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8)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기준으로 분별해야(삼하 16장 20-23절)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기준으로 분별해야
성경: 사무엘하 16장 20-23절(구 490쪽)
찬송: 279장(인애하신 구세주여), 366장(어두운 내 눈 밝히사)
설교: 2021111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2014년에 한 집사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 후, 집사님이 간혹 집에 찾아오는 분이 전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먼 일가 중 한 분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분이고, 간혹 찾아와서 신앙 상담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는 분이라고 합니다. 올 때마다 집사님도 반기고 고마워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별로 반기지 않습니다. 담임목사가 있는 교인을 찾아가, 신앙 상담을 하고, 도움을 주었다는 시기심이나 질투심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상담해 줄 정도로 열정도 많은 사람들 중에, 믿음의 수준과 방향이 바르지 못 한 경우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교인들은 전한 말이 옳은지, 틀린지 분간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을 거의 무방비로 듣고 받아들이다, 이단과 멸망의 길로 가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염려대로 집사님이 듣고, 제게 전해준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국을 다녀오고, 예언의 능력이 있는 어떤 여전도사가 2014년 12월에 우리나라에 엄청난 재앙이 임한다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14일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특히, 기근이 심해져서 굶어죽는 이들이 많을 테니,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외국으로 피난해야 하고, 또 가을에 양식을 충분히 준비해 놓으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다는 겁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세상의 위기와 멸망을 이용한 이단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위기론과 종말론을 들을 때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까지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피해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실제 그 여자가 쏟아낸 쓰레기 말들을 듣고, 집과 직업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피난한 신앙인들이 있었고, 그런 이들 중에는 목사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켜서, 시사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의 12월 14일이 어땠는지 기억하십니까? 당시 전쟁은 없었죠? 많은 사람이 굶어죽을 만큼 기근이 심했습니까? 곡식이나 다른 먹을 게 부족해 어려움을 겪은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는 어땠는지 잘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한 자료를 보니, KBS 2TV의 동요 프로그램인 [누가 누가 잘 하나]가 방송 60주년을 맞이한 일이 그나마 기록에 남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교묘하고 악랄한 꼬임과 거짓으로 속인 사람과, 그에 넘어간 이들 중에 누가 더 큰 피해를 입었을까요? 거짓으로 자기 배만 불린 여자는, 얼마 지나지 않고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인터넷 방송을 이용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은 꾐에 속아 해외에 나간 이들은, 그곳에서 떠돌이처럼 생활해야 했습니다. 다른 나라로 나가지 않더라도, 이에 속아 재산을 처분한 사람들의 피해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예언한다는 자의 배만 불리는 일이었고, 그 피해는 어리석은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으로 듣고 따른 이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재난과 전쟁 이야기를 듣고, 제가 집사님께 교회 역사와 거짓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고 예언한다는 이들의 말을 들을 때는 성경만이 유일한 기준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이 여전도사의 예언에 마음이 가는 까닭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전도사의 예언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틀리지 않는 예언을 하는 사람이니, 그때의 예언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현상임에도, 지금도 그렇게 많은 이들이 넘어가고, 또 앞으로도 넘어갈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의 결국이 크게 안타깝거나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예언의 능력이 있다는 사람의 말을 무조건 듣고 순종했다가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의 사정에 마음이 별로 안 가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그 동안 바른 말씀이 전해지는 교회를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많죠. 그렇게 거짓으로 교인들을 유혹하는 교회도 적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교회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지는 곳에 가면, 귀찮고, 마음이 불편하고, 재미없으니 멀리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가장하는 교회에 가면 얼마나 자극적인지 모릅니다. 매일 성령의 역사를 직접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 한 특별한 일들을 그곳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거기에만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진리의 말씀이 있다 여깁니다.
그러나 자극적이고, 눈에 보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 역사에서도, 이적만 찾고 따르는 이들은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길을 선택하지만, 말씀을 바르게 알고 듣고자 하는 이들은 구원의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 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통해 믿는 자가 구원의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음으로 간직하는 이들이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어리석은 말에 속아 넘어간 이들을 마냥 불쌍한 피해자라 말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능력자’라 하는 이들이 하는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상식에 비춰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 중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에서 볼 수 없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이를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무속인들이 말하는 운명이나 팔자대로 우리의 길이 정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 심어주신 자유의지를 언제, 어떻게, 어디에 이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모양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자유의지가 있으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그래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삶을 복되게 할 만한 길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좋은 길과 방향을 선택하면, 좋은 결과를 얻고, 나쁜 과정과 방향을 선택하면,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당장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에 속지 말고, 과정과 이후의 결과까지 보고 살피는 안목과 판단이 중요합니다.
