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1212)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삼하 24장 18-25절)

청명하늘 2021. 12. 12. 14:04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 사무엘하 2418-25(507)

찬송: 453(예수 더 알기 원하네), 380(나의 생명 되신 주)

설교: 2021121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전염병이 너무 지겹고 힘들 만큼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염병 이야기가 처음 나올 때가 201912월경이었고, 여러 방침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한 때가 작년 초반이었습니다. 전염병이 생활을 흔들리게 한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갑니다.

 

생활 속에서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피해가 어느 한 곳 제외되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는 변화와 고통이 덜하다 할 만큼, 전세계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예배할 수 있는 인원이 규모에 따라 제한되기도 했습니다. 더 심각할 때는, 전쟁 중에도 쉬지 않았다고 하는 예배가 중지되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 예배드릴 수 없어서, 영상으로나마 예배하는 교회는 그나마 형편이 좋을 정도입니다. 우리처럼 시골에 있고, 연세 많은 분들이 있는 교회는 영상을 통한 예배도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이, 영상을 통해 예배드리자고 말합니다만, 일상이 회복되면, 당연히 현장에서 예배드리도록 권유합니다. 하지만, 전염병을 극복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끝난다 하더라도, 영상을 통해 예배하는 교인들이 점차 많아질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 동안 인류가 걸어온 방향을 보면, 언제나 더 쉽고, 간단한 길을 선택합니다. 예배에서도 당연히 복잡하고, 어려운 순서가 점차 줄었고, 더 쉽고, 간단한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신앙생활이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만, 이제는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영상을 통한 예배가 어쩔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시작되었지만, 앞으로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흔한 모습으로 드러날 듯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겉과 형식보다는 마음과 중심을 보십니다. 현장에 나왔다고 해서, 모두 받아들이시지도 않고, 영상을 통해 드린 예배라고 해서 싫어하시지도 않습니다. 현장 예배든, 영상을 통한 예배든, 요한복음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말씀처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그렇다면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나 전혀 차이가 없을까요? 두 가지 형식 모두 장단점이 분명 있습니다. 현장 예배의 장점이 영상을 통한 예배의 단점이기도 하고, 현장 예배의 단점이 영상 예배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영상을 통해 예배드린다고 하면, 헌금액이 줄어들고, 교회 운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염려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로는, 이 문제는 그리 큰 문제 같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송금할 수 있는 수단이 크게 발달되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몇 초 안에 송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로 믿고 드리는 신앙인이라면, 교회에 가서 드리든, 계좌이체를 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상을 통해 예배한다면, 교회까지 오가는 시간과 경비와 수고를 줄일 수 있습니다. 시골은 좀 다르지만, 요즘 웬만한 규모의 교회는 대부분 주차 문제를 심각하게 겪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쏟아내는 가장 큰 질타 중 하나가 불법 주차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주차할 곳은 없으니, ‘예배중이라는 문구를 써놓고, 아무 곳이나 주차해 놓고, 예배하러 갑니다. 또 예배 중이라며, 전화조차 받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지만, 피해를 겪는 이들의 입장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보면, 영상을 통한 예배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하면, 차를 가지고 교회에 모여들지 않아도 되고, 불법 주차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오가는 시간과 경비도 크게 줄어듭니다. 동네 주민으로 이루어진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는 이런 어려움이 작습니다. 하지만 매주 멀리 있는 교회를 찾아 오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 가까운 곳의 교회 장로님 가족은, 매주 토요일에 서울에서 네 가족이 옵니다. 주일 오후까지 여러 가지로 봉사한 후, 늦게 상경합니다. 매주 오가는 데 드는 시간과 경비가 얼마나 많고 크겠습니까?

 

영상으로 예배한다면, 이런 시간과 경비를 모두 아낄 수 있습니다. 먼 거리를 오가는 분들만이 아니라, 도시 내에서도 교회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과 과정과 노력, 또 오가며 드는 시간과 경비마저 모두 아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장점이 많으니, 모든 예배와 교육을 영상으로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예배와 교육은 영상으로 하고, 헌금은 계좌로 이체하고, 예배와 행사를 진행하는 데 꼭 필요한 인원만 교회에서 일하면 어떨까요?

 

영상을 통한 예배와 신앙생활이 이처럼 쉽고, 간단하고, 편하지만, 그러나 이런 장점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가치와 의미를 상당수 잃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그 동안 쉽고 간편해지는 쪽으로 변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간도 점차 짧아지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예배의 순서가 복잡하고, 다양하고,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져야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칫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모양과 형식만 갖추게 될 위험은 적지 않습니다.

 

요즘 예배는 대부분 1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특히 도시에 있는 큰 교회들은, 몇 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가 끝나고, 다음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에는, 크게 혼잡스럽습니다. 몇 분 늦으면, 특히 혼란이 커집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1시간 내에 모든 순서를 마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 각자 미리 시간을 정해 놓고 예배하러 옵니다. 예배가 1시간 안에 끝나지 않고, 몇 분 지체되면, 각자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 조급해 하고, 불평하고, 항의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예배하러 오긴 하는데, 예배가 가장 큰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순서에 불과합니다. 예배를 삶의 큰 기둥과 기준으로 여기지 않고, 곁가지들 중 하나로 여깁니다.

