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형편도 보십니다
성경: 마가복음 15장 40-47절(신 84쪽)
찬송: 382장(너 근심 걱정; 통432), 320장(나의 죄를 정케; 통350)
설교: 2019102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몇 년 전 기사 중에 ‘억대 돈 교회에 헌금하자 남편이 목사 찔러 중상’이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https://news.v.daum.net/v/20141021221205532)
2014년에 있었던 사건인데,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남편은 원양어선을 타고 돈을 벌어서 계속 집으로 돈을 보내줬습니다. 그렇게 몇 년 일하면서 집에 돈을 보내줬으면, 어느 정도 돈이 모였겠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모아진 게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를 추궁했겠죠? 그러면서 아내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사람의 아내가 4년 정도에 걸쳐 헌금한 금액이 1억 5천 만원 정도의 거액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교회에 가서 목사에게 금액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헌금으로 지급된 것이라 돌려줄 수 없다고 하자, 목사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자의적으로 헌금한 금액이라 돌려받기 어렵다는 검찰 쪽의 이야기를 듣고, 교회 목사와 다른 두 사람을 흉기로 찌르고 도주했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없죠? 특히 받는 금액이 커질수록 고됨도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원양어선을 타는 것도 이런 일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원양어선도 여러 가지겠지만, 배를 타고 먼 바다에서 몇 달을 일하곤 합니다. 그리고 육지와 집에 돌아와도 얼마 머물지 못 하고, 다시 바다로 나가서 계속 일합니다. 이런 일은 수입은 꽤 괜찮아도, 육지와 집을 몇 달 떠나서 일하는 게 워낙 힘들고 고된 것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남자가 이렇게 고된 일을 몇 년 동안 한 까닭은 분명하죠? 원양어선을 타는 게 워낙 힘든지라, 형편이 어느 정도만 되어도 누구나 피합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남편이 몇 년 원양어선을 타고 일했다는 것은 집안의 형편이 아주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너무 어려우니, 먼 바다의 거친 파도에서 목숨을 걸고, 또 육지와 집에 대한 그리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일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기대가 되고 기뻤겠습니까? 그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일한 대가를 이제 받을 수 있고, 집에 돌아가 새로운 일들을 할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피땀 흘리며 벌어 보낸 것이 하나 남지 않았으니, 상실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돈을 되찾기 위해 폭력을 행한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또 그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편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실감은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벌어온 모든 돈을 헌금한 아내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잘 한 것 같습니까? 잘못한 것 같습니까? 이 여성이 헌금한 것에 대해 생각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자기 혼자 결정할 돈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부부가 돈을 함께 벌고 관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의 이해와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여성은 남편이 벌어온 돈을, 남편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기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내용인데, 헌금과 헌신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성이 헌금한 금액은 아주 크죠? 하지만 금액 하나만 놓고 보면, 이 여성보다 훨씬 큰 금액을 헌금한 신앙인들이 꽤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성의 경우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드렸습니다. 형편만으로 따지면 그마한 금액을 헌금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무리하게 하고자 했고, 자기의 재산이 없으니 남편의 것을 헌금했던 것입니다.
이 여성이 왜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헌금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신다고 가르치고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많이 바칠수록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생각이 커지면 어떻게 될까요?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드리겠지만, 바칠 만한 재산도 없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빚을 내서라도 헌금하려고 할 것입니다. 많이 바칠수록 복을 많이 받으니, 빚을 내서라도 바치는 게 이익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배당을 짓거나, 교회 공사 등을 앞두고 큰돈이 필요할 때, 부흥회나 수련회를 하면서 이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교회와 목회자의 입장으로서는 편하고, 또 일을 빨리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 헌금할수록 복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여기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상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바치면 무조건 좋아하고, 바치지 않으면 싫어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급한 신일수록, 신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돈과 헌신뿐입니다. 많이 바치면 잘살게 된다고 합니다. 자기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면 할수록 복을 많이 받는다고 약속합니다. 신자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요구하지도 않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많이 바치고, 좋은 것 바칠수록 무조건 복과 평안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닙니다. 좋은 걸 많이 바칠수록 좋아하고, 복을 준다고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른 믿음, 바른 행함으로 사는 게 복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헌신을 누구와 비교해서 더 많이 한 사람, 적게 한 사람으로 나누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없는 사람이 적게 바친 것이 사람들 보기엔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고, 어려움 중에 조금 헌신한 게, 사람들 보기엔 믿음이 적은 것 같지만, 하나님은 자녀들의 상황과 형편과 믿음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바라보는 여인들 몇 명,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빌라도에게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의 행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 40절에도 나오고, 47절에도 나오고, 바로 다음인 16장 1절에도 밀집해서 등장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남녀평등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지고, 과거에 비하면 많이 평등해졌죠? 하지만 이것도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중동 지방과 이슬람 국가 중심으로 여성들은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2000년 전에는 이것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는 관례적으로 여성은 사람의 수로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게다가 세 번이나 연속해서 기록한 것은 아주 드문 경우이고,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본문에서 하는 일은 어떤 것 같습니까? 대단한 것 같은가요? 반복해서 기록될 만큼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가요?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히고, 십자가에 처형 받으시는 과정에서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언제나 따르던 무리들도, 특별히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열두 제자들도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중에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은 본문 속 여인들은 분명 칭찬받을 만합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고, 예수님이 150km 거리의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도 따라왔고, 예수님이 재판을 받고 죽으실 때도 떠나지 않고 함께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는 모습도 보고, 다음 날 무덤을 찾아갔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천사들로부터 가장 먼저 전해 듣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분명 칭찬을 받을 만하고, 그 용기와 사랑이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이 한 일만으로 판단한다면 사실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귀신에 붙잡혀 고통스럽게 살던 자신을 구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계속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던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 제자들의 어머니인 살로메,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안타까워 계속 함께했던 마리아입니다. 야고보와 요세는 예수님의 동생들로서, 이들의 어머니는 곧 예수님의 친어머니입니다.
