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1230)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십시오(막 15장 16-22절)

청명하늘 2018. 12. 30. 17:10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1516-22(83)

찬송: 261(이 세상의 모든 죄를; 195), 341(십자가를 내가; 367)

설교: 20181230. 주일낮예배

 

 

 

2018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명예 살인이라는 게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말만으로도 듣기 거북하고, 또 무서운 생각이 드는데, 그 앞에 명예라는 좋은 의미의 말이 덧붙여 있으니, 어울리지도 않고, 그 뜻이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마호메트를 신으로 섬기는 이슬람 종교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인데, 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국가에서는 절대 금지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배교, 즉 마호메트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정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절대 금지된 이 두 가지를 어기면,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지 명예를 더렵혔다면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살인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 자기 가족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형제나 부모나 누가 되었든, 마호메트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거나, 여성이 무슨 이유가 되었든 순결을 잃으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살인까지 저지르는 것입니다.

 

신앙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가족까지 죽일 만큼 그 사람들은 자기 신앙과 신념에 대해 철저합니다. 당연히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맞서 싸우고 배척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간의 갈등이 그리 크지 않죠? 우리나라 안에는, 기독교 신앙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도 있고, 종교라고 보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유교도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또 사물이나 짐승 등을 섬기는 토속 신앙도 있고, 여러 종교들을 혼합해서 명확하게 무슨 종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들이 있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간의 갈등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종교를 위해 열심을 넘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는 있지만, 이슬람 종교의 명예 살인처럼, 다른 종교인들 해치거나 죽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매우 드뭅니다.

 

여러 종교가 함께 있으면서도, 그 갈등이 크게 나타나지 않아서 그나마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 종교 갈등이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볼까요?(사진)

 

사진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기분이 별로 안 좋죠? 전도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종교가 모두 개신교인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 중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개신교 안에는 워낙 다양한 교단이 있고, 다양한 성향과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또 이들 모두를 총괄할 만한 질서가 없으니, 모든 이들의 신앙을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혹시 저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아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겁니다.

 

만일 이슬람교인이나 불교인들이, 아니면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이나 사이비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까지는 그 사람들의 자유고 신앙이라 여기며 넘어갈 수 있죠? 그런데 만약 자기들의 신앙과 신념이 워낙 커서, 우리 교회까지 들어오고, 교회 기물을 파손하고, 이곳에서 자기들의 찬양곡을 부른다면 어떨까요? 용서가 안 되는 일이죠? 이건 불법 유무를 떠나서, 우리들의 신앙에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 시설까지 찾아가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다른 종교인들로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한 명이라도 더 전도하는 걸 하나님이 원하시고, 자신들이 받은 사명이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과연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마음을 닫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일꾼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에는 선한 일꾼만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도구들에는 선한 도구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악한 일꾼, 악한 도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마당에 모여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곁을 잠깐 지나가고 있던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 두 이야기를 이어서 기록한 까닭이, 단지 군인들이 예수님을 심하게 모욕하고 조롱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조롱과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이에 비하면,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은 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또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당한 고통에 비하면, 군인들이 예수님께 가한 고통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군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조롱하고 모욕했는지 그 과정과 내용을 세세히 기록했습니다.

 

또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사람에 대해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 방식이 특이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만한 힘이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대신 지게 했다고 기록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사람의 이름과 출신까지 모두 기록했습니다. 구레네가 고향이고, 시몬이라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에서는 그의 두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이름까지 기록했습니다.

 

또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까닭까지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라고 하고, 누가복음 2326절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중 한 사람도 아니었고,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붙잡히고, 십자가 형벌을 받게 되신 것을 안타가워서 때문에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을 때 조롱하거나, 십자가에서 처형되시는 것을 구경삼아 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고, 시몬이 이전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시골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지나가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현장을 마주치게 되었고, 자기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강제적으로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게 된 시몬에 대해 이처럼 특별하게 또 상세하게 기록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것 자체가 위대하다고 말씀하시기 위한 목적이라면, 시몬이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겠다고 스스로 선택했다고 해도 됩니다. 이게 훨씬 큰 감동을 주고, 우리에게 더 큰 교훈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시몬의 행동이나 업적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사람이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되지 않았고, 예루살렘으로 온 까닭도 역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진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도 역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이어 기록된 두 사건을 비교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이 두 사건이 가진 특징과 이유를 살펴야, 비로소 이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조롱하고, 온갖 방법으로 모욕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기록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이들이 예수님께 고통을 주고,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까지 끌고 간 죄인들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군인들이란 명령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명령이 합당하냐 불합리하냐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위에서 명령한 것이 부당해 보이고, 불합리해 보인다 해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군인의 사명이고 의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빌라도 총독이었습니다. 명령이 내려진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가고,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에게 책임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 군인들이 크게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 이상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빌라도의 명령만 따르면 됩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명령 받지 않은 일, 필요하지 않은 일, 즉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을 선택해서 행하고 맙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모욕했는지는 오늘 본문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으로 바로 끌고 가면 되는데, 군대 전체를 마당에 모았습니다. 군인 몇 명만 있어도, 자기들에게 부여받은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마저 모두 떠나고 예수님 혼자밖에 없으니, 예수님은 아무 힘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군대 전체를 모은 까닭은 분명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고, 더불어서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예수님을 맘껏 조롱하고 모욕하며, 즐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시몬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고통을 대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 속에 예수님에 대한 긍휼이나 동정심이나 믿음조차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그 동안의 행적조차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만드시고 이끌어 가시는 데 있어 수많은 도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세계에 질서를 만들어 두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그 질서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계산과 다릅니다. 좀 느린 것 같고, 답답해 보일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선한 도구만 사용하시는 게 아니고, 악한 도구들마저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와 악을 행하신다는 뜻이 아니고, 악한 도구와 악한 사람도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데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죄 속에서 고통을 받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악인마저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파는 역할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못 박도록 지시할 빌라도와 같은 인물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와 빌라도를 악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 속에는 이런 인물들이 필요하고, 악한 자들은 그들의 판단과 선택 중에 악한 도구로 이용되는 걸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합니다. 용서받지 못 할 만큼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 군인들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군인들은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을 처형해야 하는 임무를 받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선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이들이었다면, 곧바로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갔을 것입니다. 위의 명령대로 따라야 하는 군인으로서 어쩔 수 없다면, 그 명령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하고, 절대 필요 이상의 악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사람, 사형을 내리는 사람,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우리일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우리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잠시 우리를 편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할지라도, 악물고서라도 그 길을 피해야 합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수단과 도구가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은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희생과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선택되었으면, 그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만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 언제나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방식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힘들고 어려운데, 교회에서마저 짐을 져야 하느냐고 물을 만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바라지 않았던 십자가를 군인들의 강요에 의해 져야 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시몬을 기억하시고, 큰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갈림길과 선택이 있습니다. 선하고 의로운 길이라고 당장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길이라고 당장 손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당장의 이익과 기쁨과 보상을 바라며 악한 길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저주와 죽음의 길이고 패망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도구 중에서도 오직 선한 도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피하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길이라면 묵묵히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 길이 복과 영생을 보장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러 선택 중에서, 악한 자들과 함께하지도 말고, 그런 자들과 방법을 닮거나, 가까이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는 제자요 자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