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425)사랑의 방향과 방법이 맞아야(삼하 13장 7-14절)

청명하늘 2021. 4. 25. 13:47

사랑의 방향과 방법이 맞아야

 

성경: 사무엘하 137-14(482)

찬송: 452(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220(사랑하는 주님 앞에)

설교: 2021042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제가 여기에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았을 때 두 친구가 찾아와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친구는 근처에서 목회하고, 다른 한 친구는, 목사 안수에 필요한 과정은 모두 마쳤는데, 가정사 때문에 목회와 상관없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식사하면서, 여러 이야기가 오갔고, 저는 교회의 문제와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도 대곡교회는 어렵지만, 당시는 교회라고 말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죠? 예배당 건축과 사택 리모델링 과정, 또 이 외의 여러 행정 부분까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가득했습니다. 답답함을 풀고 싶고, 한 편으로는 친구가 저와 다른 시각에서 지혜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큰 어려움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목회를 안 하는 친구가 이야기를 듣다가,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저를 정말 생각해서인지 제게 그만 잊어라. 그래봤자 너의 몸만 상하고, 해결 안 된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신앙과 사랑으로 다 용서하고 넘어가는 게 옳다고 말합니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인지, 친구의 반응이 실망스러웠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니, 친구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그럴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좀 조용히 있는데, 그 친구가 자기의 일을 몇 가지 말하다, 노동청에 자기 매형과 누님을 신고하려 한다고 합니다. 친구가 매형과 누님이 운영하는 작은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잠깐 도와주는 게 아니라, 얼마의 월급을 받기로 약속하고, 정식으로 일했습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늦어지기도 하고, 안 주는 경우가 생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몇 번 제대로 이야기했음에도 월급을 안 줘서, 노동청에 신고해서 밀린 월급을 받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못 받은 봉급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440만원정도라고 합니다.

 

그 친구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습니다. , 평소 맡은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봤을 때도, 그 돈을 위해 얼마나 수고하고 애썼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무리하고 힘들었는지, 몇 년 사이에 대부분의 치아를 뽑고, 틀니를 해야 해서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몸까지 버려가며 일했는데, 당연한 대가를 못 받아서, 공장을 운영하는 매형과 누나를 노동청에 신고할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친구의 반응과 계획이 어떤 것 같습니까? 옳습니까? 잘못되었습니까? 저는 친구의 입장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뭔가 부족하거나 기준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용서와 사랑을 이웃까지 넓히라는 말씀이 예수님이 주신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용서를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수준으로 적용하는 게 옳습니까?

 

개인이 아닌 단체가 공동으로 쓰는 돈을 공금이라 하죠? 이 돈은 말 그대로 어느 한 사람의 돈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쓰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단체에 있는 한 사람이나 일부 몇 사람이, 허락이나 절차도 없이 이 돈을 쓰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죠?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때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대면서 무조건 용서해야 하나요? 이렇게 무슨 짓을 하든, 그냥 내버려 두는 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고 용서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성전 안에서 장사하면서, 약자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자들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동전 바꾸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누가 무슨 짓을 하든 놔두는 게 사랑이 아니라, 방관이고, 암묵적인 동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직접 이 땅에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부정과 부패에 손 놓고 지나치면, 악이 더욱 커지고, 부정과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영원히 죄악을 향해 가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은 철저히 싫어하십니다.

 

이를 통해, 공동체에서의 사랑은 반드시 정의가 동반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를 이야기하면서 자주 나오는 말이 혈연, 지연, 학연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만...’입니다. 자기들끼리 친하고, 자기들끼리 챙겨주고, 자기들끼리 이익을 얻습니다. 이에서 나오는 모든 불익과 불공정은 거기에 속하지 못 한 이들의 몫이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의와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는 달라집니다. 정확히는 사랑과 용서가 정의보다 더 크게 적용됩니다. 형법에 범죄자를 숨겨주거나, 도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자를 숨겨주거나 도망하도록 도왔어도 처벌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친족관계일 경우입니다.

 

같은 죄인데, 왜 적용이 이렇게 달라질까요? 무엇보다도 가족 사이에서는 옳음보다 사랑이 더 크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가족인데 잡혀가 법의 심판을 받고, 옥에 갇히고, 처벌받도록 내가 직접 신고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엄격하고, 마땅히 공평해야 하는 법에도 이런 사정을 둘 만큼, 가족 의 사랑은 정의와 공평을 넘습니다.

 

법마저 인정하고 여지를 두는 가족의 사랑에는 또 다른 특징도 있습니다. 언제나 나 자신보다 상대를 더 높이고 아낍니다. 내가 이익을 얻는 것보다 가족의 이익을 더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손해나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에게는 손해 입히지 않으려 몸부림칩니다. 가족이 아프고 힘든 것보다, 차라리 내가 힘들고 아픈 길을 선택합니다.

