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주님의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성경: 마가복음 9장 28-32절(신 69쪽)
찬송: 430장(주와 같이 길 가는; 통456), 369장(죄짐 맡은 우리; 통487)
설교: 2018031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제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7,8년 전에 중고로 구입했습니다. 당시 저는 다른 지역에서 지냈고, 구입한 차를 시골집으로 보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전에 타고 다니던 차를 폐차했으니, 하는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이전 것보다 더 좋은 차를 탄다는 생각에 소풍이라도 기다리는 아이가 된 것처럼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시골집에 들어가서 차를 보니, 이전의 자동차가 워낙 낡고 오래된 차라서 그런지, 색깔과 모양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열쇠를 받아서, ‘앞으로 내가 몇 년을 타고 다닐 차구나. 얼마나 좋은 차일까? 또 앞으로 얼마를 타고 다닐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시동을 걸려고 열쇠를 돌리는데, 시동이 안 걸립니다. 요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동을 걸 수 있지만, 일반적인 차량은, 차 열쇠를 끼우고, 어느 정도 돌리면 시동이 걸립니다.
자동차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또 기본적인 기능은, 시동이 걸려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하게 됩니다. 아무리 귀한 차라고 해도, 시동이 안 걸린다면, 사람을 태우고 빨리 달릴 수 있는 자동차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큰 기대감과 설렘을 가지고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시동조차 안 걸리니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시동 거는 과정에서 뭐 잘못한 게 없나 하는 생각에, 괜히 차 여기 저기를 눌러본 후에 다시 시동을 걸려 해도 안 걸립니다.
‘고장난 중고차를 산 것인가? 고장났다면 집까지 가지고 오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 올 때까지는 고장이 아니었는데, 세워 놓은 동안에 고장이 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몇 번을 내렸다 탔다 하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차 안에 있던 자동차 설명서를 뒤적거리며 찾아보기도 했지만, 답을 찾지 못 하고, 30-40분 동안 헤매다, 어떻게 하며 열쇠를 돌리니 시동이 걸립니다.
처음 시동을 걸었지만, 왜 걸렸는지 이유는 여전히 모릅니다. 다시 시동을 끄고, 다시 켜려고 했는데, 또 몇 번 실패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차를 걸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기본적인 절차였는데, 그것을 빼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의 기어가 들어가 있다가 시동이 걸려서 갑자기 차가 앞으로 나아가면, 사고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안전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장치는, 기어가 들어가 있으면 시동이 안 걸리는 것입니다. 또 시동이 걸리더라도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도록, 클러치를 함께 밟아야만 시동이 걸리게 설계되었습니다. 이것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자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운전학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시동을 켤 때 기어를 빼고, 다음에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함께 밟으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배우는 까닭은, 그만큼 중요하고, 또 이것을 제대로 안 지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전에 타던 차량이 오래된 차고, 고급 자동차가 아니어서 그런지, 그런 안전장치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습관대로 클러치를 밟지 않고도 시동이 걸렸습니다. 물론 시동을 걸기 전에 습관적으로 기어가 안 들어갔는지를 확인하고,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안전을 위한 반드시 필요한 절차들을 빼먹었고, 그러면서도 그에 익숙해지자, 잘못된 방식이 정답이자 원칙인 것처럼 착각하고 몇 년을 운전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나중엔 아예 가장 기본이 되는 것마저 기억하지 못 할 만큼 잘못된 습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기어가 빠져 있는지를 확인하고, 또 브레이크를 밟아서 사고나지 않았지만, 자칫 브레이크가 고장났다면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많았던 잘못된 습관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익숙해지고 더 편한 것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런 것을 편하게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원칙과 기본을 알고, 지켜 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비록 원칙과 기본을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원칙과 기본의 정신과 이유만은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누리는 편함과 익숙함 때문에 기본과 원칙을 잊게 되고, 그러다 보면 큰 위기를 맞거나,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잘못 결정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반드시 원칙과 기본만은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점은, 우리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신앙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기도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원칙과 기본이 무엇이고, 이것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앞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 중에서 세 명만 데리시고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평소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변하셨고, 그곳에 아주 오래 전 인물이었던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이 낯설긴 했지만, 제자들에겐 황홀하고,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을 만큼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함께 갔던 제자들 중 하나인 베드로가, 그 자리에 주님, 모세, 엘리야를 위한 초막을 짓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만드신 곳은, 그 누구나 조금이라도 겪고 보면, 영원히 머물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평안합니다.
아름답고 평온한 곳, 모두가 영원히 머물기를 바랄 만큼 좋은 산 위와는 반대로, 산 아래는 비참하고, 아픔과 고통이 가득합니다. 귀신에 의해 조정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아이, 자신이 낳고 사랑하는 아이임에도, 아이의 불행과 고통에 무엇을 해줄 수 없을 만큼 무능력한 아버지, 그리고 아이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면서도 귀신을 내쫓지 못 하는 제자들의 모습까지 혼란스럽고 소란스럽습니다.
