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정이 먼저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18장 6-16절(구 439쪽)
찬송: 335장(크고 놀라운 평화가; 통), 212장(겸손히 주를 섬길 때; 통347)
설교: 2020011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며칠 전에,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녹음된 게 공개되어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정확히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때문은 아니고, 병원장과 의사 사이에 있었던 욕설 때문입니다. 보통 ‘의사’라고 하면, 되기는 어렵지만, 일단 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죠? 그런데 의사가 쌍욕을 먹는다는 것은 충격일 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일입니다.
물론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라,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혹독한 과정을 거칩니다. 실수하지 않도록 철저해야 하고, 또 그래서 의대 학생들이 욕설을 듣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심한 욕설을 들은 사람은, 어리지도 않고, 배우는 과정에 있는 의사도 아닙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고, 또 유능한 의사로서 이름난 분입니다. 언젠가 설교에서 영상으로 소개해 드린 의사입니다.
기억 못 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사고로 중상을 당한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아주대병원에서 일하는 분입니다. 그때 말씀드렸던 분의 사연은, 말기암 때문에 시한부 삶을 사는 분이 아내와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났다가 교통사고가 크게 났습니다. 일부 장기는 괴사해서 잘라내야 하고, 수술해도 살 수 있는 확률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말기암이라 수술이 잘 돼서 살 수 있어도, 길어도 몇 개월 못 사는 분이었습니다.
이 경우처럼, 웬만한 병원에서는 수술할 수 없을 만큼 중상자들을 전문적으로 수술하는 의사입니다. 수많은 의사가 있겠지만, 가장 잘 알려진 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잘 알려져 있고, 능력도 있는 분이 병원장과 의료원장에게 쌍욕을 먹는 게 충격이기도 하고 이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까닭을 예상할 수 있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잠깐 들어볼까요?(MBC 뉴스 보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는 내용입니다만, 저의 관심을 끈 대목은 뉴스 제목처럼 “우린 조연이나 하라고?”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나온 과정이 이렇습니다.
위급 중상환자를 이송하기 위해서 전용 헬기를 취항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워낙 고가이고, 절차가 까다로워서, 경기도와 협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는 취항식이 있는데, 행사 주최로 경기도가 올라갔고, 아주대의료원은 주관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의료원장이라는 사람이 한 이야기입니다. 자기들의 이름과 공로가 드러나야 하는데, 경기도만 드러난 것 때문에 자기들은 참석하지 않아야겠다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이 발언을 한 상황과 인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람의 생각 속에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의료원이 주인공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병원과 의사의 가장 큰 사명은 무엇인가요? 생명을 살리고, 병을 고치는 것이죠? 이것은 의사가 되면서 가장 먼저 외우고 고백하는 선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급 환자를 수송할 수 있는 헬기가 취항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기뻐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다른 이들이 주관자가 되고, 자기들의 이름은 뒤로 밀린다는 이유로, 이를 싫어하고 안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병원과 의사로서 가장 큰 사명인 생명을 살리고, 병을 고치는 데에 유익하면 되는 것이지, 누가 주관자가 되고, 누가 뒤로 물리는 게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환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그것만으로 기뻐하고 좋아할 일이지, 자기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게 뭐가 중요하고, 안 알려진다고 싫어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병원을 운영하고, 의사로 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하나 살리는 것보다는, 자기들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환자의 병을 고쳐서,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 것보다는, 자기들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자기들 주머니를 챙길 수 없다면, 환자를 고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생명 살리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단순히 성숙하지 못 한 사람들, 초심과 사명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단순히 부족하거나,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나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떠나서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다윗이 블레셋 민족의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스라엘 군사들은, 용기를 얻고, 나가서 적을 완전히 무찔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모든 군사들을 무찌른 것은 아니지만, 다윗의 용기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잘 지켜본 요나단은 다윗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다윗이 싸움에서 돌아오자, 요나단은 자기의 겉옷과 군복, 무기까지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요나단의 모습을 보면, 필요하면 자기 목숨까지 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기도록 한 다윗에 대해, 사울 왕이 아들 요나단과 달리 행동했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까닭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블레셋 군사들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서 환영합니다. 이때 함께 외치는 말이 “다윗은 수만 명을 무찔렀고, 사울 왕은 수천 명을 무찔렀다”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공로와 업적이 사울 왕의 것보다 더 크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의 공로에 대한 이런 평가가 어떤 것 같습니까? 블레셋 군사들이 공격해 왔을 때 사울 왕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앞장 10,11절에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나라 전체를 책임지고, 지혜롭게 이끌어야 하는 왕이면서도, 사울 자신도 골리앗의 거대한 몸집과 크고 강한 무기들을 보고 두려워 숨어 있었었습니다. 왕이면 왕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어떤 장수를 보내서 싸우게 하든지, 아니면 작전을 짜서라도, 전쟁에서 이기도록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왕부터 잔뜩 겁에 질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한 일이라고는,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소년 다윗을 일단 말리는 것이었고, 나중엔 자신의 갑옷과 투구와 무기를 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은 나라를 책임지고 이끄는 지도자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왕이 이처럼 겁을 먹고,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두려워 숨어 있으면, 누가 명령을 내리고, 이길 수 있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골리앗과 싸울 생각을 안 한다면, 사울 자신만이라도 나가서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울이 왕으로 뽑힐 때의 설명으로 보면,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키가 훨씬 컸습니다. 