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0)기도와 예배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왕상 6장 11-13절)
기도와 예배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성경: 열왕기상 6장 11-13절(구 519쪽)
찬송: 380장(나의 생명 되신 주), 312장(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설교: 2022032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전염병의 위협과 고통이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상을 넘어 신앙생활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지 어느덧 2년이 되었습니다. 2년이나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는데,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확진자가 하루에 수십 만 명이 생기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불편함과 고통은 점차 커지고, 더불어 정부를 향한 불만과 불평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염병이 이처럼 더욱 확산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부가 방역과 규제를 포기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들의 마음이 느슨해지고, 여러 방침을 어기기 때문일까요? 정부와 관계 당국에서는, 여러 방침을 내놓습니다만, 국민들 스스로, 힘들다고, 먹고 살아야 한다고, 거의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염병에 걸려도 좋으니, 먹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며 항의합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지도 않고, 남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 하게 하고, 예배 인원을 제한할 때, 온갖 비난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예배당은 공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또 입을 벌려 찬양하고, 들어오면 1시간 넘게 머물기 때문에, 전염 위험성이 아주 높습니다. 실제 교회를 통해 전염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 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부를 향해 거세게 항의를 넘어 비난했습니다. 당시 교회와 목회자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 ‘전쟁 중에도 쉬지 않았던 예배’였습니다. “목숨 걸고 교회와 예배를 지켜야 한다”는 말도 함께 했습니다.
이제는 지난 2년을 돌아봐야 합니다. 언제, 어떤 모양일지 모르지만,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 지난 2년의 경험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고통과 시간의 크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지난 경험을 지혜롭게 판단하고, 앞날을 잘 준비하면, 지금과 같은 어려움이 오더라도 고통의 크기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 하면, 고통의 시간은 더욱 길어지고, 어려집니다.
교회와 신앙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전염병이 훑고 지나간 2년 동안, 교회와 각 신앙인들이 잘못 판단하고, 행동한 일이 없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수와 어려움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고, 기대와 소망을 계속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교회와 목회자 신앙인들의 반응들을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기보다는,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불평과 불만만 쏟아냅니다. 다시 비슷한 상황이 오면, 목숨 걸고 교회를 열고, 예배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약 15년 전에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기독교 서적이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제목 하나만으로도 책 내용이 짐작됩니다. 이 책의 영향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똑같은 제목의 설교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졌습니다.
책의 큰 제목들 몇 가지를 보면, ‘예배하는 자리를 단 하나의 목숨처럼 사모하라’면서, 예배는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고 합니다. ‘그 어떤 핑계도 주일예배를 대신하지 않는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를 드리라 합니다. ‘예배는 인생에서 가장 큰 사명이고, 복의 통로다’며 예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이고, 이를 잘 드리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예배만으로 충분하다’는 말로, 예배 하나가 삶과 복의 영역을 결정하는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책과 설교들의 내용처럼, 예배가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합니까? 예배가 하나뿐인 목숨을 바칠 만큼 가치가 클까요? 예배가 최대와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과 협박이 될 때조차도, 예배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까? 바꿔 보면, 생명과 복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세상 그 무엇보다 예배를 원하실까요? 예배 하나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와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480년 된 해, 그리고 솔로몬이 왕으로 오른 지 4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한다는 내용, 그리고 성전의 규모와 구조 등이 기록되었습니다. 또 오늘 본문 뒤에는 성전 내부 장식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대략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빼놓으면, 성전의 모양과 구조 내부 장식 등을 이어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모양과 규모에 대한 말씀을 이어 기록하다가, 중간에 오늘 본문 말씀을 포함시켰습니다. 내용도 전혀 다릅니다. 11절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라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직접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12절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라는 내용을 보면, 성전 건축 중인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건축이 진행되고 있을 때 주신 말씀이니, 지금까지 진행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아니면 어디를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어야 합니다. 남은 과정에서 무엇을 중점으로 하고, 기일을 어느 날로 정할지에 대한 말씀이어야 흐름상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성전 건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건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도 아니고, 성전 건축을 어떻게 마무리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 과정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알려 주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을 통해 약속하신 바처럼, 복과 은혜를 누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히 보호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은혜와 사랑을 모두 받을 수 있는 방법은 12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지켜 행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본문 앞 열왕기상 3장 14절에서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소원으로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지혜와 부귀와 영광까지 약속하시며 함께 주신 말씀입니다.
