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325)주님은 능력보다 섬김을 원하십니다(막 9장 33-37절)

청명하늘 2018. 8. 27. 14:04

주님은 능력보다 섬김을 원하십니다

 

성경: 마가복음 933-37(70)

찬송: 151(만왕의 왕; 138), 449(예수 따라가며; 377)

설교: 2018032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30,40년 전의 교회 모습은 지금과 다른 점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보다 목회자가 훨씬 귀했습니다. 당시는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시무했지만, 작고 재정이 크지 않은 교회들 다수는 전도사가 담임 목회자로 시무해야 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도 역시 시골의 작은 교회라 전도사님이 사역했습니다. 그래서 세례나 성찬식 등을 할 수 없어서, 당회장을 맡고 있는 다른 교회 목사님들이 1년에 한두 번 오셔서 성례식을 집례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오시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성결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목사님들이 오실 때마다,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교회가 긴장하며 맞이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교회 선생님들이나 목회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때, 목회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귀한 직분자들이라 들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는 게 많았지만, 그럼에도 목회자는 특별하고 귀한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목회자들은 모두가 천사 같고, 선하고, 의롭고, 성경의 가르침들대로 착오없이 사는 이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목회자에 대해 듣고 가졌던 이런 생각들을 지금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신앙생활해오면서, 신학을 하고, 전도사 사역을 하고, 목사가 되고, 목사로서 많은 목회자들을 대하고 있으니, 목회자를 준비하고, 훈련하는 이들, 또 다양한 형편에서 목회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교회에서 들었던 대로, 지금도 목회자는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당시 듣고 배운 것이 바르고 잘 배운 것입니다. 그만큼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전문적으로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기에, 다른 교인들보다 많이 배우고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그런 가르침과 생각들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라 한다면, 당시 그런 가르침대로, 목회자들이 성경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가르치고 전하는 대로, 자기 욕심을 줄일 줄 알고, 더 잘 섬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현장 속에서 제가 보고 겪고 느낀 바로는, 그런 기대와는 너무 먼 모습이 많습니다. 어떨 땐, 차라리 목회자들의 세계를 잘 몰랐으면 좋았을 것 같은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많은 것 생각하지 않아도, 교회들 모임에서 어떤 교회가 큰소리칠까요? 큰 교회 목회자들은 다른 교회와 목회자들을 심기는 데 더 익숙할까요? 다른 교회와 목회자들로부터 대접을 받는 데 더 익숙할까요? 만약 교회와 목회자들이 성경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자신들이 가르친 대로 실천한다면, 큰 교회가 섬기는 게 맞을까요? 대접과 섬김을 받는 게 맞을까요?

 

아무래도 규모가 큰 교회들은, 재정도 많고, 또 사람들도 많으니, 작고 어려운 교회와 목회자들을 잘 섬길 수 있는 여건이 좋습니다. 작은 교회들, 그 속에 있는 목회자들은, 마음은 있어도 그럴 만한 여건이 안 됩니다. 그러니 성경 가르침대로 실천한다면, 크고 여건이 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어려운 교회와 목회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 합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이기 때문에 대접받기를 기대하고, 또 그에 익숙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회장, 총회장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어느 교단이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거의 비슷합니다.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당선되기 위해서는 얼마의 돈이 들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이야기로 들려옵니다.

 

