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20123)복과 생명이 보장된 길(왕상 2장 26-35절)

청명하늘 2022. 1. 23. 14:16

복과 생명이 보장된 길

 

성경: 열왕기상 226-27(513)

찬송: 390(예수가 거느리시니), 521(구원으로 인도하는)

설교: 2022012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한 가지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죠. 예전에 중고등학생들을 담당할 때, 한 학생이 제게 신앙생활이란 취미생활처럼, ‘생활앞에 한 가지가 덧붙여진 정도가 아닌가요?”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죠. 생활에 중심을 두면, 취미와 조금 다른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신앙에 있다면 전혀 다릅니다. 믿음에 중심을 두고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아주 힘들고 어렵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예수님께서 직접 마태복음 7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위를 봐도 그렇죠. 우리나라만 봐도 쉽게 확인됩니다. 기독교인보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믿음을 중심으로 삶을 세워가는 과정이 쉽고, 편하고, 좋으면, 반대 모습이 보여야겠죠. 뿐만 아닙니다.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까지 확장시키면, 믿음으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은데, 그 중에서도 아주 많은 수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이르지 못 한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그만큼 믿음으로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 과정이 왜 어려울까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과 연결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이를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길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삶의 방향과 내용이 정해져 있고,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보시고, 복도 주시고, 구원과 영생까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셋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죠. , 구원, 영생을 그 어느 하나라도 싫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끝까지 붙잡고 사는 경우가 적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삶에 드러나고 이루어지기까지 긴 기다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고, 이루어진다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믿기만 하면, 죄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다는 약속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진다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에 따라 한참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질서와 시간을 거스르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기적처럼 빨리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의 기대와 계산보다 더 오래 걸리고,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복을 주시고, 약속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믿고,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이유인, 삶의 모든 과정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믿음을 갖지 못 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운명, 팔자, 숙명은 모두 삶의 방향과 내용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어차피 과정과 결과가 정해져 있는데, 하나님을 믿고, 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어차피 이리 해도 정해진 길을 따라 걸어야 하고, 저리 해도 정해진 결과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믿음과 구원과 영생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 속에서는, 왕에 오른 솔로몬이 아비아달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고 추방하는 내용을 통해 배울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27절 뒷부분에서 근본적인 이유가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 엘리 제사장 가문이 저지른 악행과 저주가 나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이, 판사의 역할을 하는 사사들이 이끌었습니다. 엘리라는 사람이 사사로서 또 제사장으로서 있었습니다. 엘리는 큰 죄가 없었지만, 뒤를 이어 제사장으로 일하는 두 아들이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고기를, 자기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먹었습니다. 제사가 끝난 후 먹을 수 있음에도, 삶는 중에 먹었고, 생고기로 먹기도 했습니다. 이는 식사 방법이나 순서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했다는 큰 죄악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들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이용해, 회막 문에서 심부름 하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가장 깨끗하게, 또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이 제사를 절차대로 드리도록 이끌어야 함에도, 엘리의 두 아들은 자기들이 먼저 앞장서 죄악을 행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들의 악행을 듣고 꾸짖었음에도, 이미 마음이 너무 악해져서, 더 이상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 가문에 내릴 저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사무엘상 227-3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특히 30,31절에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의 악행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저주가 임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약속이 오늘 본문 27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2장에서 선언된 저주가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확한 시간을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비아달은 엘리 제사장의 4대 후손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아비아달의 고조 할아버지가 됩니다. 대략 100년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보다 훨씬 더 많은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시야는 언제나 짧고 좁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약속은 길고 넓습니다.

 

이 둘 사이를 어떻게 메워가느냐에 따라 입장이 크게 달라집니다. 이 간극을 믿음으로 메우며 기다리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면, 이를 기다릴 수 없다며, 성급하게 판단하고, 일찍 포기하는 과정이 불신이고,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에 저주를 말씀하셨으면, 우리의 판단으로는, 그 자리에서 가문이 한순간에 망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고, 이를 확인하며 사는 과정이 믿음이라 여깁니다.

