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106)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막 15장 23-32절)

청명하늘 2019. 1. 6. 20:07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

 

성경: 마가복음 1523-32(83)

찬송: 552(아침 해가 돋을 때; 358), 261(이 세상의 모든 죄를; 195)

설교: 20190106. 주일낮예배

 

 

 

2019년의 첫 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요즘엔 우리나라 TV 방송국이 많아졌습니다. 30년 전 즈음만 해도 두 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2015년 기준으로 지상파 방송국만이 아니라, 종합편성 방송국, 케이블 TV 등 해서 무려 150개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150개 방송국이면, 채널이 몇 개씩 되는 경우도 있으니, 높은 시청률 얻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채널이 몇 개 안 될 때, 인기를 끄는 프로그램은 50% 넘는 시청률을 넘길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워낙 많은 방송국과 채널이 있어서, 이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단지 몇 %의 시청률을 거두어도 성공했다고 하고, 많은 돈과 노력을 기울였지만, 소리 없이 사라진 프로그램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별로 기대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꽤 높은 인기를 끌고, 그래서 몇 년 동안 계속 만들어지는 [나는 자연인이다]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흐름은 매번 비슷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도시나 동네 안에서 살지 않고, 외진 산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틀을 보내면서, 함께 식사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벌써 7년째가 된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이들도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오래 갈 것이라 생각지도 못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와 동네를 떠나 산에서 산다고 기대조차 못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벌써 몇 년째 계속 만들어지고, 또 기대보다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것은 아니고, 인터넷을 통해 보곤 했는데, 몇 번 보니 그렇게 산에서 홀로 사는 사람들의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본 것들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거의 틀림없이 상처와 아픔을 크게 겪은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겪은 아픔과 상처의 종류와 시기와 크기는 다양하겠지만, 이를 피하거나 이겨내려고 사람들이 없는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의 불륜과 이혼 때문에 홀로 살고, 어떤 사람은 가까운 사람의 배신 때문에, 또 누구는 사업 실패 등에서 오는 고통과 아픔을 잊거나 해결하기 위해 산에서 혼자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픔과 상처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완벽한 곳이 아니고, 죄가 가득한 곳이고, 우리는 아직 이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고,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으니, 주로 두 가지 모습을 보입니다. 먼저는 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로 술로써 아픔을 잊으려 합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술로는 부족해서 마약 등으로 지금의 고통을 잊으려 합니다. 이 외에도 쾌락을 통해, 취미 등을 통해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효과가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술을 마시면 몇 시간은 잊거나, 혹은 조금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술을 깨고 나면 전혀 바뀌지 않은 상황을 마주해야 합니다. 여전히 아픔은 남아 있고, 숙취의 고통만 더해질 뿐입니다. 마약도 마찬가지라고 하죠. 약물의 효과가 있을 때는,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쁜데, 약효가 끝나고 나면, 견딜 수 없는 허무함과 고통이 더해진다고 합니다. 방법이 다를 뿐, 고통을 잊기 위한 다른 것들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이 잠깐 줄어든 것 같고, 잊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고통을 잊기 위한 또 방법은, 앞에서 말씀드린 프로그램의 주인공들처럼, 사람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서 혼자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면,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고통과 아픔을 줄이는 방향으로, 줄이지 못 하면 잊어버리도록 하는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의 모습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아픔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를 피하거나 잊으려 하시지 않고, 반대로 모든 고통과 아픔을 몸소, 철저히 겪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위해 군인들이 예수님을 골고다라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거부하셨습니다. 몰약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전부터 수입해서 한약재로 썼다는데, 마취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섭취하면, 모르긴 해도,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통증을 어느 정도 잊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십자가에서 처형하는 것은 가장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입니다. 빠른 시간에 죽으면 그나마 고통이 덜한데, 십자가 형은 손과 발에 큰 못을 박아 매달고, 배를 찔러 몸에서 물과 피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의식이 있어서 모든 고통을 그대로 느끼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이 방법이 워낙 잔혹하고, 또 고통이 커서, 죄수들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를 지은 이들에 한정해서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나라를 뒤집으려 반란을 일으킨다거나, 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 살인마와 같은 중범죄자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그 고통이 워낙 극심해서, 최소한의 도리로서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으로 몰약을 먹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통증을 줄여주는 몰약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그대로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시는 모든 고통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신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혹시 어떤 목적이 있어서 오신다 하더라도, 전능자, 권력자로서 오셔서, 좋은 것들만 누리면 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 오셨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한 몸으로 직접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이 33년 정도를 사시면서, 징벌이나 고통을 받으실 만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누구에게 상처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누구의 것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거나, 징계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아무리 색안경을 쓰고 봐도, 예수님의 삶은 흠조차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삶은 온갖 아픔으로 가득합니다. 3년 넘게 함께하며 가르친 제자들은 모두 떠나고, 그 중 한 사람은 아예 예수님을 죽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으로도 그 고통의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인데,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모습도 역시 억울함과 아픔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자, 온갖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누가 옷을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노름질 합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님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으면,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며 모욕합니다.