이것만 봐도, 사람은 남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보다는, 남으로부터 대접과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건이 안 되어서 그렇고, 힘이 안 되어서 그렇지, 낮아지고 남을 섬기는 것보다는, 할 수만 있으면, 높아지고 섬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교만과 죄성과 끊임없이 싸우며, 힘들고 어려운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섬김의 문제에서도 다시 어렵고 힘겨운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게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듣고, 또 온갖 기적을 체험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대로 살지 못 했습니다. 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정작 크고 중요한 일, 마음을 두고 힘써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귀를 닫으면서도, 너무나 사소한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부끄러운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제자들이 갑자기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툰 까닭은 앞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세 제자만 택하셔서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서 신비로운 모습으로 변하셨고,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까지 나타났습니다. 신비로운 모습으로 변하신 것도 놀라운데, 그 자리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모세와 엘리야까지 나타났으니,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 체험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산 아래에서는, 예수님의 나머지 9제자가 큰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해결해 주셨지만, 산 아래에 있던 아홉 제자들에게는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전에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예수님께 그 이유를 묻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만 이런 능력이 나올 수 있다고 답해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의 기도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란, 시간과 장소와 방법을 말씀하신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 떠나시면서, 고난과 죽음에 대해 두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것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엔 전혀 엉뚱한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열두 제자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왜 이 문제가 나오고, 이것으로 다투었는지는 분명합니다. 산 아래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데에 실패한 아홉 명의 제자들을 보면서, 따로 예수님과 산 위로 올라가 신비하고 놀라운 것을 체험한 세 명의 제자들이 자기들이 높다며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우리 세 명만 선택해 산에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한 번도 못 봤던 모습으로 변하셨고,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마저 나타났다.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경험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너희는 아홉 명이나 되면서도, 귀신 하나 쫓아내지 못 했다. 예수님이 우리 세 명만 택해서 올라가셨고,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셨으니, 우리 세 명을 더 높고 능력이 있는 제자들로 인정하신 것이 아니냐?” 하며 자기들 스스로 높아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홉 제자들이 가만히 듣고 인정했겠습니까? 이들도 우리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친 일이 얼마나 많냐? 그런데 이 귀신은 너무 강력해서 못 쫓아낸 것이다. 너희들이 있었어도 역시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 했을 거다.”며 논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이들도 역시 다른 제자보다 더 높아지고 싶은 욕망과 교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이 높고 낮음을 판단하는 능력은 곧,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등,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들을 많이 체험하는 이들이 영적 권위가 높은 것으로 주장했습니다. 또 강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낼수록 능력이 좋은 것이고, 많은 병자를 고치는 사람이 더 큰 능력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더 정확히 보면, 제자들의 기준과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큰 능력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이 높고 위대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겸손하고 낮아져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손해와 무관하게 돕는다는 것이고, 이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하나님을 영접하는 상을 받는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전혀 엉뚱한 기준으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얼마나 심각하고 치열했는지를, 당시 상황과 자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31절에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앞 바로 앞 931절에서 두 번째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많습니다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기 위한 목적으로 오신 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 사역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것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고, 비로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말씀, 또 심각한 일들에 대해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 했습니다. 32절 말씀처럼,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아예 관심 밖의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의 스승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열두 제자의 스승이시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들에게는 꼭 하시는 말씀이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제자들은 하나같이 깨닫지도 못 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또한 33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을 보면, 제자들이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툰 자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길에서 다투었다는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아주 급했다는 것이고, 또 당당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앞의 일들을 통해, 각자의 서열을 정하는 게 무엇보다도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마무리하지 않으면, 또 이 문제로 시끄러워질 거라 생각할 만큼 다급한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까지 오는 중에 해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 그러면서도 당당했습니다. 남이 들으면 부끄러운 이야기라면 어디에서 이야기할까요? 다른 사람들이 없는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길에서 이 이야기로 다투었습니다. 자신들의 서열을 정하는 것, 누가 높고, 낮은 것인가를 정하는 게 당연한 것이고, 그만큼 당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긴박하고, 당당한 문제였지만, 주님 앞에서는 어떻습니까? 말할 수 없는 일, 부끄러운 문제지 않습니까? 답하기조차 부끄럽고, 잠잠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 아니겠습니까? 33절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고 물으셨지만,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들 나름으로는 누가 높고 낮느냐 하는 문제가, 꽤 중요하고, 시급하고 당당한 문제였을지 모르지만, 주님 앞에서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만큼 쪼잔하고 비겁하고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삶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보인 제자들의 모습은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제자들이 집착하고, 다퉈서라도 얻고자 하는 그 욕망들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뭐가 다릅니까?

 

문제는, 제자들이 주님 앞에서 보이는 부끄럽고 어리석은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들으면서도, 정말 수고하고 애써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많이 듣고 전하는 목회자부터 높아지기 위해 경쟁하고 노력합니다. 교인들도 역시 그 자리가 다르고, 폭이 조금 다를 뿐, 싸워서라도 얻고자 하는 방향과 목적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주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입을 열고 말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많이 누리고, 높아지고, 많은 능력을 행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낮아지고, 또 겸손하게 많은 이들을 돕고 섬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을 행하는 자보다 더 큰 능력은, 주님 앞에서 자기 삶의 과정들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만큼,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더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높아짐을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고, 힘들고 어려울 만큼 낮아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갖 기적을 체험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자이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상급을 받을 만한 길입니다.

 

말씀을 많이 듣고, 예배를 많이 드리고, 신앙 경력이 많아지는 것보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기준에 맞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누리며, 하늘의 상급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처럼 헛된 것에 힘쓰다, 중요한 것을 잊거나 모르는 자로 살지 말고,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복되고 더 큰 자임을 말씀하신 주님의 기준대로 살아감으로써, 더욱 낮아지고 섬기는 성도, 교회를 이루어감으로써, 나날이 더욱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