아기들이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위험한 행동이 무엇일까요?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집어넣는 행동입니다. 모두가 이 과정을 거쳤을 텐데, 그럼에도 어른의 눈으로 보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배고파서 그런 것도 아니고, 냄새가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위험하고 해로운 것도 가리지 않고 입에 넣습니다. 아이들은 말 그대로 어리고, 그래서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좋고 나쁨을 분간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몸은 자랐지만, 신앙의 수준과 분별의 능력이 없으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눈앞에 있는 일이 좋은지, 받아들이면 안 되는 일인지 분별하지 못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된 독인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인지 분별하지 못 하고, 무작정 믿고 따릅니다. 이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한 발만 떨어져서 보면, 그 끝은 실패와 좌절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음에도, 어리석은 꼬임에 너무나 쉽게 속습니다. 피해를 입은 이들이 마냥 불쌍한 피해자로 안 보이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선택해 행함으로써 좋은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앞날이 달라진다는 점을 알면, 지금 좋은 것을 고르는 지혜를 가져야 하고, 나쁜 것들은 모양이라도 버릴 줄 아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이용하는 이들의 말을 무작정 믿고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들을 줄 알고,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말씀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라는 바 복과 평안을 얻지 못 하고, 오히려 처절한 고통과 패망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포장한 이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다 결국 철저히 망하는 압살롬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다윗이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데리고 수도인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다른 가족은 모두 함께 떠나는데, 무슨 까닭이어서인지 모르지만, 그곳에 후궁 열 명을 남겨둡니다.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할지를 묻자, 아히도벨은 다윗 왕이 남겨둔 후궁 10명과 동침하라고 권합니다. 다윗이 아내와 후궁을 많이 두었죠? 수가 얼마나 되었든지, 족보로 보면, 다윗의 후궁은 압살롬에게는 서모가 됩니다. 절대 넘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두 압니다. 레위기 20장 11절에서도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라고 말씀할 정도로 크고 무서운 죄입니다.
그럼에도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처럼 조언한 까닭이 있습니다. 먼저, 당시는 왕의 후궁을 취하는 행위가, 왕의 자리가 새로운 왕에게로 옮겨졌음을 공표하는 데 이용되곤 했습니다. 다윗 왕의 후궁들을 아들인 압살롬이 취하면, 백성들은 압살롬이 권력을 얻어 새로운 정권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압살롬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취함으로써, 아버지와 압살롬이 화해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죠? 싸움이 심해도, 금세 화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칼로 물 베기’ 식의 싸움이 부부간에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훨씬 더 강합니다. 부부간에 싸움이 심해지면, 헤어지기도 하고, 서로 해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는, 심각하게 싸워도, 금세 회복되고, 화해하지 않습니까. 웬만한 일은 참고 용서하는 부부 사이에서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훨씬 더 많이,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회복이 이루어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있습니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간격이 아무리 크고 넓은 부모와 자식 사이라도, 도저히 용서 안 되는 선들 중 하나는 바로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일입니다. 계략이 뛰어난 아히도벨은 이를 잘 알고, 다윗과 아들 압살롬이 화해하지 못 하도록, 일부러 다윗의 후궁을 범하라 압살롬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면 당사자인 압살롬은 왜 말도 안 되는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움직였겠습니까? 아버지 다윗이 자신을 서운하게 한 일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자기 아버지이고, 최고 권력자입니다. 권력욕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고, 아버지와 싸우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은 까닭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에 대한 답을 본문 23절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는 말씀처럼, 아히도벨의 계략이 언제나 뛰어나고, 또 그 계략대로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그 동안 다윗 왕 곁에서 자문관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실력과 수준이 감히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고,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에 멈추지 않고, 아버지와 영원히 등지는 행동을 저지른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실패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아히도벨이 왕이 될 수 있는 계략과 작전이라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이나 압살롬이나,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는 게 옳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히도벨은, 권력을 더 키우고,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능력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최후는 이들의 바람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자기 계략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 보고, 스스로 삶을 포기했습니다. 압살롬도 도망치다 결국 다윗 부하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사악한 계략을 제안한 아히도벨도 망하고, 이를 따르다 압살롬도 망했습니다.
압살롬의 선택과 행동, 그 결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절제로 기준을 삼지 못 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포장하면, 무작정 듣고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번도 실패하거나 틀리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뜻임을 증명하지 못 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고 바라는 일을 선택하고 행동할 만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괜찮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몇 번 맞고 이루어졌다고, 무조건 믿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르게 판단할 만한 지혜와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이 지혜를 앞세워야만, 하나님의 말씀이 살리는 말씀이 됩니다. 분별의 능력으로 확인해야만, 비로소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등불이 됩니다.
분별의 능력을 잊고, 성공을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다 실패하고 멸망한 아히도벨과 압살롬의 모습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악한 것은 철저히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