 

또 예배 순서가 점차 간결해졌습니다. 약속된 시간 내에 마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고, 혹은 여러 복잡한 과정과 순서가 귀찮게 여겨져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꼭 필요한 순서라 하더라도, 순서를 바꾸거나, 새로 넣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미가, 1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 있는 정도로 여겨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치 연극을 보듯 순서를 지켜보고, 연설을 듣듯, 설교를 듣고 평가하는 정도를 예배로 여깁니다. 여기에서 나온 표현 중 하나가 예배를 드린다가 아니라, “예배를 본다는 말입니다. 예배자로서 예배에 참여하고, 듣고, 담는 게 아니라, 예배를 지켜보고, 판단합니다.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가 이런데, 영상을 통해 예배를 드리면 어떨까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집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리기에 좋은 교회에서마저 이렇게 예배를 보는 사람이 되었는데, 하물며 여러 가지 마음을 빼앗길 것투성이인 집에서는 어떻겠습니까? 현장에서 예배할 때마저도 예배를 구경하는 사람, 찬양대의 음악을 듣고 평가하는 사람이,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가 심해집니다. 몇 번은 집중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갈수록 마음이 느슨해지고, 갈수록 다른 여러 가지로 마음을 빼앗깁니다. 나중엔 드라마와 연극을 보듯, 예배의 화면만 보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몸과 시간만 함께하는 정도를 예배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몸과 시간은 물론, 거기에 예배자의 헌신과 수고와 정성과 뜻이 모두 함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수고와 헌신과 정성을 지켜보고, 평가하고, 듣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이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는 우리가 수고하고, 낮아지고 헌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 본문 속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이를 받아들인 다윗의 행동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윗은 자기 업적을 내세우고 싶은 마음과, 군사력이 최고의 힘이라는 착각 때문에, 인구조사를 명령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정없이 징벌하지 않으심을 믿고, 3일 동안 전염병을 선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이 자랑하려 했던 백성이 7만 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저지른 교만의 씨앗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죽었습니다.

 

재앙이 끝나고, 갓 선지자 다윗에게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보면, 예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제단을 쌓으라 하지 않고, 장소를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특정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의 말대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아라우나는 왕이 예고도 없이 자기 타작 마당을 향해 오는 모습을 보고, 급히 맞이하고, 이유를 듣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말을 듣고, 자기 소유를 바칠 테니, 자유롭게 이용하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라우나의 의견을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돈을 지불해 땅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갓 선지자는 왜 다윗에게 단순히 제사를 드리라 하지 않고, 장소를 정해 주었을까요? 제사만 드리라 했으면, 다윗은 아마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궁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었겠죠? 쉽고 간단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사를 드리는 장소를 정해준 이유입니다.

 

지금 다윗은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권력과 권위가 가장 큽니다. 다윗의 말 한 마디에 모든 백성들이 따릅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의 명령이 옳아야만 따르는 게 아닙니다. 부당한 명령이어도 따라야 합니다. 왕의 권력과 권위가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이유, 왕인 다윗에게 장소마저 정해주고 제사를 드리도록 한 이유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왕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순종해야 하는 자리에 불과합니다. 다른 백성들에게는 명령하고, 시키는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듣고, 따르는 수준에 불과함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라우나가 자기 땅과 소와 땔감을 바칠 테니, 자유롭게 이용하라 하는데도, 다윗은 자기 돈으로 구입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헌신과 수고를 명령하고, 자기는 지켜보는 수준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로 드려지는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마음을 가장 먼저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몸과 시간만 드리는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설교와 찬양과 순서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고, 예배를 보는 정도에 머물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예배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고, 계속될수록 신앙생활의 모양과 형식도 이상해지고, 결국 신앙의 수준과 내용마저 잃게 됩니다.

 

큰 틀에서 보면, 예배하는 순서와 내용이 매주 비슷하죠. 매주 회개하라고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합니다. 크게 보면 이렇게 하십시오그렇게 하지 마십시오로 나뉩니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소망을 줄 때도 있지만, 오히려 불편하고, 잔소리처럼 들릴 때가 더 많습니다. ‘훨씬 더많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와 가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교인들에게 불편하고, 부담을 주는 설교가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위로와 평안을 약속하는 설교가 맞다고 합니다. 위로와 평안과 치유를 설교하는 교회들에 교인들이 몰립니다.

 

그러나 다윗이 직접 제사의 순서와 작업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 것처럼, 예배하는 우리의 부담과 귀찮음과 수고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자기 권위를 내세워, 제단을 쌓도록 명령하고,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는지만 지켜보는 명령자, 관찰자는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편함과 위로와 평안을 위해, 예배의 순서 속에 몸과 시간만 함께할 뿐, 부담되는 말씀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외면하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한 때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책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책만이 아니라, 제목이 마치 격언처럼 쓰이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동의가 안 되는 말인데, 이를 빗대어 예배를 말한다면, “부담이 되어야 예배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고해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배 속에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수고와 헌신과 노력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 권위를 인정하였기에, 제사할 자리를 향했고, 제물과 자리마저 자기가 직접 준비했습니다. 제사를 준비하라 명령하지 않았고, 제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평가하거나 관찰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확인받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오늘 본문 속 다윗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님의 권위 위에 서지 말고, 생활과 예배 속에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복과 평안을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