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으로 삽시다
성경: 마가복음 16장 1-11절(신 84쪽)
찬송: 161장(할렐루야 우리 예수; 통159), 165장(주님께 영광; 통155)
설교: 20170416. 주일낮예배(부활주일)
부활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간혹 부활을 소생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부활은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있고,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데, 죽은 사람이 며칠 만에 다시 살아난 사건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부활이라고 하지 않고, 소생이라고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숨을 쉬고, 음식을 먹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살아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보통 사람처럼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잠시 살아났다가 다시 죽는 소생이 아닙니다. 완벽한 죽음에서 살아나신 점에서는 소생과 같지만, 다시는 죽음을 겪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몇 년 동안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했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조차 이것을 믿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다는 것을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강조하신 말씀은 이것이 유일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기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기대조차 하지 못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숨어 지냈고, 예수님을 잘 섬기고 따르던 여인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가장 먼저 알게 된 본문 속 세 여인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 한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
이 세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1절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 세 여인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가까이서 모시고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애정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과정을 보면서 그 누구보다도 아파했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슬퍼하며 향품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 여인들이 준비해 간 향품이란 시신이 썩으면서 나는 심한 악취를 줄여주는 데 사용됩니다. 부활한 예수님께 필요한 게 아니고, 죽어 썩어가는 시신에 사용될 것들입니다. 그만큼 이 여인들조차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이 예수님 가장 가까이서 함께했던 이들마저 믿지 못 할 정도로 놀랍고 믿기 어렵지만,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지금 우리는 신앙생활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이란 기껏해야 헛것을 좇아가는 꿈쟁이들의 놀이에 불과하고, 성경이란 그저 오랜 시간 많은 사람에 의해 기록된 도덕책밖에 안 됩니다.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지금 어려움에 포기하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소망이 있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부활이 이처럼 귀하고 소중하기에 이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어려움과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병이 낫고 몇 년 더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까?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다른 것과 비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전까지 한 번도 없었던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온갖 조롱과 고난을 받으셔야 했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채찍에 맞아 몸이 찢어져야 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렸습니다. 이런 고난과 아픔이 있은 후에야 가장 큰 영광인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가신 부활과 생명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픔과 어려움을 참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조롱의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고,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은 죽음 같은 어려움에 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긴 고난과 어둠이 있고, 그 뒤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소망과 기쁨이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뒤집어 보면, 지금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 중에 있다면, 주님과 함께 부활할 때가 머지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고, 빛줄기 하나 없는 깊은 무덤 같은 절망에 억눌려 있다면, 하나님의 손으로 무덤이 열리고, 눈부신 광명이 올 시기가 가까웠음을 뜻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이들마저 전혀 믿지 않았지만 그 약속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9절에서는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셨고, 7절에서는 제자들과 베드로를 만나기 바라심을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수많은 이들 중에서 왜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만나셨습니까? 또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기 바라시면, 그냥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 되지, ‘제자들’ 속에 베드로를 포함시키지 않고, 왜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가장 먼저 만나신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9절에서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사람인데,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섬기기도 했고, 제자들이 고난이 무서워 도망간 것과는 달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도 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지만,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전에 일곱 귀신을 들렸던 여자”입니다.
이 말보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전 삶을 잘 표현하는 말이 없습니다.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 그 삶이 어떤지는 눈에 훤합니다. 귀신이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게 하지 않습니다. 귀신이 그 속에서 활동하는 한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귀신이 그 안에서 들어앉아 인간다운 존귀함과 고결함을 잡아먹어, 타락과 더러움만 나타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기에,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하고 성결해야 함에도, 귀신에 사로잡히면 짐승의 삶보다 못하게 됩니다. 짐승은 그나마 그 무리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습니다. 또 전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관심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에 들린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과 사랑을 받지 못 합니다. 자기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버림받습니다. 귀신에 들리면 삶이 사람의 삶답지 못 하게 되고, 귀신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귀신에 붙들리면 죽음과 파멸로 가게 되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붙잡혔습니다. 성경에서 7은 완전한 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일곱 귀신이라는 것은 그만큼 지독한 귀신에 들렸다는 뜻입니다. 지독한 귀신에 들린 한 여인의 생활이 어땠겠습니까? 미친 사람처럼, 가야 할 곳에는 가지 않고, 가서는 안 되는 곳만 다닙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만 하게 됩니다.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도, 죽는 것마저도 뜻대로 못 합니다.
귀신에 붙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막달라 마리아를 붙잡고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고, 귀신의 억눌림이 심해질수록 떠나게 되고, 마지막엔 가족마저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다가갈수록 저주하고 돌을 던지고 도망가기에 급급합니다.