 

가족의 사랑은 절대로 나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 상대의 것을 빼앗지 않습니다. 나의 기쁨을 위해 상대에 아픔과 고통을 주는 걸 선택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더 갖기 위해서, 가족의 것을 빼앗거나 손해를 끼친다면, 사실은 가족으로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상대에게 아픔과 눈물을 주어야 한다면, 이는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거짓이고 악에 불과합니다. 가족의 사랑은 옳고 그름의 수준을 넘어설 만큼 크고 자기희생적이어야 하는데, 이처럼 자신을 위해 상대를 희생시킨다면, 이를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는 가족의 사랑 수준이 아니라,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런 죄를 저지른 사람과 내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암논과 다말은 이복남매로서 다윗 왕의 자녀들입니다. 왕의 자녀니 왕자와 공주죠? 그런데 암논이 다말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8촌 이내면 결혼이 금지되었죠? 그런데 이게 세계적으로도 드물 정도로, 훨씬 가까운 관계까지도 결혼을 허용하는 나라들이 훨씬 많습니다. 게다가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이니, 법의 적용이 훨씬 더 느슨했겠죠? 우리로서는 이복남매를 원하는 암논의 모습이 이해 안 되지만, 당시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문제는, 암논이 자기 욕망을 위해 간사한 요나답의 이야기를 듣고, 음모를 꾸며 다말을 범했다는 점입니다. 다말이 아버지께 이야기해서 정식으로 결혼 허락을 받자고 했음에도, 욕정에 눈이 먼 암논은 이마저 듣지 않고, 강제로 다말을 범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본문 앞 1,2절에서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말을 향한 암논의 마음이 사랑이었고, 병이 날 만큼 깊고 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다말을 향한 암논의 마음이 사랑입니까? 간절함의 크기로 보면 그럴 듯해 보입니다. 다말 때문에 병이 생겼습니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 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으니, 간절함의 크기로 보면 절대 작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방향과 내용에서 보면, 암논이 다말을 정말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참된 사랑은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노래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부분이 있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다말을 향한 암논의 모습은 결코 사랑의 범위에 들지 못 합니다.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오래 참지 못 했습니다. 친절하지 못 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무례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구했으며, 분노했고, 불의를 행했고, 진리를 외면했습니다. 욕구 배출을 참지 못 했습니다. 사랑이 갖는 여러 가지 특징 중에서, 암논은 단 한 가지도 갖추지 못 했습니다.

 

게다가 다말이 누이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암논의 판단과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암논은 이를 두고 다말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욕망 배출을 위한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에서 드러나야 하는 모습은 하나 보이지 않고, 이기적이고, 불법적이고, 교만한 모습 등, 사랑이라면 나타나서는 안 될 모습들만 가득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면, 그것도 대상이 가족이라면, 절대로 암논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암논처럼 잠깐의 쾌락을 위해 가족의 희생과 눈물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족 중 누군가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그를 희생시키고, 고통으로 밀어 넣는다면, 이보다 더 큰 거짓과 악행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가족은 더 사랑해야 하고, 이는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저도 어느덧 적은 나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병원이나 관공서에 가면, 제 나이대를 부르기에 호칭이 마땅치 않긴 하죠? 그곳이 교회고, 또 제가 목사라는 걸 알면, 호칭을 선택하기 어렵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리와 상황에서 간혹 아버님이라는 말들을 듣곤 합니다. 아직은 그런 표현을 들을 때마다 낯설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하는 걸 보면, ‘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은 나이는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저는 결혼을 못 했습니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결혼조차 못 했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하고, 한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평생 이 정도 수준으로 살다가 삶을 마감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더불어 나 하나 희생해서, 가족들이 좀 더 편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품곤 합니다. 내 욕심과 필요를 충분히 채우려다, 가족들 중 한 사람에게라도 작은 피해와 아픔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내 욕심을 버리고, 내가 더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렇게 사는 것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면, 제 가족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겠지만, 필요하면 저는 가족들을 위해 저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정말 가족을 위해 생명까지 버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그렇게 답할 것이고, 그렇게 선택할 것입니다. 과거와 좀 달라진 점 한 가지라면 목숨을 주고, 위해 희생할 대상의 범위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형제자매가 결혼하고, 조카들이 태어나면서부터는, 조카들을 위해서도 저의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카가 아이를 낳아, 저도 족보로는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필요한 상황이 되면, 이 아이를 위해서도 저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생명까지 줄 수 있을 만큼 가족에 대한 사랑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다말을 마음에 품은 암논의 마음이 절대 사랑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은 집착과 간절함의 크기에 따르지 않습니다. 방향과 자기희생을 통해 드러납니다. 다말을 향한 암논의 마음은 병이 들 만큼 크고 간절했습니다만, 그러나 방향과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고, 상대에게는 고통과 눈물만 안겨다 주는 짓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욕구 해소를 위한 수단과 통로로만 여기는 이기적인 수준을 넘어 추악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 사랑과 용서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행하며 살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방향과 방법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서 사랑과 용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공의와 정의가 사라지면, 그 공동체는 다시 회복하지 못 하게 됩니다. 공의와, 자기 이익을 계산에 넣지 않는 공평함으로 썩은 부위를 잘라내야만 회복될 수 있고, 건강한 공동체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가족간의 사랑에서는, 진실과 공평을 넘어,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희생으로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를 위해 가족을 이용하고, 가족에게 아픔과 눈물을 주면, 그것은 아무리 크고 간절해도, 또 아무리 여러 말로 표현해도 거짓이고, 악행에 불과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사랑의 방법과 방향을 잘 기억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바른 방향과 방법으로 사랑을 베풂으로써, 말씀대로 사는 자녀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풍성은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