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207)복이 약속된 삶을 선택하며 사십시오(삼하 9장 1-13절)

청명하늘 2021. 2. 7. 14:58

복이 약속된 삶을 선택하며 사십시오

 

성경: 사무엘하 91-13(476)

찬송: 390(예수가 거느리시니), 88(내 진정 사모하는)

설교: 2021020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걸쳐 기독교에서 큰 인기를 끈 책들이 있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렇게 끊어라,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등입니다. 미국의 한 신학대 교수가 지은 책으로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도시의 대형 교회들에서는, 이 책으로 신앙훈련을 시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집안에 여러 어려움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죠? 또 그 어려움이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여러 대를 이어 내려오는 경우들도 있는데, 그 집안에 저주가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얼마 전에도 경기도 안산에서 교회목사라는 이름을 달고, 가족 일당이 여러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해서 수십 억 원을 모았습니다. 또 목사가 아이들을 비롯해 5명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등의 여러 범죄로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죠? 말도 안 되는 그런 일들을 들으면, ‘설마...’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야 하는데, 요즘엔 웬만한 소식은 ?’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확인을 못 했습니다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려 이용한 수단이 바로 가계 저주론입니다. “집안에 저주가 흐르고 있어서, 대를 이어 여러 어려움이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얼마를 헌금하고, 목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집안에 흐르는 저주가 끊겨 잘살 수 있다.” 등으로 현혹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믿음을 가진 건강한 신앙인이라면, 이렇게 사악한 말과 행동을 보면, 뒤도 보지 말고 돌아설 것 같은데, 현실은 그런 비천한 말들에 넘어간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만한 수준의 신앙에 이르지 못 하고, 바른 판단을 내릴 만큼 생각이 바르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이 자기 욕심을 위해 가계 저주론의 일부 내용을 교활하고, 저질스럽게 악용해서 그렇지, ‘가계 저주론자체가 이 정도로 터무니없지 않습니다. 핵심은 집안에 저주가 있어서 여러 고통과 어려움이 생기니,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혹 여러 어려움이 집안 내력처럼 계속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몇 세대를 이어 계속되기도 합니다. 질병과 어려움이 3,4대가 되어도 끝나지 않고, 고통을 겪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저 집안에 저주가 흐른다고도 하고, “천벌을 받아서 그런다고도 말합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성경적으로 풀려 시도한 결과물이 가계 저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런 주장이 과연 성경에 맞을까요?

 

성경에도 이런 식으로 풀이되거나 풀이될 수도 있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가계 저주론자들이 많이 내세우는 본문은 출애굽기 204-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는 내용인데, 2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여기에서는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셔서 아버지의 죄 때문에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하나만 보면, 가계 저주론의 주장이 어느 정도 맞아 보이죠?

 

그러나 성경의 어느 부분만 보고 해석하면 오류에 빠집니다. 반드시 성경의 중심을 함께 봐야 하는데, 이런 주장과 상반되는 본문들은 훨씬 많습니다.

 

예레미야 3129-30절에서는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자녀가 벌과 저주를 받는다고 주장했을 때 이에 대한 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또 에스겔 1820절에서도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죄, 조상의 죄 때문에 아들과 후손들이 벌과 저주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셔서, 새로운 약속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전과는 달리 각자의 믿음에 따라 구원과 복을 받습니다. 조상에 따라 우리의 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려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이를 인정하고 믿고 사는 것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됩니다. 이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과 저주가 갈립니다.

 