모든 제자들마저 하나 남지 않고 떠났을 때도, 이 여인들은 끝까지 남아 따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것까지 멀리서 지켜보았다는 것 자체는 대단한 용기이지만, 그러나 이들이 해내고 이룬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별것 없어 보입니다. 특히 이 여인들에 대한 기록들 사이에 나오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업적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고,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삶마저도 인정을 받을 만한 공회원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로 생각하면 국회의원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권력과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게 별것 아니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때의 상황을 조금만 살펴보면 요셉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심지어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명령을 내린 사람은 빌라도 총독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이도록 결정할 만큼 권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죄수의 시신을 달라고 한다는 것은, 공회원이라는 직위만이 아니라, 자칫 목숨까지 보장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나라로 생각한다면, 박정희나 전두환 등이 독재하면서, 정적(政敵)을 사형시켰는데, 국회의원 한 사람이 자신이 장례를 치르겠다고 시신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은, 모두에게 버림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과 용기는 대단해 보입니다. 잘못되면 가족의 생명까지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두려운 때입니다. 그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 할 때에, 요셉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고, 정성을 다해서 장사합니다.
만약 요셉의 이런 행동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쓸쓸하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은 것도 그런데,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으면, 십자가에서 시신이 썩거나, 날짐승이 와서 시신을 훼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요셉의 행동은 가치가 있고, 칭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만을 칭찬하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던 여인들까지도 함께 기록하며 칭찬합니다. 여인들이 한 것이라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 가까운 곳에 머물며 있는 것도 아니었고,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이 여인들을 반복해서 기록하며 칭찬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여인들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믿음과 행함과 헌신을 인정하고 칭찬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준을 내거신 게 아닙니다. 아무 힘과 권력이 없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추궁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먼저 나서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하지 않고,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꾸짖지 않습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고, 장례할 수 있는 것은 공회원이라는 직위와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촌로에 불과한 여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멀리 떨어져 구경만 했다고 꾸중하시는 게 아니고, 모두 떠났음에도 끝까지 예수님의 길을 따른 것만으로도 기록해서 칭찬하십니다.
헌신과 봉사와 헌금도 하나님은 이런 기준으로 보십니다.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게 아니고, 적게 바쳤다고 싫어하시는 게 아닙니다. 봉사를 많이 했다고 칭찬만 하신 게 아니고, 전혀 봉사하지 않았다고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많이 바칠수록, 또 봉사를 많이 할수록 무조건 좋아하시고 칭찬하신다면, 모든 신앙인들은 한 푼 남기지 않고 교회에 바쳐야 합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바쳐야 하고, 빚을 낼 수 없으면,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또 모두 일반 직장과 직업을 버리고, 목사가 되고, 목회자가 되어서, 평생을 하나님의 일을 하며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잣대를 들이밀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칭찬하십니다. 여유와 여건이 되는 사람은 가진 것 중에서 믿음으로 많이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믿음을 담아 적게 드리는 것으로도 칭찬하십니다. 헌금이든 봉사든 헌신이든 겉과 양으로 보시지 않고, 그를 행하는 이들의 믿음과 형편을 보십니다.
물론 많이 가진 자들, 많은 것을 받은 이들에게는 더 많이 원하십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힘과 재물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기준이 높아져서, 고난과 위험을 각오하면서까지 헌신하는 걸 원하시고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힘과 여건이 안 되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은, 그래서 행한 일이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여인들처럼, 작은 수고와 헌신도 역시 기뻐하시며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과 형편을 보십니다. 바른 믿음과 정성을 담은 물질과 헌신을 보시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기준을 바로 알아서, 하나님이 주신 복이 커서, 형편이 되면, 요셉과 같은 결단과 행함으로 봉사하고 헌신해서 하나님의 칭찬과 복을 받고, 상황과 형편이 어려울 때는, 주님과 함께하고, 따르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충성한 자녀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날마다 풍성히 누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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