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4)사명을 기억하며 살기(삼상 26장 13-16절)
참된 사명을 기억하며 살기
성경: 사무엘상 26장 13-16절(구 454쪽)
찬송: 327장(주님 주실 화평; 통361), 315장(내 주 되신 주를; 통512)
설교: 2020061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유명한 웹툰 작가들 중에 강풀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웹툰’이라는 것은 만화인데, 종이로 된 책으로 만든 게 아니고, 인터넷을 통해 연재하고 배포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강풀이라는 작가는 좋은 작품을 여러 편 만들었습니다. 이 작가가 만든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로 만든 것만 해도 10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26년」이라는 작품입니다.
「26년」이라는 작품은 2006년 완결되었는데, 그때를 기준으로 26년 전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렸습니다. 2006년의 26년 전이면 1980년이고, 이때의 가장 크고 아픈 사건은 광주민주화운동이죠? 「26년」은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민주화운동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를 중심으로 그린 게 아니고, 이를 겪은 사람들의 아픔, 그리고 이를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아픔을 겪었다고 하면, 본인이나 가족이나 친척 등이 다치거나 사망한 경우를 생각하죠? 물론 이분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당시 진압군으로 활동해야 했던 분들도 결국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총을 쏴 시민들을 다치게 하고, 사망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이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죄책감에 엄청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6년」이라는 작품 속에서도, 5.18 당시 진압군으로 같이 활동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이제는 전두환을 찾아가 사죄하도록 하려는 김갑세라는 인물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오히려 반대쪽에 선 사람입니다. 전두환을 해치려는 사람을 막고, 전두환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총을 맞을 정도로 노력하는 마상열이라는 인물입니다.
끝까지 전두환을 지켜서, 작전을 실패하게 만든 마상열에게 김갑세라는 인물이 묻습니다. “자네는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인가? 그 사람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짓을 했는지 잊었는가? ...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경호하는 이유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마상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분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의 모든 과거가 잘못된 것이기에 이분은 보호받아야만 한다.”
마상열이라는 인물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해치고, 죽였다는 사실에 크게 괴로워합니다. 이 고통과 죄책감이 워낙 크니,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5.18 당시 진압과 폭력과 살인이,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시킨 것입니다. 이를 지시한 전두환도 옳은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전두환은 용서를 구해야 하거나,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하죠? 이런 의미에서 보면, 끝까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전두환을 지키고자 하는 마상열은 사명을 다한 것이죠? 이 사람의 임무는, 전두환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자 애썼으니, 사명을 다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람의 사명이 가치가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게 했던 악인을 지키는 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가치는 무조건 지키고 보호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를, 무엇을 지켰느냐에 따라 가치가 나뉩니다.
정신 이상한 사람이 흉기로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서 본인도 다쳤습니다. 이럴 때, 생명을 살리고, 치료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의사라면 어느 편에 서고, 누구를 치료해야 하겠습니까? 단순히 사람을 고친다는 사명만 생각한다면, 사람을 해치는 정신이상자를 고치는 것도 사명을 다하는 것이고, 피해를 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고치는 것도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생각을 가진 의사라면, 당연히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고치고 치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통해 보면, 사명은 단순히 자기가 맡은 임무를 다하는 것 자체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명은, 임무의 대상과 목적과 방법까지 함께 평가되어야 합니다. 가치가 있는 대상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가치 있는 방법으로 이뤄져야만 비로소 사명을 다한 것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혈안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음에도, 사울에게 쫓기느라 온갖 고난과 수난을 겪게 됩니다. 다른 민족에게 가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 근동에서 가장 큰 부자인 나발에게 가서 식량을 구걸했다가 무시당하기도 했습니다. 누구든지 다윗의 처지에 놓였다면, 사울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죄는 없고, 오직 큰 공로만 있는 다윗을 죽이러 다니는 사울도 보통 사람이 아니죠? 그럼에도 굴속에 무방비로 있는 사울을 살려둔 다윗도 보통이 아닙니다. 이를 알면서도 다시 다윗을 잡아 죽이러 다니는 사울도 나쁜 쪽으로 대단하고, 이런 사울을 두 번째에도 용서해 준 다윗은 좋은 쪽으로 대단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째 살려 주고, 사울 왕의 물병과 창을 증거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 사울 왕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부하들과, 그들의 군대장관 아브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사명에 대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사명이라는 게 단순히 자리를 함께하는 것만으로는 다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삼천 명의 군사를 데리고 왔고, 이들을 총괄지휘하는 사람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이 자는 곳까지 찾아가, 그의 물병과 창을 가지고 나올 동안 사울의 부하들과 아브넬이 한 일이 무엇일까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 앞 12절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약을 먹이시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일어나지 못 하도록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을 보면, 이것은 그리 좋은 해석은 아닙니다. 이들이 깊이 잠들 만큼 방심하게 만드신 것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다윗을 잡기 위해 기브아라는 곳에서 십 광야까지 급히 달려왔습니다. 이 거리가 40km가 넘습니다. 지금이야 이 정도면, 몇 십 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입니다만, 3천 년 전은 절대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다윗을 잡으러 가는데, 맨손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각자 무기를 들어야 하고, 몸을 보호할 것을 입고 가야 했을 것입니다. 