부류는, 사울의 아들이지만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다윗을 아끼고 보호한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왕자입니다. 아버지의 왕권이 유지되고, 자신이 살아 있으면 다음 왕이 예약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왕권을 두고 다퉈야 하는 경쟁자입니다. 요나단이 살면 다윗이 죽어야 하고, 다윗이 살면 요나단이 죽어야 하는, 함께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자기의 것을 지키거나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버리거나, 남을 희생시키려는 욕망을 철저히 버렸습니다. 다윗을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다윗이 만나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며, 더 훌륭한 왕이 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다윗이 겪은 이 과정들을 보면,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28절 말씀대로 됨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고 해석했습니다.

 

다윗이 겪은 눈물 나고, 원통하고, 억울하고, 가슴 답답한 모든 일들 하나 하나가 결국 다윗을 더 좋은 사람,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사람, 하나님이 약속하신 더 큰 복들을 받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선택과 행동을 해도 된다거나, 정당화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도엑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윗에게 행한 일들로 인해서, 다윗은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못 되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의지할 분이고, 힘이 되신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울과 도엑의 악행마저도 좋은 열매를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악행마저도 선하게 이용하신 것이지만, 다윗에게 악하고 억울한 일을 저지른 사울과 도엑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 중에, 세 아들과 함께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평생 다윗을 시기하며, 하나님을 떠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왕위를 물려줄 아들과 함께 죽었으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가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또 도엑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기보다는, 사울의 보호와 인도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까지 저질렀는데, 도엑이 그렇게 의지하고 따랐던 사울 왕이 그렇게 죽었으니 그 결말이야 어찌되었을지 뻔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구해주었음에도 자기들 살겠다고 다윗을 배신하고 고자질한 그일라 사람들, 십 황무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 이들은 반대로 매일같이 두렵고 떨리지 않았겠습니까?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있는데, 누구에게 억울하다고 말할 수나 있겠습니까? 다윗이 나뉜 이스라엘 전체를 통일하는 강한 왕이 되는데, 누구에게 가서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자기들 살겠다는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행함으로써, 날마다 죽음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비극입니까? 소망이 있어도 세상 사는 것 그리 녹록치 않는데, 좋아질 기미와 소망마저 없는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된 요나단은 어떻습니까?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왕의 자리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렸으면, 세상의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신실함으로 대하느라, 세상적인 권력과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와 함께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요나단의 삶이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믿음과 세상에서 행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상급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먼저 기억하는 성경의 인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뿐만 아니라, 아버지 사울의 왕가는 완전히 망했지만, 요나단의 아들은, 다윗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다윗의 보호와 보상을 받았으니, 이런 선택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습니까?

 

다윗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만난 세 부류의 결말은, 그들의 행함과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을 심었으니, 당연히 비극적이고 썩은 결과를 얻은 것이고, 선함과 신실함과 믿음을 심은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은 사람의 것과 달라서, 사람에게 좋은 것이 하나님께 언제나 좋은 것 아니고, 사람에게 나쁜 것이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언제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보기에 좋고 나쁨에 따라서 좌우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선하고 복이 되는 도구로 인도하심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을 아프게 하거나, 남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악을 행해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좋은 것으로 바꿔 주시겠지만, 그럼에도 악과 불의를 행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몇 년 후 혹은 우리 자신의 결국이 어떨지 궁금하십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남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이웃과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서 신실함과 믿음으로 행했으나 그에 대한 보상과 복을 아직 얻지 못 했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복을 기억하시며 응답하심을 기억하고 인내하십시오. 혹시 남에게 아픔과 어려움을 주고, 마음 상하게 했다면, 이를 즉시 회개하고, 삶의 모든 과정과 생각과 방법을 철저히 바꾸십시오. 그래야 우리 모두가 기쁨과 소망과 복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과 말씀을 통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기억하고,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날마다 인내하며 살아가되,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서 좋은 씨앗, 진실된 겸손함, 소망이 있는 인내를 심음으로써 날마다 복되고, 좋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