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9)하나님이 바라시는 용서와 화해(삼하 19장 8-15절)
하나님이 바라시는 용서와 화해
성경: 사무엘하 19장 8-15절(구 495쪽)
찬송: 438장(내 영혼이 은총 입어), 420장(너 성결키 위해)
설교: 2021082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약 2주 전에 한 언론사가 전에 정치인으로 활동한 분과의 인터뷰를 기사로 올렸습니다. 나이 때문에 은퇴했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이기도 하고, 정치인으로서 경력도 화려합니다. 당을 옮기긴 했지만, 대통령 인수위원회를 맡기도 했고, 국가정보원 초대 원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은퇴했지만, 이전에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분들의 생각과 의견을 통해 유익을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험과 연륜이 쌓일수록 시야가 넓고, 그래서 이후 세대들이 알 수 없거나 놓치는 부분에 좋은 조언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인터뷰에서 이분은 통합과 화합을 강조하면서, 한 대선후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관용의 정치를 하라고 강조했다. 보복의 정치라는 악순환을 멈춰야 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아주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 민주화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보복이 반복됐다.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지 보복을 위해 이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는 일은 이제 정말 끝내야 한다.”
전직 대통령이 재판을 받고, 옥에 갇히는 일은 절대 좋은 일은 아니죠. 대통령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이기에, 전직 대통령이 옥에 갇히는 일은 분명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으니,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도 이해되고, 또 국민 화합을 위해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듣고, 흔히 ‘정치 원로’라는 사람의 수준에 실망했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안목과 지혜의 폭이 넓어진다는 말들을 하죠. 게다가 여러 기관에서 많이 활동한 정치인이라면, 대단한 철학과 능력과 안목을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인터뷰를 읽고, 수십 년 동안 정치계에서 활동하고, 많은 일을 경험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날 만큼 연륜이 쌓인 사람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사실에 실망을 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 원로의 주장대로라면, 대통령이 되면, 무슨 불법과 악행을 저질러도 재판도 안 받고, 무조건 용납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 아니고, 법에 따릅니다. 대통령은 법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법 아래에 있습니다. 법을 어겨도 되는 자리가 아니라, 더더욱 법을 잘 지키고, 불법과 부정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자리입니다. 대통령이기 때문에,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민주주의와 헌법을 부정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전직 대통령이 수감된 이유에 대한 생각도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현재 권력자인 대통령이나 여당의 보복 때문이 아니라, 재임 기간에 저지른 부정과 불법 때문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인정되었기 때문에, 법으로 규정한 대로 감옥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자리에 있던 사람이 수감되는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면, 적법한 재판과 처벌 과정을 ‘정치적 보복’이라고 부르지 말고,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살펴볼 내용인데, 화합을 위한 판단 역시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화합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용서와 화합을 정말 많이 말씀하십니다. 친히 알려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우리 역시,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와 화합 이전에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철저한 사과와 반성과 회개입니다. 용서와 화합 이전에 이 과정이 없으면, 야합이 되고, 불법과 부정을 묵과하고, 암묵적으로 찬성한 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런 경우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악행은,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지독했습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빼앗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죠. 그런데 일본처럼, 그 나라 말과 이름까지 없애려고 한 민족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침략해 빼앗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사용한 말과 이름까지 사용하지 못 하게 만드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1945년이 되어, 일본이 항복해서 우리가 해방을 이루었는데, 그때부터 친일 세력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용서하고 화합하자고 말합니다. 가해자인 일본은 참회하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우리는 용서하자고 말합니다. 가해자는 여전히 뻔뻔하게 행동하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용서와 화해를 구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상하고 기형적인 용서와 화합을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언제나 죄와 잘못을 저지른 이의 철저한 사죄와 회개를 조건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기준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다윗이 반역에 가담하거나, 방관했던 백성들을 용서하기 위해 벌이는 지혜로운 행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성읍을 떠났던 다윗은 결국 압살롬을 무찔렀고, 반역 세력은 모두 도망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자기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지만, 왕위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가면 되면 됩니다. 우리가 며칠 집을 떠나 있으면,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적지 않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다윗은 반란 때문에 떠나야 했으니, 이후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또 그만큼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크고 간절했겠죠? 한순간이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있게 되는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반역에 합류한 이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15장 12,13절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는 표현을 보면, 다윗 쪽보다 압살롬 쪽으로 간 백성들이 더 많았습니다. 반역을 주도한 압살롬은 죽었지만, 반역에 함께한 이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들을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고 어렵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윗 자신과 민족 전체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반역 세력이 모두 물러났음에도, 다윗은 곧 바로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를 해결하는데, 그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다윗의 됨됨이가 아무리 대단해도, 다윗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동안 자기 말 한 마디에 죽는 시늉까지 하던 이들이, 한 순간에 자신을 향해 칼과 창을 들이대며, 협박했으니, 배신감에 치를 떨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처리하고픈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복수할 여건이 갖춰졌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를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압살롬 편에 선 이들에게 기회를 줍니다. 자기들 스스로 반성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이 내용이 오늘 본문 9-10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이라는 표현을 보면, 반역에 가담한 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어, 반역에 실패하자, 그에 가담한 이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다윗을 다시 왕으로 섬기기로 결정합니다.
