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8)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리에 머물기(삼상 27장 1-12절)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리에 머물기
성경: 사무엘상 27장 1-12절(구 456쪽)
찬송: 285장(주의 말씀 받은; 통209장), 270장(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통214)
설교: 2020062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K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하나를 봤습니다. 히말라야 지대에 사는 아이들이 학교까지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로서는 학교, 특히 초등학교라고 하면, 걸어서 몇 분, 멀어도 몇 십 분밖에 안 걸리죠? 그러면서도 학교가 좋다 나쁘다, 환경이 좋다 나쁘다를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지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거대합니다. 그렇게 높고 외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살지 못 합니다. 그래서 어른 세대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 했는데, 이제는 문명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어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학교가 우리처럼 가까이 있으면, 아이들이 매일 통학하겠지만, 가는 데만 1주일에서 열흘 걸릴 정도로 멉니다. 또 산도 험하고 높아서 아주 위태롭습니다. 오죽했으면, 작은 제목으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학교길, 히말라야, 차다’라고 했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은 1년 동안 학교에서 지내다가 겨울방학이 시작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세상 어디나 비슷하죠? 매일 오가는 아이들에게도 더 좋은 것, 맛있는 것 더 많이 해주고 싶겠죠? 한 번 가면 1년을 떨어져 지내는 아이에게는 더 그럴 것입니다.
학교로 출발하기 전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입히고, 먹이고,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데, 맘껏 넣지 못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엄마의 마음으로는, 자기들 굶고, 더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아이에게 더 풍성히 주고 싶겠죠? 그럼에도 맘껏 담지 못 하는 까닭은, 그게 남편이 져야 하는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넘게 산길, 눈길, 얼음 강물을 지나가려면, 챙겨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천막이 있어야 하고, 아이들이 1년 동안 입어야 하는 옷가지들, 먹을 음식, 또 운반할 수 있는 썰매까지. 이것만 해도 이미 짐이 한 가득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것 더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만들어 주면, 남편은 10일 동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물이 녹은 곳에 가면, 바지를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짐을 나르고, 아이까지 업어 옮기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든데, 아이를 생각한다며, 거기에 음식까지 많이 넣으면, 남편은 더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 음식 몇 가지가 모든 것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더 무거워진 짐 때문에, 자갈 많은 곳에서 넘어질 수도 있고, 얼음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남편이나 아이가 다칠 수도 있고, 더 심각하면 학교마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학교에 가는 사람은, 부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마 아빠만 이것을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에 가는 사람은 아이들이면서도, 이에 대해 가장 자유롭습니다. 염려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게 선택의 기로에서 겪는 어려움입니다. 책임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민과 갈등이기도 합니다. 원하는 대로 되고, 모든 게 적절하게 되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습니다만, 수없이 많은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삶입니다. 한 쪽을 더 높이, 더 단단하게 쌓고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오히려 다른 한 쪽을 위험에 처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무너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고민과 갈등은, 책임자면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혜롭게 잘 선택하면, 점차 모두에게 유익이 됩니다만, 반대로 잘못 선택하면, 그에 따른 손해와 어려움이 더할 수 없이 커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도 이런 문제로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사울도 다윗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자신이 오해해서 다윗을 죽이려 했다며,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고, 살려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다면, 다윗을 향한 미움과 위협을 멈춰야 합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사울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다윗이 있는 곳을 찾아내려 하고, 찾아내면 다윗의 군사보다 몇 배를 더 데리고 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봤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 혈안이 된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지만, 사울은 바뀌지 않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아주 작기 때문에, 그렇게 위협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사울에게 잡힐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피한 곳이, 블레셋 민족에 속한 가드라는 지역이었습니다. 가드 왕인 아기스에게 이야기해서, 시글락이라는 지역을 얻어 그곳에서 16개월을 살았습니다. 정치적 망명이었고, 다윗의 판단대로, 이 이야기를 들은 사울은 드디어 다윗을 향한 위협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접해 있는 블레셋으로 망명한 게 좋은 결과를 낳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에 간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1장에, 급하게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음식을 얻고, 칼을 받아 도망한 곳이 가드라는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 했습니다. 가드는 다윗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하니, 원수의 나라로 피신한 것입니다. 당연히 가드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대문에 아무렇게나 그적거렸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렸습니다. 당시, 수염은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런 수염에 침을 흘린다는 것은 남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이때 다윗으로서는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겠습니까? 다른 사람들 앞도 아니고, 자기 손으로 죽인 골리앗의 고향, 그곳에서 이처럼 수치를 당하면서, 울분이 터졌을 것입니다. 이를 경험하며, 다시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살기 위해 적국으로 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 다짐했을 것입니다. 적국에서 산다는 게 죽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절실히 느꼈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자리로 갔습니다. 수치가 가득한 자리로 갔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것 때문에 증오심으로 가득한 곳으로 갔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아픈 기억마저 사라진 것도 아닐 터이고, 단지 몇 년 후로서 여전히 기억이 뚜렷할 때입니다. 다윗은 왜 이처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까? 