며칠 걸릴지 모르니, 먹을 것, 잠잘 것까지 옮긴다고 하면, 분명 고된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붙잡으려 하는 다윗의 군사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가진 군사라야 해봤자 600명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5배인 3,000명 군사입니다. 사울의 부하들이 보기에, 다윗의 군사들은 뜨내기들이 모였으니, 특별히 뽑혀 온 자신들에 비하면 오합지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또 굴속에 혼자 있던 사울을 다윗이 살려 주었던 것을 이들도 듣고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면, 다윗과 그 부하들은 더 이상 사울에게 별다른 위협을 주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이 이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죽이거나 죽을 수 있는 전장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왜 그 자리에 있고,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이 잠들자, 모든 군사들도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전장의 한복판에서 이처럼 깊은 잠에 빠진 이유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기들의 사명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넬과 삼천 군사들의 가장 큰 사명이 무엇인가요? 사울 왕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 왕이 살아 있어야, 명령할 수 있고, 나라를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왕이 가진 힘이기도 하고, 수하에 있는 부하들의 가장 큰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울과 함께 잠들고 말았습니다. 이때 사울이 데려간 군사가 삼천 명입니다. 삼천 명이 함께 갔는데, 이들 중에 깨어서 사울 왕을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울을 살려준 다윗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자비를 베푼 특별한 사람이었음을 바꿔 생각해 보면, 사울은 이미 죽은 바나 다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 같았으면, 사울은 살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브넬과 삼천 군사들은 사울의 명령을 따라 고된 여정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잠자리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고, 먹는 것, 입는 것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사명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왕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잊어버린 까닭에, 이들은 충성스러운 자가 아니라, 불충스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사명을 다지 못 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사울의 부하들과 아브넬 정도에 머물곤 합니다. 그 정도가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삽니다. 편하고 쉬운 곳을 뒤로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험한 곳에 가는 것만으로 사명을 다했다고 착각하는 부하들처럼, 신앙인들은 편하고 쉬운 세상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교회에 나오고,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했다는 것만으로 사명을 다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부하들이 험한 곳을 따랐다는 것만으로는 사명을 다했다고 말하지 못 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는 사명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왕을 따라다니는 것보다, 왕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교회에 출입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여기며 지키고 행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명에 대해 배우는 두 번째는, 사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왕을 보호하지 못 한 이들을 다윗이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의 마지막 판단은 이 땅이나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의 삶을 다 마친 후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의 판단을 기준으로 보면, 본인들이 받은 임무를 다하는 것 자체만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습니다. 대상이 다윗처럼 의로운 사람이든, 사울처럼 악한 사람이 되든,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임무만 다하면, 사명을 다하고 충성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을 마칠 때 하나님께서 내리실 판단도 똑같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임무만 다하면, 충성했다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이 사람의 것과 다르다면, 하나님의 판단도 역시 사람의 것과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를 위해 목숨 걸고 지키는 자들을 칭찬하시고, 사명을 다한 자로 인정하시는 게 아니고, 목숨 걸만한 가치에 목숨 걸고, 지키고 보호할 만한 것들을 지키고 보호할 이들을 칭찬하시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목숨 걸고 지키고, 사명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럴 만한 것들을 찾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 하면, 목숨을 걸고 함께해도 결국은 헛된 것에 힘쓴 사람이 되고 맙니다. 헛된 것에 인생을 바친 헛된 인생, 헛된 수고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위해 힘쓰는 것들, 목숨처럼 여기며 지키고자 애쓰는 것들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킬 만한 것들을 지키고 있습니까? 목숨 걸 만한 것들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지금 위해 힘쓰는 것들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힘과 시간과 생명을 다 바칠 만큼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힘과 생명을 다해도 아깝지 않을 것들을 위해 힘써서,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 하다면, 바쁜 일상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10년 뒤를 생각해 봅시다. 생명이 다하는 시간을 기억하며,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세상을 향한 욕심과, 헛된 것들에 대한 탐욕의 눈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원하시는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충성스러운 사람, 사명을 다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치 있는 일에 힘쓰고 충성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사람은, 죽도록 충성하되, 죽도록 충성할 만한 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삶을 돌아봐야 할 까닭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몸과 시간만 잠시 함께하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 되지 말고, 헛된 것에 힘쓰는 사람 되지 말고, 오직 영원한 생명과 참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에 힘쓰고 애쓰는 사람,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