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321)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십시오(삼하 12장 1-15절)

청명하늘 2021. 3. 21. 14:43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성경: 사무엘하 121-15(479)

찬송: 369(죄짐 맡은 우리 구주), 204(주의 말씀 듣고서)

설교: 2021032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는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습니다만, 그럼에도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빨리, 또 크게 부흥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10개 중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부흥은 다른 나라들이 놀랄 만큼 빠른데, 믿음의 수준은 어떤 것 같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양과 내용에서는 분명 성장하고 부흥했죠? 수십 년 전과 비교해 보면, 교회 수, 성도 수, 교회 재정, 목회자 수까지 모든 분야가 성장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목회자의 신학적 지식이나 전문성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흥과 성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조심스러울 만큼, 교회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체를 넘어 퇴보하는 형편입니다. 요즘은 전염병 때문에 어려움이 더 커졌지만, 전염병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정체 혹은 퇴보한다는 이야기가 기독교 내에서 널리 퍼졌습니다.

 

그 동안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한 한국 기독교가 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성장시키기 위해 개발한 교회 교육과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교육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나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또 좋은 목회자들을 만나, 꽤 다양하고도 좋은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에서 실시하는 수준과 내용에 비하면 초보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성경공부라고 하면 아주 단편적이었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 그리고 사건과 내용을 암기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신학을 한 사람으로서 돌아보면, 편협되고, 잘못된 것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성경공부를 하는 내용과 수준을 보면,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수준도 일반 교인의 수준을 넘어 전문가 수준이라 할 정도입니다.

 

설교도 더 높은 수준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신학적으로 준비가 미흡한 목회자들도 적지 않았고, 좋은 설교를 듣는 방법도 녹음테이프가 가장 현실적이고 흔한 방법이었습니다. 당연히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원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얼마든지 찾고 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방송만 틀어도, 종일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온라인을 통해 좋은 설교를 원하는 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교육의 다양성 면에서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사실 과거엔, 교회 교육이라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교회 분위기와 절차를 따르고 익숙해지는 게 교육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엔 전문화되고, 수준 높은 교육들이 많아졌고, 이를 대하고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이처럼 수준과 내용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음에도, 과연 교인들이 신앙생활하는 수준이 그만큼 좋아졌을까요? 과거에 비하면 교인들의 헌신과 노력과 신앙에 대한 진지함이 더 나아졌습니까? 그렇지 못 하다는 데 대부분의 의견을 같이 합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것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때가 되었음에도, 교인들의 수준은 왜 더 나아지지 않습니까? 헌신이나 믿음을 진지하게 여기며 사는 자세는 왜 과거보다 오히려 더 뒷걸음질치고 있습니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 교육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미흡한 가장 큰 원인은, 목적과 목표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교육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러한 목적은 잊어버리고, 목표에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 성경 전체를 읽는 걸 통독이라고 하죠? 성경 통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기에서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가요? 성경 통독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목표는 몇 번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통독하면서, 몇 번 어떻게 읽겠다 하는 목표는 세우고, 노력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목적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느 교회 가면,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직접 손으로 쓴 노트 묶음을 놔두었습니다. 이를 필사라고 하는데, 성경이 얼마나 두껍고 내용이 많습니까? 전체를 필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웬만한 정성과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성경 전체 필사를 높이 평가하고, 전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손으로 직접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단순히 베끼는 게 목적이 될 수 없죠? 그렇게 되면, 성경을 손으로 쓰는 의미가 없습니다. 천자문이나 불경이나 다른 좋은 책을 베끼는 거나, 성경을 베끼는 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많이 베끼는 목적이라면, 이것만큼 비효율적이고 무가치한 일도 없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한 현대에, 많이 쓰고 베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을 직접 손으로 쓰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쓰면서,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 말씀대로 철저히 살겠다 다짐하고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손으로 쓰는 것 자체에 목표를 두면, 한 번 쓴 사람보다 두 번 쓴 사람이 칭찬을 받습니다만, 그게 신앙생활에 무슨 유익을 주겠습니까? 성경을 열 번 베끼면 뭐하고, 백 번 베끼면 뭐합니까? 그 행위 자체가 목표가 되면, 신앙과는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이것만이 아니죠? 성경을 몇 번 읽고, 무슨 프로그램에 몇 번 참여하고, 금식기도를 며칠 하는 등 모든 행위 자체가 목표가 되면,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교회 교육의 상당 부분이 목적은 뒷전이고, 엉뚱한 목표만 채우는 데 두고 있어 실패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훨씬 발전된 교육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신앙인들의 수준이 낮은 두 번째 까닭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이유인데, 자신을 빼놓고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신앙교육을 받고, 성경을 읽고, 배우는 까닭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더 잘 알기 위해서죠? 그것도 내가 더 잘 알고, 더 바르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더 많이 알고, 잘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 정도는 신앙이라 할 수 없고, 신앙생활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읽는 성경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면, 그게 소설이든, 불경이든, 도덕책이든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읽을 때마다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죄와 죽음 등의 이야기로 부담을 주니 더 안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수백 번 읽고, 수백 번 베낀다고 해서 무슨 차이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듣는다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수백 편, 수천 편 들어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함정과 오류에 빠진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니 좀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런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성경을 남의 이야기로만 듣습니다. 설교의 대상에서도 언제나 자신을 빼고 듣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 들어야 하는데...’ ‘저 말씀은 OO 집사가 들어야 하는데...’와 같은 생각으로 듣습니다. 성경을 쓸 때도, 말씀을 한 자 한 자 내 마음에 새기며, 철저히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빠지며, ‘이것은 OO에게 주는 말씀인데...’ 하는 생각으로 성경을 씁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나 자신을 향한 말씀, 내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말씀으로 읽어야 하는데, ‘이 말씀을 꼭 OO가 듣고 변화되어야 하는데...’와 같은 생각을 품고 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까닭은, 하나님이 다른 누군가에게 주시는 말씀인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알고, 그대로 행하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바르게 알고 행하는 이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교만한지라, 이를 인정하며 나를 향한 말씀으로 듣고 받아들이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오죽했으면, 첫 번째 인간인 아담마저도 그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절대 먹지 말라고 하셨죠? 그러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결국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책망하시자, 이때 아담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창세기 312절에서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누구를 향했습니까? 하와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 둘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게 아니고,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이를 쏙 빼고, 하와를 탓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비겁한 이 모습이 기독교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됩니다.

