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411)겸손의 지혜(삼하 12장 26-31절)

청명하늘 2021. 4. 11. 14:07

겸손의 지혜

 

성경: 사무엘하 1226-31(481)

찬송: 411(아 내 맘속에), 212(겸손히 주를 섬길 때)

설교: 2021041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 민족의 위인들 중에 이순신 장군이 계시죠? 이분은 조선시대 임진년에 왜적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몇 척 남지 않은 배를 이끌고 나가서 수백 척의 왜군을 무찔러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조선시대에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굴욕과 아픔을 더 일찍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시 임금이 선조인데, 임금이 이순신 장군을 좋아했을까요? 미워했을까요? 다른 사람, 그것도 수백 년 전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만, 몇 가지 정황으로는 판단할 수 있죠?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들에서 백의종군이라는 말이 잘 알려져 있죠? ‘벼슬이나 직위가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삼군수군통제사, 요즘으로 보면, 삼군해군사령관을 지냈던 장군이 모든 벼슬과 직위를 빼앗기고, 군대에 다시 돌아갔다는 것으로, 별을 달고 있는 장군이 지위와 계급을 박탈당하고, 이등병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죄의 크기에 따라 불명예로 퇴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당하기 전에 이미 왜적을 무찌르는 엄청난 공을 세웠습니다. 게다가 왜군이 물러나 전쟁이 끝난 게 아니고, 전쟁이 소강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최고 장수를 불러 옥에 가두고, 모든 지위를 박탈했다면 그에 상응할 만한 죄가 있어야죠?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죄는 임금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조가 부산 쪽에 있는 왜군을 공격하라며 이순신 장군한테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나가면 패할 게 뻔한 상황이라, 이순신장군이 여러 가지를 이유로 안 들었습니다. 이 일로 임금이 화가 나서 이순신 장군을 의금부에 가둡니다.

 

의금부는 임금을 시해하려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가두는 곳으로서, 당시는 가장 무거운 죄를 다스리던 곳입니다. 곳에 갇히면, 죽거나 불구자가 될 만큼 혹독한 고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조선 수군이 왜적에 전멸하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이순신 장군을 반역자로 처형했을 텐데, 조선의 패망이 눈앞에 있어, 이순신 장군의 모든 지위와 계급을 떼고, 전장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 과정을 보면 좀 이상하죠?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임금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장수를 마치 적장을 처우하는 듯하는 게 납득이 안 됩니다. 전쟁 중이면, 우리 편을 한 사람이라도 늘려야 하고, 적은 한 사람이라도 줄여야 유리합니다. 그런데 많은 싸움에서 이미 많은 성과를 만들어 내고, 그래서 수많은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자기 장군을 이처럼 옥에 가두고,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고, 목숨만 부지시키고 전장에 돌려보냈습니다. 임금이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전투 중에 왜적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자신의 죽음을 적이 알지 못 하게 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하잖아요?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은 모두 이기고, 이미 승기를 굳혀 사실상 끝난 마지막 싸움에서 적의 총에 맞았는데, 이를 두고 스스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보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당시 총은 요즘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서, 갑옷을 입으면 맞아도 치명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장군을 보호하는 방패가 있어서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미 수많은 싸움을 겪은 장군이 마지막 전투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것을 보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는 해석이 일리 있어 보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왜적을 물리친 것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포상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여러 이유로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만, 어떤 분은 이를 시기심과 경쟁심 때문으로 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이 아주 안 좋았습니다. 당시 조선은 여러 당파로 나뉘어 정신이 없었습니다. 왜적이 침략해 위험에 처하자 임금은 궁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전쟁이 7년이나 계속되면서, 성한 곳이 없겠죠? 게다가 흉년까지 들어서, 백성들이 왕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어 여러 민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순신장군은 오히려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지지와 사랑을 받습니다. 백성과 궁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도망한 임금과는 반대로, 이순신 장군은 온갖 시기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자기 자리에서 싸웁니다. 그리고 좋은 성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이순신이 나라를 구한 신하지만, 한 편으로는 언제든지 자기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위험인물로 여겨졌습니다. 백성들은 자기를 향해서는 욕하고, 여기저기서 반기를 드는데, 이순신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으니, 언제 임금 자리까지 빼앗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고, 왜적 때문에 할 수 없이 살려 주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이를 알기 때문에, 전쟁에서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결국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그렇게 죽음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과 능력 있는 장군의 관계가 왜, 또 어떻게 나빠지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자기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인간의 교만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능력과 충성마저도 결국은 왜곡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와 패망의 이유가 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요압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만, 쉽게 보면 다윗은 조선시대 선조의 입장이라 할 수 있고, 요압은 이순신장군의 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좋은 결과를 맺은 걸 보면, 이순신장군의 비극적 결망의 한 원인은, 지혜와 양보와 융통성이 부족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국방장관인 요압은 군사를 이끌고 암몬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궁에 남아 있던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죠? 바로 충성스러운 장군인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일입니다. 게다가 이를 숨기려, 결국 우리아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국방장관인 요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죄를 통해 태어난 다윗의 아들이 죽는데, 이 아들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 결과가 오늘 본문 앞의 내용입니다.

 

이후에 요압이 드디어 암몬을 점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싸움이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정확한 기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드디어 암몬의 마지막 요새까지 점령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도성만 공격하면, 완벽한 승리로 암몬과의 전쟁을 마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국방장관 요압은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다윗 왕에게 이제 싸움이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도성만 점령하면 되니, 이제 임금님이 군대를 이끌고 오셔서 마무리해 주십시오라고 전하고, 다윗 왕을 기다렸습니다.