 

저주를 내리신다는 그 순간이나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엘리 가문이 폭삭 망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모두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이는 목에 칼을 들고 협박하는 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고문으로 자수한 범행은 법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고문 때문에 거짓으로 인정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여러 기적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게 만드실 수 있지만, 협박을 이용해 하나님을 믿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을 향한 특별한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한 길만 만들어 놓고, 그곳에 들어가도록 채찍질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도 역시 하나님을 특별히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억지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내용은,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바뀌고 변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때문에, 가문에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크게 유행하고, 인기를 끌었던 가계 저주론의 주장대로라면, 이제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 가문엔 모두가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든 저주가 그 가문에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직에서 파면당하고, 쫓겨난 아비아달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아비아달이 가문에 흐르는 저주 때문에 제사장에서 파면당했습니까?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쫓아낸 이유가, 사무엘상 2장에 기록된 엘리 가문에 대한 저주 때문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쫓아낸 이유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아비아달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 때문입니다.

 

엘리 가문에 저주가 선포되었음에도, 그 가문은 계속 제사장직을 맡아 일했습니다. 아비아달도 엘리의 4대 후손으로서 제사장직을 맡았고, 그 아들인 아히멜렉 역시 제사장으로 일했습니다. 그것도 당시 왕이던 다윗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할 정도였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도, 다윗이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할 때, 목숨을 걸고, 중간에서 정보를 전해주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충성하고, 공이 큰 아비아달이지만, 그럼에도 솔로몬으로부터 쫓겨난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이복형인 아도니야가 반역을 일으키고, 여러 세력들을 모을 때, 아비아달도 역시 반란 세력에 합류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다윗을 지키고, 함께했던 아비아달이 반란 세력에 합류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솔로몬이 왕에 올랐습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에서 쫓겨난 이유입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만약 아비아달이 반란 세력의 유혹을 물리치고, 끝까지 다윗에게 충성했다면 어땠을까요? 끝까지 다윗의 명령을 기다리며, 순종했다면 어땠겠습니까?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길 때도, 압살롬의 칼을 피해 도망할 때도, 목숨을 걸고 다윗을 지킨 아비아달에게는 다윗의 뜻을 기다리는 일은 절대 어렵지 않았습니다. 만약 다윗의 뜻에 순종하겠다며, 반란 세력을 거부했다면, 아비아달은 그 누구보다 훨씬 큰 보상을 받고,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비아달은 이상할 정도로, 그 동안 지켜온 믿음과 지조를 버리고 돌아섰습니다. 정의와 순종의 삶을 버리고, 잠깐의 명예욕에 눈이 멀어 악의 세력에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에서 쫓겨나고, 비참하게 살게 된 이유는, 가문에 내린 저주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성경에서는, 엘리 집에 내린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향해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푸시고,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욕심에 눈이 멀어 악을 선택하며 살면,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외면하시고,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지 않으십니다.

 

아비아달의 가문과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평안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진리로 믿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당장 눈앞에 그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조차,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계산처럼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훨씬 더 많은 기다림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어긋나거나 틀리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엘리 집안에 내린 저주가 후손에게 드러나기까지는 100년정도가 필요했습니다. 때로는 이보다 훨씬 긴 기다림도 많습니다. 어떤 약속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보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고, 복과 은혜와 평안을 받을 길을 따라 기다리며 사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복 받을 만한 길을 선택하며,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면, 그 기다림의 끝에는 복과 은혜와 생명입니다. 그 열매를 내가 당장 받을 수도 있고, 몇 대에 걸쳐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복과 은혜와 생명이 보장되었고, 기대할 수 있다면, 이 또한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의 삶은, 누구의 주장처럼, 이미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가문에 흐르는 저주가 있을 수 없고, 가문에 무조건 복이 보장되지도 않았습니다.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복을 받을 만한 집안과 형편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이도,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져, 잘못된 길에 따라 살면, 결국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그래서 저주와 실패만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뒤를 이어 살아갈 후손들이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받으며 살 수 있는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와 후손들이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외면과 버림을 당할 위험도 역시 우리 앞에 있습니다. 지혜롭게 인내와 믿음과 소망을 심으면, 복과 구원을 얻습니다. 어리석게 기다리지 못 하고, 악의 유혹에 넘어가 불순종과 불신을 심으면, 저주와 멸망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 속 아비아달의 선택과 그 결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나 복과 은혜와 생명이 보장된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며 기다림으로써, 날마다 복과 구원의 열매를 얻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