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311)사람을 보면 낙망합니다(막 9장 14-29절)

청명하늘 2018. 7. 16. 21:01

사람을 보면 낙망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914-29(68)

찬송: 91(슬픈 마음 있는 사람; 91), 269(그 참혹한 십자가에; 211)

설교: 2018031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충격을 주는 일은 일명 미투운동입니다. ‘Me too’, “나도 그렇다” “나도 그랬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는 뜻을 가진 영어로서, 누군가에게 성추행, 성폭행 등 성적 피해를 입었던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주로 권력과 돈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이를 이용해 자기보다 약자에 있는 사람을 성폭행하거나 추행한 일입니다.

 

본래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처음은 유명하고 존경을 받았던 시인과 작가 등 문학계에서 시작되어 충격을 주었습니다. 다음은 연극, 영화, 드라마 등 연예계에서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백했습니다. TV나 영화 등에서 마치 천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상에 저렇게 멋진 사람들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했던 사람들이, 그 동안 화면 밖에서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짓들을 저질렀다는 것이 정말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도 저런 웃음과 얼굴로 당당했던 것도 무서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연예계에서의 미투 운동이 가져다주는 충격이 가시기 전에, 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충격과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권력과 명예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성폭력을 입었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고, 가해자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거물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투 운동이 힘들고 답답하지만, 그나마 바꿔 생각해 보면, 지금은 과거의 아픔을 밝힐 수 있을 만큼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고, 사회에서 매장되었습니다. 실제로 2009년에 우리나라의 여배우 한 명이 29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신이 당한 아픔을 유서로 남겼지만, 당시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들이 분명 아프고 너무 힘든 과정이긴 하지만, 지금 썩고 곪은 부분은 잘라내지 않으면, 가해자는 여전히 잘되고 성공하고, 피해자는 더 많아지고 커질 것이기에, 지금이라도 드러내고 고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계, 연예계, 정치계의 가해자들의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또 그 심각성을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런 곳에만 성폭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깨끗한 곳 하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회 곳곳에서, 돈과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이 있었고, 그것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는데, 이런 범죄와 폭력이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곳이 어디일까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최후의 보루는 종교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계 중에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우리가 관여할 거리가 많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에서는 절대로 이런 폭력과 피해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방법과 말씀을 정답으로 여기는 것이고, 신앙생활이란 정답으로 여기는 그 길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이런 범죄에 대해 금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범죄가 일어나면, 교회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 하고, 생명을 구하는 방주가 되지 못 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명선에 오르지 못 하게 막는 장애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에서도 성폭력과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 합니다. 다만 지금 연예계나 정치계처럼 그 충격과 파장이 크지 않은 까닭은, 그런 일이 없거나, 혹은 심각성이 작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감추기 때문이기도 하고, 목회자들의 얼굴이 사회에 안 알려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는 가해자가 목회자이고, 피해자가 성도인 경우가 많은데, 피해를 입은 성도들이 목회자의 허물을 드러내려 하지 않거나, 어찌할지 잘 몰라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교단입니다만, 서울에서 20년도 안 되어서, 교인 수가 15,000명 이상으로 성장해서 유명해졌던 교회와 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다 2010년이 되어서, 이 목사가 이전에 여러 여신도를 성추행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때문에 그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2년 지난 후에 다른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속한 총회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처벌조항이 2개월 동안 설교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보면, 2개월 후에는, 자신이 저지른 성폭력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목회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인 수가 약 5천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성장이 안 된다는 때에, 어떻게 다시 몇 년만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목사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설교가 얼마나 좋은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목회자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를 지은 목사에게 왜 그렇게 많은 교인들이 모이겠습니까? 그곳에 모인 교인들이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기 위해 모이겠습니까? 과연 그런 삶을 살아온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지겠습니까? 아무리 맛있고 귀한 음식이라도, 그 음식을 담는 그릇이 씻기지 않아 지저분하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묻어 있으면, 누가 그것을 먹으려 하겠습니까?

