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량과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
성경: 사무엘하 12장 15-25절(구 481쪽)
찬송: 265장(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369장(죄짐 맡은 우리 구주)
설교: 2021032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말이 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할 때는, 상대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이해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사용될 때는 그 뜻이 좀 달라지죠? 단순히 상대가 말하는 뜻을 이해한다는 의미보다는, ‘마음이 통하다’는 뜻을 담게 됩니다. 서로의 생각이 비슷하고, 뜻을 함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같은 언어를 쓰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도, “말이 안 통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이 통하고, 어떤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기준과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상대가 크게 두 가지 면이 너무 강할 때 말이 안 통합니다. 하나는, 자기말만 하는데, 그것도 끝없이 길게 할 때입니다.
재작년 가을에 김장할 때 제가 한 주 내내 음식조차 못 먹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중에 친구 둘이 문병한다며 찾아왔습니다. 한 친구가 자기와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도,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 좋으면 간략하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그 친구는 10년 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한 시간 넘게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말이 안 통하는 두 번째 경우는, 다른 사람의 말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의 생각과 판단만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대하기가 힘든 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한 두 분이 있었습니다. 두 분은 공통점이 있었는데,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점입니다. 한 분은 증상이 심해져, 정신과병원에 입원했고, 다른 한 분은,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신신경과에 가서 검사를 받고,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교인들이라, 마음이 더 많이 쓰여, 심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을 만나고 오면, 그 날은 다른 일을 더 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힘들고 피곤합니다. 분명 우리나라 사람이고, 우리말을 주고받는데,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것보다 힘듭니다. 일리 있게 이야기하면, 생각해 보고, 맞으면 받아들여야 하죠? 그럼에도 그분들은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서, 어떤 말로도 납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감시하고, 해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고, 그럴 까닭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어이없는 증거들을 내놓습니다. “대문을 나가자 서둘러 몸을 숨기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들리는 종소리도 자신을 깨우기 위한 것이다.” “가까운 가게에 갈 때는 대문 앞에 병마개가 없었는데, 올 때는 자신들이 다녀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돌멩이를 두고 갔다. 나갈 때는 집안의 물건들이 이렇게 안 되어 있었는데, 잠깐 다녀왔더니 모양이 달라졌다. 그래서 집안에 있는 못을 모두 뽑아버렸다.”
실제 그분들이 한 이야기들입니다. 나이 많고, 특별한 비밀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 누가 그분들에게 그만한 관심을 기울이고, 감시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분들은 그런 생각에 빠졌고,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말이 안 통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느끼는 때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죠? 기도하는 내용과 시간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설명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또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게 무슨 뜻입니까? 혼자만의 중얼거림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 한 경우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답답하고, 힘든 기도도 있고, 하나님이 마음을 여시고 응답하실 만한 기도도 있다는 뜻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통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기도에서 시간과 형식만 강조되곤 합니다. 많이 기도할수록 좋다고 합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기도하는 시간이 길다는 생각들이 신앙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하는 시간이 짧으면 신앙인으로서 별로 인정받지 못 합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조용히 드리는 기도보다는 크게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걸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편한 자세 혹은 가만히 앉아서 드리는 기도보다는 두 손을 모으거나 두 팔을 높이 들고 드리는 기도가 더 간절하다고 평가합니다. 일상에서 드리는 기도보다는, 금식하며 방언 기도하는 게 더 좋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응답하신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사람의 마음을 사야 하는 일이고, 사람의 응답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듣고 보는 것의 영향을 받죠? 사람의 기준은 분명하지 못 하고, 잘못되거나 흔들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같은 맛을 내는 떡이면서도, ‘보기 좋은 떡이 맛있다’는 말도 있고, 광고를 잘 할수록 물건이 잘 팔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을 향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처럼 보고 듣는 것에 따라 달라지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때 형식과 시간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기도를 드리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기도를 인정하시고 응답하시겠습니까? 이는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다윗의 기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징계로 죽을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다윗이 기도하는 내용과 그 결과입니다. 본문 앞에서 다윗은 자기 부하 장수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저질렀는데, 그만 임신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뒤덮으려, 다윗은 결국 충성스러운 장수인 우리아를 죽이는 죄까지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를 보내셔서, 다윗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고, 다윗이 이를 인정하자 용서하시지만, 죄를 통해 잉태되고 태어날 아이는 죽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대로, 그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크게 앓게 되었습니다.
