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113)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막 15장 33-41절)

청명하늘 2019. 1. 13. 22:18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533-41(84)

찬송: 428(내 영혼에 햇빛; 488), 539(너 예수께; 483)

설교: 2019011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되어 갑니다만, 이전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 하고, 법에 의해서 그 직위를 박탈당했습니다. 이 과정이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혼란과 불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자질과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이가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쳤다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끔찍한지 모릅니다. 상식이 안 통하는 일들은 계속 일어고, 그 고통은 국민이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전에 탄핵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부결되었습니다. 대통령이 탄핵되는 건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리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 국정 책임자를 탄핵하는 것은 어렵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일입니다.

 

반대로 어렵고 희박한데도 그런 결정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결정적 증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탄핵이 결정되기 전에도, 여러 의혹이 많이 나왔고, 부정과 부패에 관한 의혹들이 많이 있었죠? 그럼에도 결정적 증거, 대통령 직위를 더 이상 맡길 수 없을 만큼의 확실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방송국이, 이들의 부정과 부패와 국정농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태블릿 PC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작은 노트북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탄핵하라는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탄핵을 위한 여러 절차들이 시작되었습니다.

 

태블릿 PC를 입수한 방송국이 그 안에 있는 자료를 밝힐 때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용을 전체를 한 번에 밝히는 게 아니고, 일부로 조금씩만 밝히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워낙 크고 많았는데, 그것을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불법과 부정을 행했다고 밝히는 게 아니고, 극히 일부만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와대에서 그것은 의혹에 지나지 않고, 그렇게 큰 비리와 불법이 아니다는 식으로 변명하거나 회피합니다. 그러면 방송국에서 다시 추가로 공개합니다. 이렇게 많은 의혹들을 조금씩 밝히고, 그것을 부인하면 다시 추가로 공개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면서, 청와대와 대통령이 어디까지 밝히고 용서를 빌어야 할지 대책을 세우지 못 하게 만들고, 결국은 그 동안의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탄핵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시고, 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그 무엇보다도 외아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가장 소중한 존재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를 위해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무엇을 보내고, 누구를 보내도 인간들이 죄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꿔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죄를 깨닫고 돌아섰으면 예수님까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 시작이 그렇듯, 자기 고집과 교만을 버리지 못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으로 죄를 지었는데, 그 교만과 죄가 모든 인간들 속에 가득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기록해 주시기도 하고, 많은 일꾼들을 보내셨음에도, 인간들은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구약성경으로 기록해 말씀하셨습니다. 능력과 말씀으로 가득한 지도자들과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 계획과 판단대로 살았습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 하나님께서 아예 포기하시고, 말씀과 능력을 중단하시곤 했습니다. 이것을 종교 암흑기라고 하는데, 종교 암흑기 중 하나가 바로 예수님 오시기 전 400년 동안입니다. 인간들이 워낙 고집스럽고, 죄를 가까이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실망하셔서, 더 이상 능력과 말씀을 드러내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해보시고, 저렇게도 해보심에도 인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보내시는 것마저도 중단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최후의 수단이자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서 한 가지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최후의 보루이자, 가장 큰 선물인 예수님이 이 땅에서 33년가량을 사셨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전 9시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난 낮 12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두워졌습니다. 12시면 한낮이고, 해가 가장 높이 있을 시간입니다. 한여름 소나기가 오려 할 때처럼, 한낮에 어둠이 짙게 깔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의 고통이 가장 커졌을 때,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픔을 드러내셨습니다. 단순히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육체의 고통 때문에 내뱉는 외침이 아닙니다. 만일 육체의 고통 때문이라면, 차라리 숨이 멈춰서 육체의 고통이 사라지도록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게 아니고,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괴로우셨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자신을 가장 잘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 언제까지나 정의와 사랑으로 함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죽음에 처하도록 놔두셨습니다. 가장 믿고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면당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 한 번도 버림받거나 외면당한 적이 없던 예수님께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외면이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이 과정은 예수님께만 고통이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뿐인 아들을 죄와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보내시고, 또 죄인들로부터 오히려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도록 내모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은 또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관계이든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픔과 슬픔을 줍니다. 사랑의 크기에 따라, 죽는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통은 더 커집니다. 그럼에도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것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다른 관계와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가장 크겠지만, 아들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지, 가장 크고 변하지 않을 사랑의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로 보내시고, 죽게 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으로서는 차마 이 순간을 보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고, 왜 자신을 버리느냐고 울부짖으실 때, 하나님도 잠시 그 순간 눈길을 거두시고 외면하셨습니다. 영원의 시간 속에서 단 한 번도 아들 예수님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던 하나님이시지만, 그 순간만은 차마 지켜보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온 땅에 어둠이 가득했다는 것은, 단지 짙은 구름이 끼는 등의 자연현상이 아니라, 아들 예수님을 죽음에 내던진 하나님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어둠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누구나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작게 보거나 안 보려 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크게 보려 하고, 없는 것까지 만들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누가 잘 하는 것 같고, 누가 못 하는 것 같습니까? 우리가 인간인지라, 인간의 관점에서 보고, 여러 말로 변명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역사와 방향은 언제나 어리석은 과정으로 가득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보면, 하시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통에 처하게 하시고, 그 아들로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봐도, 더 이상 하나님께 무엇을 더 해달라고 바라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마지막을 맞이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최후의 방법이고, 또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이보다 더 크고 확실한 수단과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는 것 때문에 안타까운 비명을 내뱉고 죽는 예수님을 두고 반응이 다양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였고, ‘내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발음이 비슷합니다.

