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404, 부활절)주님의 부활로 참된 소망을 삼으십시오(막 16장 1-11절)

청명하늘 2021. 4. 4. 13:11

주님의 부활로 참된 소망을 삼으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161-11(85)

찬송: 161(할렐루야 우리 예수), 165(주님께 영광)

설교: 20210404. 주일낮예배(부활절)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달 23일에 사고 한 건이 세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컨테이너를 싣고 운반하는 배가 수에즈운하를 지나던 중에 좌초되어, 다른 배까지 지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운하란 주로 배가 운항할 수 있도록 만든 인공 수로를 뜻하고, 이집트는 성경에서 애굽으로 기록된 지역이죠?

 

본래는 육지였던 곳에 물길을 내는 것이라, 바다처럼 크고 깊지 못 하죠? 너비가 200m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컨테이너를 싣고 지나던 배가 강풍에 방향이 꺾이면서 좌초되고, 이 배는 물론, 다른 배들까지 지나가지 못 해서 세계 경제에 영향을 끼칠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하는 세계 운반량의 1/9정도를 담당하는데 이 길이 며칠 동안 막혔으니, 세계 경제에 엄청난 손해를 끼칠 만하죠?

 

여기에 좌초된 배는 일본이 만들고, 대만 회사가 운영하는데 그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줄 아세요? 폭이 59m, 길이가 400m라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큰 배를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400m면 연세 많은 분들은 걸어서 10분정도 걸리는 거리죠? 도로를 지나다 컨테이너를 싣고 가는 트럭을 보면, 정말 크고, 또 무겁게 느껴지죠? 그런데 사고 난 배에는 이런 컨테이너를 2천 개도 아니고, 무려 2만 개를 실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크고 무거운 배가 좁은 운하에 좌초되었으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하죠? 이 때문에 그곳을 지나야 하는 배들이 주위에서 기다리거나, 하는 수 없이 며칠 더 걸리는 먼 길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지난주에 수습되어 운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 때문에 운송이 지연되면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책임져야죠? 사고 선박 자체의 운송비는 물론, 수습하는 데 들어간 장비와 수고비, 게다가 이 사고 때문에 지나가지 못 해 지연된 다른 배들의 비용까지 엄청난 몫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저는 이 사고를 보면서, 두 가지 점에 놀랐습니다. 하나는, 그렇게 크고 좋은 배도 사고를 당한다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아무리 크고 좋은 배도 사고나면 혼자 힘으로 수습하지 못 한다는 점입니다.

 

이번에 사고난 배는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18년에 건조된 배입니다. 요즘은 하루 다르게 기술들이 발달하지 않습니까? 셀 수 없이 많이 만들어지고 이용되는 자동차만 해도, 새롭게 적용되는 기술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처럼, 오래된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모르는 기술들이 몇 가지씩 적용되어 나옵니다.

 

하물며 가격이나 크기에서 자동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선박의 경우는 더 좋은 장치와 기술이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자동차가 아무리 비싸 봐야, 수천 억 원씩 하는 대형 선박과는 비교조차 안 되죠? 비싼 배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 하는 수많은 기술과 장치가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배가 강풍에 방향을 잃고 좌초되는 사고가 실제 일어났습니다. 이 정도로 큰 배는 바다 한 가운데서 엄청난 바람과 파도를 만날 수 있으니, 이를 피하거나 견딜 만한 기술이 당연히 들어 있을 텐데, 바람이 아무리 셌다고 하더라도, 운하의 바람조차 견디지 못 할 정도면 더 큰 문제죠? 이 정도로 큰 배가 견디지 못 할 정도의 바람이었다면, 이보다 작은 다른 배들도 비슷한 사고가 나야 맞겠죠?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런 대형 사고가 없었음을 생각해 보면, 사고난 배에는 그런 기술이 없든지, 아니면 고장났든지 둘 중 하나겠죠?

 