간음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지만, 자기 자식이니 다윗으로서는 사랑스럽고, 또 자기 죄 때문에 죽게 될 상황이니 너무 안타깝고 불쌍했겠죠? 그래서 아들을 살려 주시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면, 다윗은 금식하며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7일 동안 기도했습니다만, 결국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너무 힘들게 금식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왕자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상심이 너무 커서 왕의 몸과 마음이 크게 더 상할까 하는 염려 때문에, 신하들이 보고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통해 왕자가 죽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신하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목욕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 성전으로 들어가 경배한 후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차리게 하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자녀나 가족이 아플 때와 죽었을 때 중에 어느 때가 더 슬플까요? 다치고 아플 때도 마음이 아프고 힘들긴 하지만, 세상을 떠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죠? 아직 살아있을 때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지만, 죽으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을 염려해 보고하지 못 한 신하들의 판단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이처럼 전혀 다르게 행동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 아들을 대신할 다른 아들 솔로몬을 주셨고,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을 담은 ‘여디디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도 다윗의 이 판단과 기도를 받아들이셨다는 뜻인데, 하나님은 왜 다시 다윗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습니까? 다윗이 금식 기도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자기 아들을 무조건 살려 주실 거라고 확신하며 기도했기 때문인가요?
다윗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까닭을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이 하나님을 말이 통하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말이 통하는 분’ 더 나아가 마음이 통하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죽었음을 알고 난 후 다윗 왕이 예상과는 달리 행동하자,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습니다. 22절에서 다윗이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라고 답합니다. 자신이 금식하고, 울며 기도한 까닭은, 간음으로 태어난 자기 아이가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혹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바꾸셔서 살려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쓰는 표현으로는 ‘인정사정을 두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정확하심만 생각하다가는 자칫 하나님을 기계와 비슷한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계처럼 정확하시고, 엄격하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도할 것과 그렇지 않을 일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정하셨으면, 기도해도 바뀌지 않을 텐데 뭐 하러 기도하겠습니까? 바뀌지 않는데,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자신이 크게 다치거나 응급환자를 차에 태우고 병원에 급히 가는데, 도로가 많이 막힙니다. 이때 신호기에다 대고, 상황이 급하다고 부탁합니까? 아니면, 응급차를 보낼 수 있는 병원이나, 신호기를 조종할 수 있는 경찰에 연락합니까? 기계는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이지, 우리의 형편과 어려움을 듣지도 못 하고, 들어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 합니다.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계가 아니십니다. 다윗은 이를 알고 믿고 기도했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아이가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혹시... 불쌍히 여기셔서 그 뜻을 바꾸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 하나님은 기계가 아니셔서, 불쌍히 여기기도 하시고, 뜻하신 바를 바꾸시기도 하는 분’으로 믿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받아들이신 두 번째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줄 아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다윗은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죠? 그런데 아이가 죽었을 때 다윗은 오히려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의 바람과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된다는 사실을 다윗은 인정했습니다. 이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믿음이 좋다고 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놓치는 부분이 이겁니다.
선거철이 되면, 교회에서 활동하고, 봉사하는 분들이 많아지죠? 기도도 많이 합니다. 워낙 힘든 일이라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금식하며 당선될 수 있게 해달라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서 원하는 대로 좋은 결과를 얻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낙선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본 사람들 대부분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심하면 신앙을 버리기도 합니다.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면 왜 이런 모습을 보일까요? 믿음이 부족해서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어렵게 들릴 수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끄시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게 가장 좋은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다윗은 예수님이 오시기 1,000년 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원하기로는, 자기의 아들이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 살기를 원하였으나,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자기의 뜻과 바람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겨둘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뜻이 틀어지더라도, 그마저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자기는 땅에서는 왕이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게 가장 좋은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 사는 게 맞음을 알고 인정했습니다.
다윗이 왜 위대한 신앙인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왜 24절에 지혜의 왕으로 유명한 솔로몬을 다윗에게 주셨는지, 왜 그 이름을 ‘주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여디디아’라는 이름을 특별히 더해 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기도하는 자세가 하나님의 마음과 기준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데 있어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많이 기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기도하는 것도, 사사건건 기도로 아뢰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면 작정기도, 금식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처지를 보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냉정해서 말이 안 통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형편을 보시고 이끄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무조건 내 계획과 뜻대로 이루어지고 잘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이끄심을 인정하며, 순종할 줄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과 응답을 받는 데 있어, 이런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선한 이끄심에 따라 복되고 기쁘게 살았던 다윗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기억하고,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으로 기도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 가운데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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