산 위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를, 그리고 산 아래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기는 산 위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이지만, 아직은 소란스럽고 문제 많은 산 아래로 내려와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아픔이 많지만, 그 앞에서 철저히 무능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귀신을 쫓아내지 못 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그 까닭이 무엇이냐고 여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해 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답하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17장 21절은 ‘없음’이라고 나오는데, 성경 아래쪽에 어떤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다고 설명되었습니다.
성경 중간에 ‘없음’이라고 나오는 까닭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만,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기도, 혹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만 귀신을 쫓아낼 만한 능력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와 금식을 중요시합니다. 개인에 따라 금식은 못 한다 하더라도, 기도를 강조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귀신을 쫓아낼 만한 기도, 혹은 기도와 금식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많은 시간 기도하고, 많은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집중적으로 기도하라는 뜻일까요? 또 많이 금식하며 기도하면, 이런 능력이 나오니, 우리에게 금식을 많이 하며 계속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것일까요?
지난 주 화요일에 ‘“귀신아 물러가라” 딸 폭행 숨지게 한 어머니, 종교인 구속’(http://www.hankookilbo.com/v/207c1947edf1410bae704b88f7f9737d)이라는 제목의 뉴스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전주에서 정신병(조현병)을 앓고 있는 32살의 딸을 둔 어머니가,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낸다며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도원장인 여자 목사는 귀신을 쫓아낸다며, 딸의 손과 발을 묶고, 어머니는 그 딸을 붙잡고 5시간 넘게 폭행했습니다. 조사에서는 폭행이지만, 당연히 기도하며 때렸겠지요? 그런데 얼마나 심하게 폭행했는지 갈비뼈가 부러지고 숨을 안 쉬다가 결국 사망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어머니와 기도원장 목사까지 구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건은 처음이 아니죠? 예전엔 기도원에서 사람을 감금하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도원장과 그 곳에 있는 이들은 당연히 기도를 많이 하죠? 또 금식하며 기도할 때도 대부분 기도원에서 합니다. 그러면 기도와 금식을 통해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생긴다는 주님의 말씀이 정답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원에서 묶어놓고 기도하든, 무릎 꿇리고 기도하든, 귀신이 쫓겨나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바라는 바, 귀신은 쫓겨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까? 왜 가족과 능력을 행하는 이들이 범죄자가 될 만큼 최악의 사고가 일어났을까요? 이런 이들이 기도를 덜 해서 그렇겠습니까? 금식을 덜 해서 그렇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금식하면, 모든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5절에서는 열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 중 하나가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하셨습니다. 또 6장 13절에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는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능력이 없어진 것처럼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으니,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겼고 예수님께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혹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은, 이런 상황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경험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게 된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질문에 기도를 말씀하신 것을, 기도의 시간과 양을 늘리라는 것보다는, 기도의 기본과 원칙을 알고,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풀이되어야 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그냥 눈감고 내 속에 있는 것들을 털어놓은 게 기도입니까? 아니면 음식을 안 먹고 기도하는 게 참된 금식기도입니까? 이런 것은 기도의 형식이자 한 가지 방법이지, 기도의 원칙과 기본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속에 있는 것들을 자기 조상이나, 자신이 섬기는 신들이나, 이것도 아니면 혼잣말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금식기도도 역시 다른 종교에서 얼마든지 하는 방법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의 원칙과 기본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선교여행을 떠나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또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했습니다. 이것이 처음엔 놀랍고 기뻤겠지만, 경험이 많아지고 익숙해지자, 나중엔 더 이상의 기대감이나 기쁨도 사라지고 무뎌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그런 능력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거라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일을 할 때, 더 이상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어떤 문제든지 자기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 따로 기도하며 의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고, 병자를 낫게 하는 모든 능력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란 나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니, 기도를 통해서만 능력이 나올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만을 의지해야만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능력과 큰일을 행한다고 해서, 마치 사람에게 대단한 능력과 권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면, 귀신을 쫓아내지 못 한 제자들처럼 실패하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기도에 대한 또 다른 가르침은, 참된 기도란 주님의 뜻과 말씀을 깨닫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기도를 정의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라고도 하고, ‘영적인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대화하고, 영적인 호흡을 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냥 하나님과 많이 대화하고, 영적인 호흡을 잘 하는 자체가 기도의 목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29절에서 기도만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인 32절에서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 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혀 깨닫지 못 하고,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바꿔 생각하면, 만약 제자들이 매순간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고, 궁금한 것을 물었을 거라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기도란 주님의 뜻과 말씀을 깨닫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많은 시간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수없이 금식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찾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불과합니다. 넋두리나 중얼거림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상관없는 기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기도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과 원칙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십니다. 기도란 곧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를 의지하는 것이며,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찾고자 애쓰는 과정입니다. 이 기본과 원칙을 잊으면, 우리의 신앙과 기도가 헛되고 맙니다. 무조건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고, 많이 굶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뜻을 찾아 애쓰고, 순종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의미와 원칙을 깨닫고, 주님만을 의지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모든 어려움과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로 매일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뜻을 찾아 순종함으로써, 매일 복되고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복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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