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약속대로 결심하며 사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14장 53-65절(신 81쪽)
찬송: 410장(내 맘에 한 노래; 통468), 242장(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통233)
설교: 2018120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가 흔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쓰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것에 속아 넘어가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도, 우리나라 광역시의 시장을 지낸 한 사람이, 사기꾼이 보낸 문자를 보고 수 억원의 돈을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일이 만원도 속아 넘겨주면 기분이 얼마나 나쁩니까? 그런데 평생 한 번 만져보기도 쉽지 않은 금액을 사기꾼에 속아서 보냈습니다. 광역시 전체를 이끌고 책임졌던 사람이라면, 얼마나 많이 배우고 똑똑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정도로 속아 넘어간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만, 그만큼 사람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 속을 어렴풋이나마 알았다면, 그렇게 쉽고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도, 그만한 거액을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보이지 않고, 확인하는 게 어려운데, 그 사람의 행동을 연구하면, 그 속의 마음을 어느 정도로 알아낼 수 있다 여기고, 연구하는 행동심리학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몇 년 전에 근처 마트에 갔다가 다른 교회 한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상황인데, 저와 함께 간 분이 저와 그 장로님 모두를 알았어요. 그래서 그 장로님한테 저를 목사라고 소개해 줬습니다. 처음엔 서로 모르는 상황이니 굉장히 반갑고도 겸손한 자세를 하다가, 소개하는 분이 여기 교회 목사라고 말하니, 그 순간에 안색과 자세가 싹 바뀌었습니다. 두 손으로 악수하려 내밀다가 바로 왼손을 바로 거두고, 허리와 고개도 뻣뻣해졌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보이는 그분의 행동을 보면, 그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죠? 제가 여기에 와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고, 나쁘게 행동한 적도 없는데, 저 양반이 왜 저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저 장로는 나를 무척 싫어하고 무시하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행동 심리학의 한 예입니다. 그 속을 말로써 표현한 것이 아니지만, 무심결에 나타나는 작은 행동들을 통해서, 그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행동심리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면, 아주 어렵고 딱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 원리를 이해하고 보면, 우리의 실생활에서 이미 많이 사용되곤 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만난다 하더라도, 몸짓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서로의 뜻을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죠? 또 동물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만, 행동을 보면, 그 속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개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고, 놀아달라고 할 때, 예뻐해 달라고 할 때 등을 어느 정도 파악되기도 합니다.
이를 좀 더 확장하면, 글이나 그림 속의 상황이나 인물의 생각을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림은 이미 과거에 그려진 것이지만, 그림 속에서 보이는 사람의 몸짓과 눈짓 등을 통해서,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고, 글로 표현된 행동을 통해서 인물의 마음과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특히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행동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어떤 상황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예상이 됩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내시는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약속에 따라,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 보낸 사람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열한 제자들 중에서 몇은 잠깐 의미 없이 반항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모두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의 뜰로 끌려가셨고, 생사가 달린 마지막 심문을 받습니다. 그곳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 등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이들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사형하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한 말이냐, 실제 그렇게 행동했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결론은 정해놓고, 사형이 타당하다고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속이 터질 것 같으셨을 듯합니다. 이미 아셨고 말씀하셨지만, 3년 넘는 시간 함께했던 한 제자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무섭다고 도망했습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줄 사람도 없고, 아픔을 함께할 만한 이도 하나 없습니다. 모두가 비수를 드러낸 자리에서 예수님 홀로 모든 공격에 맞서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이들과, 이에 맞서시는 예수님 사이에, 다른 한 사람의 모습이 살짝 보입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자신만만하고, 속에 있는 것을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이었습니다. 좋게 보면, 열성과 담대함이 큰 사람이었고, 나쁘게 보면 절제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베드로의 행동은 겁과 거침이 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서의 모습은 어떤 것 같습니까? 54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모습은 평소 베드로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제자들보다 앞장서고, 언제나 위에 있으려 다투었고, 심지어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예수님의 멱살이라도 잡고 싸울 듯 거세게 덤빈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속의 모습은 낯설 뿐만 아니라,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 중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망했지만, 마음이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거라는 말씀이 기억나서인지 다시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멀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가까이 있습니까? 도망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부인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까? 뒤로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닌 모양새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도 말하기도 어렵고, 부인하고 돌아섰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아주 짧게 기록된 베드로의 모습이지만, 이를 통해서 베드로의 당시 마음과 믿음의 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확정하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긴 했지만,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 자기가 피해를 입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었습니다.