 

이를 기억하고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 다윗이 왜 위대한 신앙인인지, 엄청난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적을 남의 이야기로만 듣지 않고, 자기를 향한 말씀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앞에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탐내서 간음했는데, 밧세바가 임신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감추려, 전장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던 우리아 장군을 불러들였습니다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라도 다윗이 자기 죄를 인정하며 돌아섰으면 될 터인데, 이미 죄로 눈이 뒤집혀서, 이를 뒤덮으려 우리아를 사지에 몰아넣어 죽게 만드는 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를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말합니다. 부자가 자기 것을 아끼려, 가난한 사람이 가진 한 마리 양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그런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며 분노합니다. 다윗의 기준으로도,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은 죽어 마땅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마땅히 죽어야 할 부자는 다윗을 뜻한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자 다윗은 13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다윗은 너무 부끄러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를 감추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만큼 다윗에게 이 죄는 부끄럽고, 죽을 만큼 싫은 일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를 덮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고, 나단 선지자만 막으면, 이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 선지가 전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 자리에서 철저히 인정합니다. 죽어 마땅한 부자가 자기 자신임을 인정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합니다. 이런 모습이 다윗이 왜 위대한 신앙인인지 보여줍니다. 다윗은 죄가 전혀 없어서 좋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다윗도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징계와 고난마저도 자기를 향한 말씀임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요즘 신앙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이 이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우고, 바른 설교를 수백 편, 수천 편 듣는 것보다, 부담되고, 껄끄럽고, 불편하게 하는 말씀마저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경고와 징계의 말씀을 남이 들어야 하는 말씀으로 읽지 않고, 나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읽고, 듣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다칠 때 먹거나 바르는 약이 있죠? 또 몸을 더 건강하게 하는 보약도 있습니다. 이런 약으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할까요? 그 약을 내가 먹거나 이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치고, 내가 아픈데, 그 약을 볼 때마다, ‘이 약을 OO가 먹어야 하는데...’ ‘이 약을 OO가 써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나의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는 히브리서 412절 말씀처럼, 영혼의 질병을 고치고, 마음의 깊은 것까지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향한 말씀, 내게 주시는 말씀,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말씀으로 인정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죄 가운데 사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죄로 말미암은 저주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다윗은 용서받을 수 없는 너무 큰 죄를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믿음과 은혜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앞날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기억하고, 부담되고 어려운 말씀마저도 나를 향한 말씀으로 인정함으로써, 죄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나를 향한 말씀으로 인정하는 게, 남의 이야기로 생각하며 수백 번 듣고, 읽고, 쓰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복됩니다.

 

다윗이 부끄럽고, 숨기고픈 너무 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자신을 향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저주에서 벗어나고,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삶을 채워 나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