 

이미 다 이긴 싸움입니다. 마지막으로 적의 깃발만 내리면 될 상황입니다. 요압이 이 싸움에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겠습니까? 인간인지라 당연히 자기 손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도 생길 것입니다. 암몬을 공격하는 총책임자로서, 공적을 더 높이고 싶은 생각과 계획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기울어진 싸움이니, 마무리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들이는 수고와 헌신에 비하면, 직접 마무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전쟁에서 마지막은 상징을 넘어서 엄청난 보상이 따르게 됩니다. 전쟁의 총책임자로서 목숨 걸고 이 싸움에 수많은 힘과 시간을 쏟았으니, 요압으로서도 자기 손으로 마무리할 만한 자격도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백성들은 암몬과의 전쟁이 요압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며, 요압을 높이고 지지할 것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요압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게다가 이때 다윗은 자기 인생으로 봐서도,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최악이었습니다. 왕이 자기 부하의 아내를 탐내서 임신시켰습니다. 목숨 걸고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장군의 아내입니다. 자기 상관과 하나님의 궤가 전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만취되었어도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장군의 아내를 탐내는 것도 돌을 맞아 마땅한 일이죠? 다윗이 왕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처형될 만한 죄입니다. 그런데 이마저 실패하자,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곳으로 몰아넣고, 다른 군인들은 물러나게 만들어 죽게 했습니다. 이를 지시한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닌 임금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시를 받은 사람은 요압입니다.

 

요압으로서도 다윗의 이 모습을 보며,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또 우리아가 죽은 후, 밧세바가 임신한 몸으로 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백성들이 이 과정을 몰랐겠습니까? 다윗으로서는 하나님 앞에서도 위기였지만, 신하와 백성들이 언제 돌아서서 다윗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칼을 들이댈지 모를 만큼 위기입니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성군으로 여긴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돌아섰습니다. 많은 군사를 지휘하는 요압으로서는 왕의 자리를 노릴 만한 기회로 충분히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한 선조, 그리고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압은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과 권력이 커질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지 않고, 영광의 자리를 왕에게 양보합니다. 적의 깃발을 자기 손으로 내리지 않고, 마무리는 왕의 손에 맡기고, 자신은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모든 일을 준비해 놓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여기에서 요압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요압은 좋은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행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런 인물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지, 오늘 본문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하면, 지혜롭게 행동했고, 거친 말로 하면, 처신을 잘 했습니다.

 

만약 오늘 본문에서, 요압이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마무리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분명 백성들은 요압을 더 높였겠지만, 그러나 다윗은 요압을 더 경계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남북이 통일되던 과정에서, 요압은 왕의 명령까지 거역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이 일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았고, 요압을 편안히 보내지 말라고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했을 정도입니다.

 

바꿔 보면, 오늘 본문에서, 요압이 눈앞의 명예와 이익을 탐내려, 자기 손으로 직접 암몬을 무찌르고, 백성들이 이를 높이며 찬양했다면, 다윗은 요압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압의 힘이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시기해 처형하려 한 것처럼, 다윗은 요압을 더 싫어하고, 어떤 명목을 내세워서라도 처리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 끝이 비극이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요압은 순간의 교만과 명예욕 참을 줄 알았기에, 이후에도 계속 자기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요압 삶 전체를 보면, 교만하고, 교활했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 속 사건에서만은 겸손하고,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과 나라를 안전하게 지킬 만큼 지혜로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는 잠언 1618절과,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는 잠언 1812절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요압이 교만한 마음으로, 왕보다 더 높이 오르려했다면, 그의 지위와 생명이 오래가지 못 했을 것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겸손했기에 그의 이름이 더 높아지고, 그 생명이 더 길어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이들, 본문 속에서는 다윗과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수고하지 않은 열매를 먼저 바라거나 계획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일 수 있음에도, 왕을 높이는 기회로 만든 모습이 겸손하다 인정받는 까닭, 그리고 요압의 처신이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까닭은, 기회를 먼저 얻은 요압이 먼저 제안했고, 요압이 계획했기 때문입니다. 꼭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요압이 자기 이름을 낮추고, 왕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동안 뒤에 남아 용서받기 어려운 죄만 잔뜩 지었던 다윗이, 적을 정복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자기가 직접 적을 무찔러서, 자기 이름과 능력을 높이겠다고 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하들이야 명령에 따르겠지만, 그런 다윗을 그 누가 존경하고,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 모두가 다윗의 반대편에 서고, 그래서 다윗도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권력과 힘과 지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희생과 수고와 목숨을 짓밟고 명예를 높인들 그 자리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폭력과 탐욕을 통해 아무리 많은 공적을 쌓고, 명예를 높여도, 교만이고 악행에 불과합니다. 교만은 곧 패망으로 이끈다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 끝은 곧 실패고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끝없이 이어져 나오는 갑질의 한 가지에 불과하고, 결국 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암몬을 자기를 위한 기회로 이용할 수 있음에도, 요압은 이를 지혜롭게 이용했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자랑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욕망을 버리고, 왕을 높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지혜로운 판단 때문에, 혼란과 실패의 위기를 넘겨, 나라와 본인까지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다윗도 자기 욕심을 위해 먼저 나서지 않음으로써, 위기가 오히려 복이 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처신에 따라 그 결과가 철저히 달라짐을 알고, 지혜롭게,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써, 화를 복으로 바꾸고, 위기를 기회로 바꿔, 나날이 복되고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