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203)믿음이 살게 합니다(막 16장 9-14절)

청명하늘 2019. 2. 6. 22:36

믿음이 살게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69-14(85)

찬송: 301(지금까지 지내온 것; 460), 546(주님 약속하신; 399)

설교: 2019020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만큼, 사랑의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있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베풀고 행해야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보이는 사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라고 하면, 이기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죠? 이기적인 사랑을 언제 가장 쉽게 볼 수 있을까요?

 

올해 들어서 한 목사님이 아침마다 성경 구절들을 문자로 보내요. 저와 특별히 친분이 있는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고, 거의 매일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고맙거나 반갑기보다는, ‘! 이분이 선거에 나오려 하는가 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올 가을에 있을 부노회장 선거에 출마한다고 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세상에 그렇게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간절해지는지 모릅니다. 피하려 해도, 쫓아와서 인사하고, 할 수만 있으면 온갖 것을 다 줄 것처럼 합니다. 이런 것도 일종의 사랑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런 사랑은 아주 이기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찍어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겸손하게 잘 섬기는 것이고, 선거가 끝나 필요하지 않으면 뒤도 안 돌아볼 사람들이죠? 사실 이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겉만 보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사랑은 받는 것에 따라 달리 대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만,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사랑은 회사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사장은 일정한 금액을 주죠?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먹을 것도 주기도 하고, 선물하기도 합니다. 무엇을 바랄까요? 더 큰 이익과 성과입니다. 일을 잘 해서,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일꾼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줄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높아지면 어떻게 나타날까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 보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크기를 달리하지는 않죠? 자녀가 공부를 잘 한다면 기분은 좋겠지만,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니죠? 공부를 못 한다고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죠? 용돈을 많이 드리는 자녀를 더 사랑하지는 않죠? 덜 드린다고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에서도 비슷합니다.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라면, 그냥 그 자체로 사랑합니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사랑을 아끼거나 변질시키지 않습니다. 있는 대로 사랑하고,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베풉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워낙 크고 일방적이어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이 세 가지 사랑에서 꼽으라 하면, 마지막 사랑으로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가족에게, 이웃에게, 함께 신앙생활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보여주어야 하는 사랑도 당연히 이런 사랑입니다. 또 하나님을 향해서도 이런 사랑과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아무리 크고 간절해도, 그 모든 가치를 한순간에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를 믿지 못 하는 때입니다. 간혹 의부증이나 의처증을 앓는 분들이 있죠? 이런 분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는, 남편이나 아내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니 걱정하고,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두고 구속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아무리 잘 하고 좋은 것들로 대접하지만, 만약 진짜 부모라고 믿지 못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랑과 섬김이 결코 오래 가지 못 할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되면, 언제든지 돌아서고 말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사랑이 중요합니다만, 진정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선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뢰가 없는 사랑은 참되다고 할 수도 없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기기에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하실 거라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믿은 이는 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멀리 도망쳤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한 단 세 명의 여성만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이들도 다시 살아나실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이 세 여인이 겪은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 슬픔에도 불구하고, 향품을 준비하고, 무덤을 찾아가기로 계획한 것만으로도 대단해 보일 정도입니다. 특히나 모든 남자 제자들이 일찌감치 도망한 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연약하고 나이 많은 여성들이 무덤으로 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무덤에 찾아갔는데, 놓여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대신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셨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이라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생각하지 못 하고, 두려움과 슬픔을 안고 무덤을 찾았다가, 천사를 만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무덤을 찾아간 세 여인들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본문 앞 8절 말씀처럼, 여인들은 아무말도 못 하고,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몇 명에게 특별히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먼저 가장 큰 사랑과 간절함으로 찾는 막달라 마리아를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며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다시 시골로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이 두 사람이 이십오 리 거리에 있는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었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슬픔과 좌절감을 안고 힘없이 걷고 있던 이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던 이 두 사람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역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비슷해 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던 이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음에도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슷한 면이 있음에도, 성경에서 연이어 기록한 까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만큼 사랑하고 절박하게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 9절에 기록된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린 여성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일곱 귀신이라는 것은, 정확히 귀신이 몇이었느냐는 것을 말씀하신 것보다는, 귀신의 수가 많았고, 그만큼 강력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사람처럼 살지 못 했습니다. 일곱 귀신에 들렸으니, 사랑과 존중을 받지 못 하고, 귀신처럼 여겨졌습니다. 모두가 더럽고 무섭다며 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비로소 사람답게 살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 막달라 마리아로서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습니까? 다시 귀신 들려도 자신을 구해줄 이 하나 없으니, 삶이 다시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그 누구보다 더 아파하고, 간절히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을 아시고 부활 후 가장 먼저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좀 다른 관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한다고 미리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와서 전한 이들의 말마저도 믿지 않은 이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10절에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 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람들입니다. 한때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같이 가고, 예수님이 행하시던 일들을 함께 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도 못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마저도 믿지 못 했습니다.

 

시골로 돌아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것도 이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 역시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는, 증인을 삼을 때는 두 사람을 두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잘못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거짓말하기 어렵고, 잘못 볼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그것이 거짓일 수 없는 사실이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를 믿지 못 했습니다. 13절에서 이들이 남은 제자들이라고 합니다. ‘남은 제자들이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를 일컫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아주 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커서, 예수님이 죽으신 다음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서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과 부활을 믿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아무리 커도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이들이 두려움 때문에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완전히 돌아서 멀리 떠나버린 게 아니고,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함께 위로하고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자칫 붙잡히면 좋을 것 없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활도 제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 대해 본문 14절에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꾸짖는 까닭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거나, 열심히 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 할 만큼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고, 전해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반감이 심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교훈과 지혜를 준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언젠가 가까운 곳에 있는 한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그 교회 한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집사님은, 교회에서 예배와 찬양도 하고,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지만, 막상 구원과 영생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일들을 순종하고 열심히 합니다. 그럼에도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것도 나름 괜찮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 하면서 나쁜 일 하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도 하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니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기준은 우리의 기준과 다릅니다. 본문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씀하신 것들을 지켜 행하며 산 사람들이었음에도, 단 한 가지 말씀과 부활을 믿지 못 한 것 때문에 꾸중하시는 것이 이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으로 여김으로써 얻는 게 아닙니다. 부활은 교회에서 예배와 봉사를 많이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의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는 말씀처럼, 믿음을 통해서 얻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도 이것입니다. 예배하는 것도 중요하고,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 노력하며, 이루어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과,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우리마저도 부활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행함과 봉사와 예배와 기도와 헌신보다 앞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도 믿음에 따라 부활과 구원과 영생이 있음을 믿으면,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무엇보다 믿음 위에 우리의 삶을 가까워 나아감으로써, 우리 모두가 주님께 칭찬과 더불어, 구원과 부활을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