물론, 조상과 부모의 영향을 전혀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조상과 부모가 부유하게 살면, 그 영향이 자녀와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것처럼, 조상과 부모의 모습이 자녀와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이는 조상에게 저주가 임했고, 그 저주가 후손에게까지 이어진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후손까지 복되고 평온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먼저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믿음에 따라 살되,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후손의 입장에서는 믿음 안에서, 선하고 의로운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대를 이어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오늘 본문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후, 주위에 있는 여러 민족들을 물리칠 정도로 강해지고, 나라가 평온해졌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부하들에게 사울의 집안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이 사울이고, 요나단은 사울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음에도, 그 은혜를 잊고, 계속 불순종하자 하나님께서 벌하셔서 전장에서 세 아들과 함께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첫째 아들이었으니, 아버지가 잘 했으면 다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잘못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왕의 자리를 놓고 다툴 수 있는 경쟁자로 여길 수 있었지만, 오히려 다윗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다윗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도와주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아버지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사울 왕과 함께 죽자, 그 피해가 므비보셋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궁에 큰 난리가 났고, 유모가 아기인 므비보셋을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떨어뜨려서 크게 다쳤습니다. 이 때문에 므비보셋은 평생 두 다리를 절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게 되자, 사울의 집안, 요나단의 후손이 있는지를 찾았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윗은 사울 왕의 모든 땅을 므비보셋에게 주고, 자신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요즘도 대통령과 같이 식사한다는 것도 큰 영광이지만, 옛날 왕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많은 재산과 종을 주고,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할 수 있는 영광을 베푼 까닭이 무엇인가요? 본문 1절에서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하고, 7절에서도 므비보셋에게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고, 재산과 영광을 함께 준 까닭은, 므비보셋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요나단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인지라, 얼마든지 왕의 자리에 욕심을 부리고, 다윗을 경쟁자로 여기며 해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철저히 자신을 희생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살았습니다. 비록 자신은 전장에서 아버지, 두 형제들과 함께 죽어야 했지만, 다윗은 요나단의 희생과 우정과 믿음을 기억했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베푼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가계 저주론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처럼, 가계에 저주가 흘러 후손이 고통과 저주를 받는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사울 왕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요나단도 고통을 겪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할아버지의 저주 때문에, 아버지가 벌을 받았다면, 사울의 손자인 므비보셋도 역시 저주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본문 속에 나오는 므비보셋을 보면, 저주 받은 삶이라 하기 어렵죠?

 

므비보셋처럼 굴곡이 있는 삶도 많지 않습니다. 왕의 장손으로 태어난 걸 보면 특별한 선택과 복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큰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으니, 저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조상의 재산을 받고, 왕과 함께하게 되었으니, 다시 복을 받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므비보셋이 저주를 끊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 일은 없습니다. 그저 다윗을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인정하고 따른 것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므비보셋에게 특별한 은혜와 사랑과 복을 베푸셨습니다.

 

이를 통해,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부모와 어른의 입장에서는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42절의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웃에게 베푼 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이에 대한 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행하는 대로 하나님이 보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따라 선을 행하면, 이 말씀처럼 자신과 자손들에게 확실한 큰 보장도 많지 않습니다. 요나단이 쌓은 덕과 선행 때문에, 그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복으로 받았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내뱉는 말과 행동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후손들이 겪게 될 앞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순간 선과 덕을 쌓으며 살아야 합니다.

 

더불어 후손들에게 반드시 모범이 되게 살아야 합니다. 조상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후손이 겪는다는 주장은, 사실 조상에게 저주가 흐르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들의 모습을 자녀들이 보고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게으르고, 악하고, 방탕하게 살면, 자녀도 매일 보고 배운 까닭에, 그와 비슷하게 살게 됩니다. 간단히는 식성과 말투부터, 사는 자세와 방향이 많이 닮죠?

 

그래서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면, 부모는 바라는 그 모습대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자녀들이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살기를 원하면, 부모가 그러한 삶을 살면 됩니다. 자녀가 소망을 가지고 살기 원하면, 어른이 먼저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믿음 가운데 소망을 가지며 성실히 살면 됩니다.

 

또 후손의 입장에서는, 복된 삶을 살기 위해 좋은 길을 선택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은 자기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너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왕의 자리 때문에 자기 삼촌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두 발을 모두 저는 고칠 수 없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고, 본래 자기 자리가 될 수 있었음에도, 다윗 때문에 이런 고난이 계속된다며, 다윗을 향해 증오심을 드러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실하게 살았고, 다윗을 향해서도 끝까지 충성합니다. 본문 속 시므이는 자기 이익에 따라 비열하게 행동하지만, 므비보셋만은 끝까지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이미 기울어진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므비보셋이 복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까닭이 이것입니다.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고, 신실하게 행하며 산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므비보셋과 같은 모습이 필요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 중에도 절망하지 말고, 고난 너머에 하나님의 약속과 희망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장애에 포기하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영광과 기쁨을 바라며 살아야 합니다. 작은 이익에 따라 비겁하게 살지 말고, 진리와 진실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눈앞에 있는 헛된 것에 속지 말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심을 확실히 믿고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저주와 고통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실 수 없는 질병과 저주와 고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큰 고난과 어려움 중에서도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복되게 살 수 있는 길들을 기억하고, 어려움 속에도 소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덕을 행하고, 모범을 보이며, 신실하게 살아감으로써, 므비보셋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