일천번제를 드린 후, 또 오늘 본문에서 성전 건축 중인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솔로몬이 엉뚱한 일을 저지르거나, 혹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이 말씀을 주셨다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천번제를 드리고, 성전을 건축 중에 이처럼 말씀하셨으니, 그 뜻은 전혀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번제와 성전 자체는 수단에 불과할 뿐, 절대로 목표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만약, 번제와 성전 건축 자체가 목표와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솔로몬은 이미, 우리로서는 감히 드릴 수 없을 수준과 제물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또 그 동안 이스라엘 땅에 단 한 번도 지어지지 않았던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제사와 성전 자체가 최종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복과 은혜와 평강만을 말씀하셔야 옳습니다. “네가 최고의 제물로 일천 번이나 제사를 바쳤으니, 네가 복을 받고, 장수하고, 온갖 복을 누리며 살게 하겠다”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또 “네가 그 동안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성전을 짓고 있으니, 너에게 온갖 복을 주겠다”고 하셔야 옳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도 그렇고, 3장에서도 그렇고, 하나님께서는 복과 은혜를 약속하시면서, 조건을 함께 주셨습니다.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면”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이라는 조건들입니다. 바꿔 보면, 이 조건에 맞지 않으면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아무리 많이 드리고, 또 성전을 아무리 멋지고, 화려하고, 웅장하게 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 약속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지금의 기도나 예배로 볼 수 있습니다. 성전 건축은 신앙생활이나 헌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 두 가지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도 특별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만한 믿음이었고, 그런 헌신과 각오로 나라를 세워갔습니다.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자체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복을 주시거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 자체만으로 기뻐하지도 않으셨고, 복을 준다 약속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믿음을 기초로 삶을 세워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이와 마찬가집니다. 기도와 예배와 헌신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주인 삼아,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며, 삶으로 풀어가는 이들을 칭찬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예배를 많이 드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답으로 삼고, 그 말씀에 따라 삶으로 채워가는 이를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제사와 성전 건축이 최종 목표였다면, 일천번제를 드린 후 3장 14절 말씀이 없어야 하고, 성전을 건축 중에 주신 오늘 본문 12,13절 말씀이 빠져야 합니다. 제사와 성전 건축이 최종 목표이고, 솔로몬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지키고,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이 아닙니다.
초중고등학교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죠. 큰 차이점들 중 하나는, 학교 출석을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전엔 초중고학교에서 개근상과 정근상이 가장 귀하고 좋은 상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학교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상만 받으면, 성실함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웬만해서는 학교에 가려고 애썼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조퇴를 하지 않으려 했고, 결석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단순히 학교에 등교하고, 학교 수업을 많이 듣는 일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학교 아닌 곳에서, 듣고 배워, 지혜를 쌓아가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하고 좋다고 봅니다. 등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양한 방면에서 듣고 배우라 장려합니다. 그래서 수업일수도 많이 줄었고, 방법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해졌습니다. 학교에서 수업하는 시간 자체는 줄었지만, 그럼에도 교육 수준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고, 예배와 헌신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와 예배와 교회생활에 목숨 걸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에 따라 달리 보시지 않습니다. 예배를 몇 번 참석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느냐 여부로 자녀를 달리 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와 예배에 목숨 거는 사람에게 복 주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배와 기도의 시간을 늘리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말씀에 따라 삶을 채워가는 폭을 넓히고, 길을 늘려가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목숨 걸 만한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목숨 걸 만한 가치는, 기도와 예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생명의 길로 여기고, 그대로 살고자 애쓰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목표로 삼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아끼시고, 사랑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은 여전히 수단과 방법을 목표와 목적으로 삼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예배에 자주 참석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많이 하고, 예배는 수없이 드리면서도, 여전히 세상으로부터는 손가락질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위기인 줄 모르고, 고치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일천번제를 가르치면서도,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장수의 복을 받는 조건을 내거셨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전 건축처럼, 헌신과 수고와 종교생활이 복 받는다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 중인 솔로몬에게 여러 조건을 채워야만 복 받는다고 하신 말씀을 외면합니다. 의도인지 단순한 실수인지 자신들만이 알겠지만, 이런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 하나님만이 복 주시는 분임을 인정한다면, 기도와 예배와 헌신에 목숨 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주신 약속과 생명을 목표로 삼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길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하고 애쓴 모든 과정이 헛되이 되지 않고,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앞날이 기대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살아야만 복을 받을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성전 건축 중일 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복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우리의 목표이자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에 목숨을 걸어야만, 우리의 앞날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와 평안으로 채워집니다. 솔로몬에게 주신 약속이 우리에게 같은 약속이 되고, 솔로몬에게 베푸신 모든 복과 은혜가 우리 삶에도 똑같이 내리게 됩니다.
일천번제를 드리는 일보다, 일천번제를 드릴 만한 믿음을 갖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기보다,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 삶을 만들어 감으로써, 하나님이 친히 약속하신 은혜와 사랑과 복과 평안을 각자의 삶속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