이처럼 더럽고 비참하게 살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의해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귀신의 억누름과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족마저 저주하며 포기했던 삶이 예수님에 의해 회복되었습니다. 사람답게 살게 되었고, 사람답게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의지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처럼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매장되고 말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로서는 단지 마음이 아프고 슬픈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귀신이 자신을 공격하고, 들어와도 이것을 고치고 회복시켜줄 이가 없습니다. 다시 귀신에 의해 조종되어 사람에게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깊고도 큰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벗어날 곳 하나 없는 곳에,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홀로 버려졌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보다 못한 삶을 다시 살지 않을까 아침에 눈뜨는 것이 무섭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 처지와 아픔과 절망을 아시고, 다른 그 누구보다 먼저 만나셨습니다. 우리였으면 자신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죽인 자들 앞에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약속했던 것처럼 부활한 것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명예와 자랑과 행복의 자리를 모두 놔두시고, 고통과 깜깜해진 현실에 속이 새까매진 이를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삶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내 의지와 계획은 모두 망가지고, 그나마 가늘게 붙잡고 살아가던 마지막 소망마저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소망이 끊긴 절망의 깊은 곳에 자리하곤 합니다. 이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부활하신 주님이 소망과 회복의 약속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 스스로 귀신과 같은 고통을 물리칠 수는 없지만, 일곱 귀신을 쫓아내서 막달라 마리아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주님이, 다시 절망의 자리에 빠져드는 마리아에게 여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 각자의 아픔과 슬픔에도 관심을 갖고 찾아오시고, 붙잡아 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를 따로 말씀하시며 약속된 갈릴리에서 만나시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제자들 중에서 앞서 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도 했지만, 오늘 본문과 관련해 보면, 마태복음 16장 8절에서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을 한 인물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반석’이라는 그 이름 뜻처럼,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천국 열쇠를 약속받았습니다.
이처럼 가장 자신만만하고 앞서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이 붙잡혀 위험에 처하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베드로를 붙잡을 권리가 있는 높은 관리들 앞이 아니라, 여종 앞이었습니다. 여종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힌다고 해서, 여종이 베드로를 붙잡거나 고문할 수 없습니다. 지위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고통을 피하기 위한 변명에 그치는 게 아니고, 베드로가 드렸던 완벽한 신앙고백 자체가 헛소리에 불과함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오셨음을 진짜 믿었다면,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했겠습니까?
이를 통해, 그 누구보다 앞장서고 큰소리 냈던 베드로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고 맙니다. 사람들 앞은 물론이거니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쥐구멍이라도 숨어들어가고 싶을 처지입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자, 멀리 떨어져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입장을 아시고,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베드로를 특별히 언급하시며 약속된 곳에서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 속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뜻과 소원대로 일이 이루어지고, 욕망의 그릇들이 채워질 때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자비를 찬양합니다. 믿음이 꽤 대단해 보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고백이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할 때를 겪곤 합니다. 삶이 무너지고, 빛줄기 하나 없는 곳에 혼자 우두커니 남겨지고, 아픔과 눈물이 욱여쌀 때,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 앉게 될 때, 원망과 후회 담아 말합니다. “도대체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진짜 있으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게 합니까?” “나를 사랑하고 응답하신다더니 내 기도에 왜 그렇게 오래 동안 침묵합니까?” “내게 이 고통과 절망이 끝나지 않은 걸 보니 당신은 없습니다.” “악한 자들은 잘만 사는데, 왜 내게는 소망의 빛줄기가 안 보입니까?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그러나, 원망과 절망 때문에 불신을 내뱉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는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다시 약속하시고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여종 앞에서마저 내뱉고 말았던 베드로의 불신과 부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특별히 말씀하시며 찾아오셨다면, 고통과 좌절 때문에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고, 멀어졌던 우리도, 주님은 기억하시며 찾아오시고, 약속의 자리로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기억하시고 찾아오시고 함께하신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회복의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끄럽고 어두운 지난날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과 함께하는 회복을 품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큰 고통과 절망을 넘어 부활로 오신 주님 맞이하는 참된 부활주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주님이 고통과 절망의 자리를 지나고, 소망과 기쁨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버림받아 절망의 자리에 있고, 마지막 소망의 자리 끊긴 막달라 마리아를 먼저 찾아오신 주님이, 여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 절망과 원망으로 가득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부활의 소망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하시고, 삶을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부활신앙으로 삽시다. 너무 크고 긴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었으면, 이제 부활의 아침이 다가왔음을 소망으로 가집시다. 절망과 좌절에 익숙해진 어둠에서 일어나 소망과 기쁨이 가득한 삶으로 부활합시다. 교회답지 못 하고, 신앙인답지 못 했던 우리의 옛 모습에서 깨어나, 주님이 도우시고 응답하시는 좋은 교회와 신앙인으로 부활합시다.
부활의 주님으로 오심을 우리 삶 속에서 인정하고, 주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확실하게 붙듦으로써 각자 삶이 회복되고, 주님이 함께하시며, 주님의 친절한 인도를 받아, 모두 소망과 기쁨과 열매가 가득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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