 

심지어는 양 옆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도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십자가 형이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만 내려진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강도들의 죄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마저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자신들보다 더 악하고 죽어야 마땅한 죄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예수님을 모욕합니까? 예수님이 다른 누군가에게 무슨 잘못을 행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나쁜 일을 행하시거나, 무슨 말로라도 상처를 주신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나가는 사람들, 좌우에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마저도 예수님을 조롱하며 모욕합니다. 이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예수님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에게마저 죽을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불쌍하게 여겨야 하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나쁜 일을 많이 해서, ‘죽어도 싼사람이라 해도, 막상 죽을 상황에 처하면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아무런 죄도 없고, 누군가에게 피해나 상처를 준 적이 없는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위로하지는 못 할지언정 최소한 모욕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게 아니고,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하도록 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십자가형을 결정한 빌라도를 향해 분노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빌라도는 권력이 있는 자들이라, 이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죄가 없이 죽어가는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좌우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욕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둘에게 강도짓을 하라고 시키셨습니까? 성경 기록을 보고, 또 삶의 방향들을 보면, 이 둘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받을 만한 강도라고 하면, 그냥 도둑질하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돈을 빼앗고 도둑질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이다 잡힌 강도들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니,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남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들이, 하나님 무서운 줄 생각하고, 이후에는 영생과 영원한 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았겠습니까? 자기가 편히 누리고, 더 갖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고, 그 나라를 대비하며 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남의 생명을 해치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예수님을 피하며 살았을 사람들입니다.

 

한 번 만나지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을 터인데, 그럼에도 이 강도들은 예수님을 향해 욕을 쏟아냅니다. 이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마치 예수님이 이들에게 강도짓을 하라고 시켰고, 두 강도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명령에 따라 강도질 하다 잡혀, 사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두 강도를 사형시키라고 명령한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못 버틸 것 같습니다. 하나님 곁에 영광의 자리가 있음에도, 그 자리를 놔두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3년 반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먹고 자며,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으로 교육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희생과 사랑이 오히려 화살이 되어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흘린 수고의 땀방울들이 오히려 예수님께 독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사랑의 가르침과 생명의 말씀이 오히려 비난거리가 되고, 축복의 말씀이 예수님을 향한 채찍질, 모욕과 조롱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육체의 고통은 뒤로하고, 정신적인 허탈감과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조차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분통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을 것이고, 피할 수 없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순간과 상황을 잊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오히려 그 순간들을 피하지도 않고, 고통을 줄일 기회마저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들을 보면,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에 대해 예언한 말씀들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700년 전 즈음에 기록된 구약의 이사야서가 있고, 여기에서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533,9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까지의 과정에서 겪으신 모든 고난과 아픔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뜻이기도 하고, 더불어 우리가 마땅히 받아 아프고 죽어야 하는 죄와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억해야 하는 다른 한 가지는, 그래서 우리가 짓는 죄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자주 말하다 보면, 가볍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만이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마저도 예수님이 대신 지셨으니, 아무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파들의 생각이 여기에 속합니다. 구원파가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죄를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조롱을 받고 죽으셔야 할 만큼 무섭고 큰 죄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고, 죽어야 할 만큼 무서운 죄들입니다. 죄를 무서워하고, 죽을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더욱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고통을 얼마나 심각하게, 또 온 몸으로 받으셨는지를 기억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도록 죄의 길에서 철저히 멀어져야 합니다. 그 길이 잠깐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하고, 우리 주머니의 사정을 조금 더 넉넉하게 한다 할지라도, 이를 악물고서라도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얻은 생명의 길을 뒤로하고 가다가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이제 우리 자신이 져야 하고, 다음 세상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그 고통을 하나도 감하지 않은 것대로 영원히 겪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고난과 조롱을 피하거나 줄이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그 고통과 죽음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늘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되, 죄의 무서움을 깨닫고, 죄에서 멀어지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더욱 신실하게, 절실하게 주님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시는 복을 이 땅에서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