반역에 가담한 이들이 반성하고, 다윗을 다시 왕으로 인정하기로 다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11절에서는 부하들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이들은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반역에 맞서지도 않은 이들입니다. 만약,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끝까지 충성했다면, 다윗이 피난할 때도 따라갔겠죠? 하지만 다윗이 사람을 보내 설득한 과정을 보면, 반역이 일어나고, 다윗이 피난하자, 상황을 방관하던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싸움 결과가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해야 자기들에게 유리할지 장담할 수 없으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유다’는 다윗의 출신 족속입니다.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기반이었습니다. 다른 족속은 자기 이익에 따라, 반역에 가담하거나 방관하더라도, 최소한 다윗을 배출한 유다 족속만은 끝까지 지키고 함께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유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과 불익을 계산하고, 다윗을 지지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다윗이 반역 세력을 무찔렀으니, 상황이 더 곤란해졌습니다. 다윗의 승리로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그 동안 자신들의 행적을 생각하지 않고, 다윗을 찾아가는 일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성읍으로 돌아올 왕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은 이를 잘 알았습니다. 한 편으로는, 집안사람들이면서도, 막상 자신이 곤란한 지경에 처하자, 모른 척 방관한 이들이 밉고 싫겠지만, 이들에게 다시 기회를 줍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반역에 가담한 이들이 회개하고 돌아섰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심지어는 13절에서는 아마사에게 기회를 줍니다. 아마사는,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면서, 군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다윗 자신에게 직접 칼을 들고, 백성들에게 자신을 가장 먼저 죽이도록 명령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본문 13절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면서, 아마사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아마사를 아예 자기의 군 지휘관으로 삼습니다.
다윗이 당장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복잡하고 귀찮고 불편한 일을 처리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신 길이기 때문이고, 반역으로 인해 생긴 갈등과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역에 가담한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거나 처벌하면 되지만, 희생이 너무 커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민족끼리 싸워 죽이고 해친 일도 너무 큰 고통인데, 이후에 반역에 가담한 이들을 모두 처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와 고통은 더 커지고 계속됩니다. 그렇다고 슬픔과 고통을 피하려는 판단에, 반역에 가담한 이들의 죄와 용서를 받지도 않고 용서하고 지나치면 어떻게 될까요? 점차 반역과 사람 해치는 일을 쉽게 여기게 됩니다. 비극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칩니다. 가해자와 범죄자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죄의 크기와 종류를 따지지 않고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지혜와 방법이 필요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는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7장:22)는 말씀처럼 용서의 폭을 넓혀가야 합니다. 용서의 폭이 믿음의 크기와 너비를 반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용서의 조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몇 번을 용서할지를 묻고, 예수님은 끝없이 용서하라고 답하셨습니다만, 이 말씀 바로 앞에서 죄를 범한 이를 처리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는 회개와 반성을 권고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두세 사람이 가서 권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를 통해 권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여기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7장 4절에서는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회개와 반성의 기미조차 안 보이는데, 피해를 입은 쪽이 먼저 나서서 용서를 말하는 이상한 형태를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이는 용서가 아니라, 부정과 불법과 범죄를 방관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반성과 회개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들을, 피해자가 먼저 나서서 용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정과 범죄를 쉽게 생각합니다.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모두 용서한다고 하면, 죄를 짓는 사람들도, 이를 지켜보는 이들도 죄와 부정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책망도 안 듣는데, 누가 죄와 부정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이런 분위기가 되풀이되면, 부정과 불법과 범죄가 더 확장됩니다. 공의와 정의가 가득해야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반역 세력에 가담하고, 자신을 위협한 이들에게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주고, 기다려 준 다윗이 지혜롭고, 인정을 받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하고 연약한데, 죄의 유혹은 너무 크고 강합니다. 죄와 부정에서 멀어져야 하지만, 연약함 때문에 죄를 범할 수도 있고, 이웃의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지혜롭게 선택하고 행함으로써 모범을 보여준 다윗처럼, 죄악의 세력이 점차 줄어들고 하나님의 나라와 방식이 더욱 확장되도록 우리 모두도 힘써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