무엇 때문에 수치와 아픔이 가득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성경에는 그 까닭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처음 가드라는 곳으로 갈 때, 다윗과 함께한 이들의 수는 단지 몇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물려 낸 떡만으로도 식량이 될 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가드를 떠나 아둘람 굴로 가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 빚진 사람들, 억울한 일을 겪은 이들이 가족을 데리고 다윗에게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수가 많아져, 무기를 들고 싸울 만한 군사가 600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사람을 수를 세는 법에 대해,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무기를 들고 싸울 만한 장년만 계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윗에게 600명의 군사가 몰려들었다는 것은, 그래서 단지 600명만 다윗과 함께한 게 아니고, 그 군사들의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2-3,000명에 이르는 거대한 무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서도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혼자 있거나, 단지 몇 명만 있을 때는 숨는 게 그리 어렵지 않죠? 울창한 숲으로 피할 수도 있고, 외진 곳으로 가면,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00명의 군사들과 그 가족까지 많은 수가 함께해야 했기에, 어디로 피하고 숨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거대한 땅에서도 숨고 피하기 쉽지 않을 만큼 너무 많은 수인데, 하물며 작은 이스라엘 땅에서는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가 수치를 겪지 않으려, 이스라엘의 영토 안에 있으면, 함께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사울 왕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한 사람들을 살리려면, 다윗 자신의 삶에서 가장 부끄럽고 싫은 경험이 가득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 자기를 미친 사람으로 여기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갈림길에서 다윗이 겪을 수밖에 없던 고민과 갈등이 얼마나 컸을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최후의 수단으로 수치스러운 기억이 가득한 적국, 그것도 자신을 향한 증오심이 가득한 가드라는 곳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곳만이 사울로부터 600명의 군사와 그 가족들까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거라 계산한 것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군사들과 그 가족들을 향한 다윗의 애착과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함께한 사람들을 살리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고 간절했기에, 이방 지역인 가드로 급히 피했고, 그곳 왕에게 사정해서 살 곳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이, 드디어 다윗을 쫓던 계획과 시도를 모두 포기했으니, 이보다 더 잘된 일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이스라엘 안에 머물기를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자기 부모를 모압 왕에게 맡기고, 요새를 세우고 피해 있을 때, 갓 선지자를 통해 사울의 살기 가득한 유다 땅으로 들어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억울함, 다윗이 당하고 있는 위험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은 왜 다윗에게 사울의 손이 강한 유다 땅으로 오라 하셨겠습니까? 왜 사울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몰려드는 유다 땅으로 다윗을 들이십니까? 왜 사울의 힘이 미치지 못 한 곳, 그래서 다윗에게는 가장 안전한 곳인 이방 민족에 머물지 못 하도록 하십니까?
다른 무엇보다, 사울의 강한 힘으로부터 다윗을 반드시 지키시고 함께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다윗이 얻고 누린 것들 중에, 다윗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없습니다. 다윗이 싸우는 기술과 힘이 좋아서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다윗이 모든 위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사울의 군사력보다 좋았기 때문이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 동안 갖고 누린 것은 다윗의 노력과는 별개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받았고,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의 힘과 군사들이 가득한 유다 땅으로 들어오라 하신 것도,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 주시겠다는 또 다른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것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줄 만큼 자비와 아량이 큰 사람이긴 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보지 못 했습니다. 사울이 가진 군사보다 하나님의 능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사울의 권력이 커봤자, 하나님이 잠깐 허락하신 한순간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 하고, 그래서 수치가 가득한 가드로 가서 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가 어땠는지를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가드 왕 앞에서 계속 거짓말로 연명해야 했고, 다윗이 지키고자 고국마저 뒤로했던 가족들을 잃을 뻔했습니다. 자칫 자기 민족을 향해 칼과 창을 휘두를 위기를 겪었습니다. 만약 이때 다윗이 블레셋에 편에 서서, 자기 민족과 전쟁을 벌였다면, 나중에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와 함께한 600명의 군사와, 그 가족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다윗은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이용했지만, 오히려 예상치 못 하는 여러 어려움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윗의 이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과 지혜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믿음 가운데 삶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다윗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여정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하고, 자비와 용서를 베푼 것이 오히려 칼과 창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리 저리 생각하고, 계산해도, 잠시 믿음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상의 자리,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따르는 게 합당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믿음대로 하다가는, 손해와 실패만 겪을 것 같은 때가 분명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리, 믿음의 자리입니다.
믿음의 자리는 위험하고, 실패할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이 직접 책임지시고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사람의 자리는, 성공할 것 같아도, 성공보다 더 큰 실패와 고난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단단히 붙잡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약속하신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뤄주신다 약속하신 방법과 수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고, 성공하는 길입니다. 은혜와 평강과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한 군사들과 가족들을 지키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 때문에, 약속의 자리를 벗어나 수치스런 자리로 향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자비와 긍휼한 마음은 좋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간직하지 못 했습니다.이 때문에 결국 더 큰 고난과 수치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고, 어떤 경우라도, 세상과 사람의 방법과 수단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약속하신 믿음의 자리, 오직 복과 평안을 약속하신 믿음의 길대로 따라 행함으로써, 약속을 기억하시고 지키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복과 사랑을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