다른 사람의 머리가 사울의 어깨밖에 안 될 정도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2,30cm는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골리앗의 덩치 때문에 백성들이 겁을 내고 숨었으면, 그나마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훨씬 큰 자신만이라도 나아가 싸워야 합니다. 왕이 적장과 목숨 걸고 싸우면, 겁을 먹고 포기하고 있던 장수와 군인들이 용기를 얻고 싸우러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울 왕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이 한 일이 무엇인가요? 어리고 작은 소년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고 의로운 분노를 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적의 강함이나 수에 따르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대로 담대하게 골리앗과 싸웠고 이겼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앞장 32절에서 골리앗 때문에 모두 겁을 먹고 포기하고 있을 때, 다윗이 사울에게 가서 “누구든지 저 자 때문에 사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습니다”고 말합니다.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길을 만들어 주고, 모범을 보여야 할 가장 큰 책임은 왕에게 있습니다. 사울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래도 안 되면 자신부터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은 숨어 있고, 오히려 다윗이 왕을 격려하고 헌신합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마땅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못 하고, 소년에 불과한 다윗이 오히려 왕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들을 보면, “다윗은 수만 명을 무찔렀고, 사울은 수천 명을 무찔렀다”는 표현도 맞지 않습니다. 다윗이 수만 명을 무찔렀지만, 사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사울이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한 일, 다윗이 한 일을 생각했다면, 그런 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이 여전히 자기를 왕으로 여겨주고,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때 사울의 반응을 8절에서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의 업적과 공로보다 다윗을 더 높이고 칭찬한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상했고,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뻔뻔하고 어리석은 사울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가장 높이 올라가야 하고, 가장 높은 칭찬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 하고, 다윗이 더 많은 칭송을 받자, 사울은 기분이 나쁘고, 화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자신 앞에서 수금을 연주하고 있는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나 분노가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이처럼 너무나 이기적이면서도, 뻔뻔하고도 악하게 행동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대해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라고 하고, 1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가장 큰 공로를 세웠고, 사람들의 엄청난 환영과 칭송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는 다윗에 대해서는 1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라고 하고, 14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그래서 악령에 휩싸였습니다. 악령에 의해 조종을 받고 있어서, 자기중심적이고, 남이 잘되는 것을 견디지 못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해 애쓰지 않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울과 다윗의 삶을 통해 기억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울의 좋은 인물을 기억하기 전에, 작은 소년의 몸으로 골리앗과 싸워 이기고, 장차 왕이 될 인물로 칭찬을 받은 다윗의 모습을 본받기 전에, 이들이 이처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그래서 전혀 다른 결과를 받은 까닭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다윗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건이 좋았습니다. 기본만 했어도, 대대로 왕의 자리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가장 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욕망에 휩싸여, 몇 번씩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해야 할 일은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실 수밖에 없는 모습대로 살았습니다.
사울의 이런 모습은 그의 아들 요나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이 잘된다면 요나단은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사울은 그렇지 못 했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욕망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었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칭찬과 칭송으로 사람이 사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살려다 오히려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고, 악령의 손아귀에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작은 디딤돌로 살고, 이름 없이 숨어서 일하고, 그래서 다윗과 요나단에게 행하신 것처럼, 충성한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는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따라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일을 계획하고 이루어 가는 데 있어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입니다. 사울처럼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가 아니라, 다윗과 요나단처럼, 자신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것과 교회를 앞세울 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다른 생각과 방향을 살아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하는 다윗, 요나단과, 사울의 삶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 산 사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명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뒤로할 수 있는 다윗과 요나단처럼 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려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삶을 살지 말고, 다윗과 요나단처럼,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이를 위해 쓰임 받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서, 충성한 자녀에게 주시겠다 약속하신 복과 은혜로 삶을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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