 

엘리야를 부를 때는 엘리우라고 해야 하고,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때는 엘로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 두 말이 비슷합니다만, 매일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 할 만큼 비슷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이름을 말할 때, ‘강리우강로이라고 하면 두 말의 발음이 헷갈리지는 않죠?

 

그럼에도 이들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말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까지도 자기들의 장난거리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곁에 가장 가깝게 있던 한 사람이 신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게 했는데, 그 의도는 엘리야가 와서 예수님을 내려주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점잖게 표현됐지만, 엘리야가 와서 구해 주는지 구경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장난질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오락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보고 있지만,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이란 사람 이름이 아니고,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군대 지휘관을 뜻합니다. 10명을 지휘하는 사람은 십부장’, 50명을 거느리는 오십부장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백부장은 로마의 군대 지휘관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에 와서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장교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위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을 붙잡고, 십자에 매달고, 못 박는 일을 지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오고, 십자가에서 매달리는 순간까지 가장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거두신 순간에 내뱉은 말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자 한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마저 농담거리로 삼고, 마지막 호흡까지도 장난거리 삼는 이들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까지도 외면하는 것을 넘어, 조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로마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미움을 더 많이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과정을 보면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을 두고 보면, 믿음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증거만 있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고, 죽게 하신 것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을 보고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크고 확실한 것들을 수없이 보여주어도 온갖 이유와 핑계로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처럼 오히려 훨씬 적은 기회를 갖고, 믿음의 길에서 보면 너무 불리한 위치에 있음에도 복음을 받아들이며, 구원의 기회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은, 더 크고 확실한 증거가 아니라, 마음의 밭을 갈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뿌려질 때, 그 말씀이 믿음의 싹을 틔우고, 자라고, 성장해서 구원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리석고 추한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님까지 희생시키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것만큼 크고 확실한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랑이 큰 만큼 이보다 더 큰 증거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의 믿음과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의 믿음은 증거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의 밭에 따라 나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과정마저도 은혜요, 감사할 일이고, 기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우리의 죄와 죽음을 위해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할 만큼 외면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단순하지만, 이를 믿고 살아가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까지 선물로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의 손으로 붙잡음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