 

결국은 그렇게 살면서, 설교단에 서서 설교를 전한다는 것도 잘못되었고, 그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이 없이 가벼운 죄로 판결한 이들도 잘못되었고, 그런 목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잘못되었습니다. 그곳 교인들의 삶을 알 바 없지만, 대다수의 교인들은, 교회다운 교회를 찾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설교가 좋고, 진리가 선포된다고 핑계하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간 게 아니고,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간 것입니다. 영적 허영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신앙이고, 바르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게 곧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이 과정을 외면하고, 쉽고 편하다며, 사람을 만나고 찾으려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취미생활에 그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단계까지 이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도움을 받으려 주님을 만나기보다 사람을 찾아 만남으로써 믿음의 작아지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 주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자기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 받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한 사람이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실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기 때문에, 산 아래에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산 아래에 남아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 찾아오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아버지의 믿음이 어떤 것 같습니까? 몇 가지 점에서 볼 때, 이 사람의 믿음은 꽤 괜찮아 보입니다.

 

먼저는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술에 만취한 사람도 곁에서 부축하고 목적지로 데려가는 게 너무 힘듭니다. 옆 사람의 의지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사람은, 사람으로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내면서도, 자기 맘대로 하고, 사람을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어디를 향해 간다는 것이 보통 마음으로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이 아버지는 힘든 길을 선택할 정도로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아들을 고치기 위해 주술사나 의사에게로 데려가지 않고, 예수님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점도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안 계시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이것도 어느 정도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 한 사람이었다고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더욱 못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탁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제자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논쟁이 붙었습니다. 귀신 들린 이 아이를 고치지 못 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서기관들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스승인 예수님의 능력까지 부인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로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논쟁 중에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상황을 들으시고,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자, 아버지는 다급해져서 22절에서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힘들게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믿음도, 스승의 능력을 믿기에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부탁하는 믿음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아들을 데려올 때는,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정도의 믿음이었다고 하면, 이제는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이나 또는 급한 대로 하실 수 있는 데까지만이라도...”라는 정도로 믿음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는 모습입니다. 이 아버지는 좋은 믿음을 가지고 왔다가, 아들을 고치지 못 하는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까지 매우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나 다른 교인이 믿음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것을 보고 실망하고 믿음이 약해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실망하며 분노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속이신다든가, 남을 속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시는 등 때문에,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망하고, 심하면 신앙을 버리기까지 합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게 쉬운 일 아닙니다. 신앙을 뒤로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하기 싫은 것 안 하고 살면 편하고 쉽습니다. 그런데 쉽고 편한 이 길을 뒤로하고, 불편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신앙생활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만큼 단단한 결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사리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오히려 교회와 신앙에 마음을 닫고 돌아서버리는 가장 큰 이유들 중 하나는, 목회자, 직분자, 그리고 다른 성도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봐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목회자들의 잘못인 경우가 가장 많고, 그리고 직분자들, 일반 성도들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목회자가 불법을 행해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거나, 세상적인 이익에 혈안이 되어, 설교는 멋있고, 좋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삶에서는 그 말씀과는 동떨어지게 사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시험에 들어서, 믿음까지 흔들리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직분자들이 자기 고집과 혈기대로 행동을 하면,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시험에 들어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리고 일반 성도들의 변하지 않는 습성, 습관을 보면 자꾸 믿음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누구도 절대적 기준과,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목회자도, 치유의 은사를 베푸는 이들도 모두 사람입니다. 변질되기도 하고, 스스로는 설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는 뜻입니다. 설교를 통해서는, 믿음 강하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작은 시험에 빠지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어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시험에 빠지면,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다른 교인들을 보며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오히려 믿음을 잃기 쉽습니다.

 

그런데 최근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 대신에 목사라는 사람을 의지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설교를 잘 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능력을 행하면, 마치 그 사람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목사라는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도, 목사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 집중하고, 하나님을 섬기 듯하기도 합니다.

 

병을 고치는 은혜를 겪었으면, 사람을 통해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사람에게 집중하며, 목사에게 순종하는 일이 많습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와 사랑을 체험했으면,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데, 목사에게 감사하며,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누가 무슨 일을 행하든지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시작하고, 주님의 은혜를 보지 않고,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따르다가는, 결국 이 아버지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람은 수시로 변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마저도 지킬 수 없는데, 그 누구를 지키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직분과 연륜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심하면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으십니다. 이 세상을 지으실 때와 지금의 하나님은 같으신 분이시고, 말씀하신 바는 지키실 뿐만 아니라, 또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변하고 약한 사람을 바라보며 신앙생활하려다가는 함께 실패하고, 함께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변함없으신 주님을 믿으면, 참 신앙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임을 기억하고, 오직 반석처럼 변함이 없는 주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감으로써, 변함없는 믿음으로 칭찬을 받고, 삶의 어려움을 해결받는 복된 자녀들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