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0319)교만을 버려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막 1장 4-11절)

청명하늘 2018. 2. 27. 18:11

교만을 버려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14-11(53)

찬송: 456(거친 세상에서; 509), 272(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330)

설교: 2017031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310일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임기 5년의 대통령이 임기 1년가량을 남겨놓고 탄핵되어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면, 5년에 한 번 있는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어야 합니다. 이 과정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았던 대통령이,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법의 심판을 받아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 무엇보다 대통령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추한 것은 당연하고, 얼마나 교만하고 뻔뻔한지, 게다가 상황이 어떤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얼마나 떨어진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의 탄핵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2/3가 찬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300명 중에서, 120가량이 대통령과 같은 당 사람들입니다. 같은 당 사람들만 반대해도 탄핵안이 통과되지 못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찬성 234표가 나와서 통과되었습니다. 전국민의 80% 정도가 탄핵에 찬성할 정도로 대통령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대통령의 고향이자 정치적으로 가장 튼튼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 경북에서도, 네 명 중 세 사람이 탄핵되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재판관 8명 모두가 탄핵에 찬성해 선고했습니다. 헌법재판관 8명 중에서 2명은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여당이 임명했고, 대통령과 같은 경상도 출신이 4명이나 있었음에도,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모두가 찬성해서 탄핵시켰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도 대통령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인정하지도 않는 것은 놔두더라도, 정말 심각하고도 충격으로 다가온 점은, 대통령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판단이 전혀 안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탄핵 여부가 헌법재판소에서 결정되기 전에도, 상식과 양심을 가진 대부분의 시민은 물론이거니와, 법 전문가들도 전원일치 혹은 재판관 8명 중에서 6명이나 7명이 찬성해서 통과될 거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망대로,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탄핵이 결정될 때 대통령은 무엇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헌법 재판관 중에서 3명이나 4명 이상의 반대로 탄핵되지 않아서 대통령직에 복귀할 거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담화문을 발표하기 위해 글을 작성하고,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했다고 합니다. 또 직원들과 함께 탄핵 기각을 축하하기 위해서 5층짜리 엄청나게 큰 케이크도 준비해 놨다고 합니다.

 

한 나라를 대표해서 일하라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가장 많은 권력을 얻은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그 정도라는 것을 보면 정말 한심스럽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대통령이 미련해서 그렇겠습니까? 미련할 수 있죠. 대통령 한 사람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똑똑하고 잘나서 청와대의 일꾼으로 뽑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렇게 문제와 현실을 파악하지 못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 한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무엇보다도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현실에 눈감고,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알아도 자신은 그래도 되는 거라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가다가는 파멸하게 된다는 모두가 아는 당연한 이 사실을, 대통령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하다가, 결국 우리나라 역사상 탄핵되어 쫓겨난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교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교만하면 진실에 눈감고, 양심에 귀를 막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나 아는 사실을 외면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죽음과 파멸이 눈앞에 있어도, 자기는 생명과 성공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이 이렇게, 사실과 진실에 대해 눈감게 만들어 파멸로 이끄는 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죄보다 교만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가 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것을 알기에,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으려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죄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217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다릅니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처음 지은 죄도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에 죄를 지었고, 그리고 그 본성은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으며,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돼라고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라 하고, 무조건 자신이 정답으로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사람은 패망의 길이 눈앞에 있음에도 깨닫지도 못 하고, 되돌아설 줄 모르니, 교만이 다른 어떤 죄보다도 가장 큰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기록할 때, 간단하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5절에서는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하고, 9절에서는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지역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어땠는지, 그래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삶과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서울, 서울 중에서도, 지식인과 부유층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5절에서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라는 말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지도층과 부유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갈릴리 지역에 있는 나사렛 마을에서 오셨는데,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지역은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이라는 말과는 반대되는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에게도 지역적 선입견이 있죠. 그것이 정답인 것은 아니고, 또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경우가 많고, 전라도 지역은 이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었고, 또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갈릴리 지역이다, 또 나사렛이라는 마을 출신이라고 하면, 교양 없고 무식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 가장 천박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도시에서 예를 들면 달동네라고 할 수 있고, 시골로 예를 들면, 옛날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바닷가 마을이나 깡촌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고 생활하신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곳은 전통적으로 율법에 관심이 없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했던 상황에서 율법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무질서하고 못 산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근본도 없고,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싹수가 노랗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식하고 막되고 어리석어서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곳, 좋은 것이 나올 가능성도 없어서 기대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고 소외받는 지역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했는지, 요한복음 1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보니, 구약성경에서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분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고, 이전에 겪어 보지 못 한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위대한 분입니다. 자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하고, 나다나엘에게 위대한 분이 나타나셨다고 자랑하며, 제자가 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다나엘이 대뜸 하는 말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였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나사렛이라는 마을에서는 그렇게 위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41절에서도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나 말씀들을 보면,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대한 분이고, 그래서 그리스도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 없는 딱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나사렛이라는 마을 출신이라는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어이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나사렛이라는 지역은 하나님의 약속도 받지 못 한 곳, 그래서 버림받은 이들이 사는 곳으로 여겨지던 곳입니다.