더 크게 놀란 건, 이렇게 최첨단 기술과 시설로 만들어진 배가 좌초되면, 얼마나 무능한지, 자기 힘으로는 전혀 힘조차 쓰지 못 한다는 점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엄청난 파도나 바람에 좌초된 게 아닙니다. 물이 담긴 육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배가 버틸 수 없을 만큼 큰 파도나 바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또 목적을 가지고 만든 뱃길이라, 큰 암초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배가 헤쳐날 수 없을 만큼 험한 곳이 절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단 이 배가 빠지지, 이 배는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이집트 정부에서 손해배상으로 1조원가량을 청구한다는데, 그만큼 운하를 막는 사고는 이 배의 소유 기업이 파산할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줄 만한 일입니다. 배를 운영하는 이들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배는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오지 못 하고, 이집트와 여러 나라의 지원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크고 비싸고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음에도, 막상 사고가 나니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무능함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수에즈 운하에서 일어난 이 사고를 보면서, 우리 인생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면에서 발전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를 훨씬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자마자 남북으로 갈렸고, 이것도 모자라 몇 년 후에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때가 70년 전의 일입니다. 70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채 100년이 되기 전에, 이제는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여전히 불평하는 사람들이야 많고, 예전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사실 말도 안 되죠? 정말 그 시절 그대로 살라 하면, 그런 소리 못 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되고, 넉넉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기술이 우리를 완벽하게 지켜주지는 못 합니다. 파도와 바람의 영향을 받습니다. 거친 파도와 큰 바람에 흔들리다 못 해 뒤집히는 경우도 있고, 부서지는 경우도 있고, 암초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작은 어선을 타는 사람만 어려움과 위기를 겪는 게 아니죠? 평생 한 번 보지 못 할 만큼 거대한 배들도, 작은 건 이겨낼 수 있다는 점 외에는, 위기와 사고를 겪는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고를 겪으면,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 하는 모습도 우리네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일단 사고가 나고, 좌초되면, 아무리 최첨단 기술을 갖추고, 고가의 장비를 갖춘 배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능력있고, 돈 많고, 잘나고 힘세더라도, 온갖 사고를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이라는 암초에 부딪히기도 하고, 누군가는 가난의 암초를 만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마주하게 되고, 또 누군가는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려 주저앉게 됩니다. 또 누군가는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어버리고 의욕과 목표 없이 살기도 합니다. 인생이라는 물길 위에서 고난이라는 강한 바람과, 아픔이라는 큰 파도를 한 번도 겪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특히나 가장 중요한 생명에 관한 한,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철저히 무능합니다. 다른 짐승들이야, 나름의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빠르고 강하다든지, 날 수 있다든지, 물속에서 숨쉬며 빨리 움직인다든지, 나무를 잘 오른다든지 등의 생존에 필요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능력조차 없으니, 인간은 생명에 관한 한 가장 무능한 존재에 불과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명의로 알려진 의사가 병에 걸리고, 가장 강함으로 세계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마저 질병과 죽음 앞에 무능하다면, 우리처럼 무지하고 약한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세계에서 내로라 할 만큼 돈이 많은 사람도, 죽음 앞에 철저히 무능하다면,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질병과 죽음을 막을 수 없고, 고난이라는 장벽에 좌초되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끝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회복과 영생의 기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을 약속하시고, 보여주신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으로 시작된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입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라는 뜻인데, 복음으로 시작된 마가복음이 부활 없이 끝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전혀 복음이 되지 못 합니다. 다른 복음도 그렇지만, 마가복음은 더 그렇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46-7절에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는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여기 나오는 네 가지 생물 즉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네 가지를 4복음서와 연결시켜 해석하곤 합니다. 모든 의견이 일치되는 건 아니지만, 마가복음을 송아지 복음이라고 해서, 종으로 희생당하신 예수님을 대표한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마가복음은 1045절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섬기려 이 땅에 오셨고, 인간을 위해 희생당하시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섬기고, 희생당하시고, 고난당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죽음으로 끝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남을 잘 섬기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어려움을 겪다가, 그것으로 영원히 죽게 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고, 복이 되겠습니까? 그냥 좋은 사람이었다는 평가가 보상의 전부로 끝나고 맙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게 복된 소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희생했습니다. 가족과 생계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귀신에 잡혀 고통을 받다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군인들의 손에 넘겨져 고난을 받으시더니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들의 믿음이 아직 온전치 못 한 때였으니, 이들이 겪었을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마가복음을 비롯한 복음서의 기록이 끝났으면, 얼마나 허망합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예수님이 고통과 죽음으로 끝났으면, 이것만큼 실패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5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말씀처럼, 제자와 막달라 마리아의 수고와 헌신과 믿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희생당하시고, 죽으신 게 누구에게 무슨 복음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고난만 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끝났다면, 본문 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의 마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을 향한 여인들조차 믿지 못 했고, 여인들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조차 믿지 못 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절망으로 끝날 것 같은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의 삶에 부활을 소망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고난만 가득할 것 같은 이들의 삶을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복음으로 시작을 알려주신 하나님께서 부활로써 복음을 완성하셨고,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이들이라는 점도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제자들 모두 특별히 지식이나 능력이 뛰어나지도 못 했고, 가진 것이 넉넉하지도 못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습마저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시시때때로 흔들리고, 엉뚱하게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 자체는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런 이들에게 주님이 부활을 소망으로 베푸셨다면, 우리에게도 부활이 소망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위로와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비극으로 헛되이 끝나게 될 복음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작하셨고, 부활로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목적지를 향해 시작한 배의 여정과 비슷합니다. 시기가 다르고, 크기가 다를 뿐 반드시 바람과 파도를 만나고, 원하지 않는 장벽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만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우리 힘으로는 절대 헤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음과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우리에게 부활로써 다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부활 때문에 우리의 삶은 절망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소망과 영생을 향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되새기며, 감사하며, 따라 살기로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따르던 여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약하고, 의심하고, 그래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소망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삶에서 겪게 되는 아픔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친히 보여주신 부활의 약속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다지고,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소망과 기쁨 가운데 살아나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