사실 “멀찍이”라는 말과 “따르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멀찍이’라는 말은 ‘떨어지다’ ‘멀어지다’ 등의 말과 어울려야 하고, ‘따르다’는 말에는 ‘가까이’ ‘딱 붙어’라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멀찍이”라는 말과 “따르다”는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합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고, 저쪽을 선택하면 이쪽을 버려야 하는 당연한 사실 사이에서, 둘 다를 버리지 못 하고, 그렇다고 둘 다를 선택하지도 못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또 자신만만했던 발언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니, 예수님과 함께 겪어야 하는 고난과 비난이 너무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종교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예수님을 팔자니, 자신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았던 예수님은, 거짓을 말씀하신 적도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게 한 적도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 유다처럼 예수님을 파는 일에 동조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해치고 죽이려는 자들과, 이들에 홀로 맞서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믿음과 구원에 대한 자세처럼 보이고, 이 둘 사이에서 멀어지지도 못 하고, 가까이도 하지 못 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세상은 두 가지 길로 나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막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에 속한 무리들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옹호하며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은 이 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에서 멀어져, 구원을 약속하며 보여주신 예수님을 가까이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증거를 무시하고, 세상의 길을 진리로 여기며 따라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합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물며, 이 둘을 붙잡는 길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믿음과 구원의 길에서,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길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더불어 세상을 붙잡고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세상을 붙잡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셨던 영생의 길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말하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길입니까?
만약 세상의 길을 선택했다면 당연히 이 자리에 없겠죠? 뭐 하러 편하고 쉬운 길을 놔두고,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뭐 하러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딱딱하고 어려운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에 모인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길을 진리와 생명의 길로 여기고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모두 주님이 말씀하시는 기준에 맞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본문 속에서 보이는 베드로의 모습처럼, 사실은 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 하고 머뭇거리거나,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삶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영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하고 쉬운 길을 뒤로하고, 지금 당장은 더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교회에서 예배하고, 헌금하는 정도로는 완벽히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는 베드로가 보이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도 역시 조금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주신 길들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작은 것은 희생하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는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서 훨씬 크고 좋은 것들을 준다고 하면, 믿음의 길을 뒤로한 적이 우리들에게 있지 않습니까? 잘되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세상에서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유혹해도, 우리 모두가 여전히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갈 만합니까? 믿음의 길을 가는 과정이, 때로는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주님 가까이 머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과 구원의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걸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놓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고난과 십자가에서 한 걸음 떨어져 사는 것도 주님이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길이란, 둘 사이에서 머물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길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이 우리에게 고난과 십자가를 안겨주는 길이라도, 이를 피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을 확신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만이 우리를 구원과 영생으로 이끄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셨고, 주님이 이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우리가 가는 믿음의 길이 고난과 죽음만 있는 실패의 길이라 할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려서도 안 되고, 양다리 걸치듯 두 길 사이에서 있어도 안 됩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영생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하며, 잠시 있을 고난과 십자가마저 기꺼이 지려는 굳은 믿음으로 나아와야 하고, 믿음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상의 고난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 머뭇거리며 고민하던 베드로가 이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만이 진리고 구원의 길임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약속을 구원의 길로 확신하며, 믿음의 자녀답게 주님의 길을 확실하게 부여잡고, 모든 과정마저도 주님의 길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이를 이기고 살아가는 자녀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우리의 삶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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