 

그러나 가장 거룩한 곳, 믿음의 중심지, 율법의 가르침이 가득한 곳, 가장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이라는 유대와 예루살렘과, 그리고 정반대로 가장 불결하고, 율법의 가르침이 없고, 가장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산다고 여겨지던 나사렛이라는 지역은, 이 땅에 그리스도가 왔을 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을 때는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아와서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세례를 받아들인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신앙인들의 생각으로 본다면, 복 받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소망과 간절함과 세례를 받으려는 열정은 있을지 몰라도, 어느 지역 출신이고, 무슨 전통에서 자랐다는 교만을 버릴 줄 아는 겸손이 없었고, 참된 회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나사렛이라는 구석지고 소외된 지역에서 나오셨음을 듣고는 모두 귀를 막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나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씀을 들었음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참된 회개도 없었고,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저지른 사람인지 인정하려는 겸손도 없이, 형식에 따라 세례를 받는 것에 그쳤습니다. 교만이라는 더러운 물이 가득한 그릇에 깨끗한 물 한 방울 넣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죄인으로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실 만큼 겸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죄를 회개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소원을 아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 있다는 것이 참된 예배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다고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과 노력의 헛수고와 낭비에 그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되고 거룩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나누는 기준은 바로 예배하는 사람 속에 있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신앙을 갖도록 은혜와 사랑 주셨음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가르침 받아 겸손하게 지키고 행하며 살려고 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몇 명이 있든지, 혼자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참된 예배가 됩니다.

 

그러나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처럼, 여전히 자기 고집을 버리지 못 하고, 교만한 생각으로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많은 사람이 드리고, 많은 시간을 드려도, 그것은 말 그대로 시간과 노력의 낭비에 그칩니다. 그런 마음으로 나오려거든 이 대곡교회에 나올 필요 없습니다. 집에서 기도하든지, 철야기도하든지, 부흥회 하든지 맘대로 하거나, 맘에 드는 교회를 찾아가면 됩니다.

 

신앙인들 중에도 나사렛에서 온 사람들보다는 유대와 예루살렘에서부터는 온 이들과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고, 그래서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할 만하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입니다. 하지만 유대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아온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보다 신앙생활 오래 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많은 공로를 쌓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종교적 지위로 판단해도,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예수님보다 더 좋은 신분에 있던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해 사랑한다고, 기뻐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죄가 없으심에도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되고 소외된 지역에서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오신 예수님을 향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올 때, 신앙생활할 때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신앙에서 교만한 것은 심지어 하나님도 못 고치십니다. 성경 속에서도 교만 때문에 실패하고 멸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숱하게 써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교만을 고치지 못 한 자들의 모습이 여전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사람들은 또 하나같이 하나님 뜻이다”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그렇게 응답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과 상식과 질서보다, 자기 느낌과 감정을 정답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예배하고 있어도, 지금 우리 각자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지금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 자리에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아온 자들과 같은 마음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철저히 낮추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모습을 지키고, 더욱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칭찬을 받고, 구원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