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권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장 21-28절(신 53쪽)
찬송: 273장(나 주를 멀리; 통331) 585(내 주는 강한 성이요; 통384)
설교: 2017042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전 대통령이었던 박근혜 씨가 헌법을 무시하고,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지난 3월 10일 탄핵되어 대통령이라는 공무원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쳤다면, 올 12월에 다음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를 했을 터인데, 탄핵됨으로써 몇 개월 앞당겨졌습니다. 이렇게 큰 선거가 다가올 때 간혹 이런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내가 투표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누구를 뽑든 나와 상관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난 18대 대선일에 투표할 수 있는 인구가 4천 만 명이 넘었고, 실제 투표한 사람은 3천 만 명이 넘었습니다. 3,4천 명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해도 큰 영향력이 없는데, 하물며 그보다 만 배 더 적다면 한 사람의 투표가 큰 의미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정말 하찮아 보이는 표가 모여서, 누구를 뽑을 수도 있고, 낙선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작년 4월 13일에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당시 전체적인 여론으로는, 여당인 새누리당이 당연히 과반수를 훨씬 넘게 차지하고, 전체 300석에서 200석을 차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여론의 예측과는 너무 다른 결과가 나타났고, 이를 시작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난 총선의 결과 때문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일들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여러 일이 있겠지만, 이것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표결이 붙여지기 며칠 전인 12월 5일에 상황이 많이 바뀌었음을 상징할 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국회에서 청소하는 분들, 공식적인 직함으로는 ‘청소노동자’라고 불리는데, 이분들이 국회의 정식 직원이 된 것입니다. 바꿔 보면, 이분들은 몇 년, 혹은 10,20년 국회에서 청소하는 일을 했지만, 정식 직원이 아닌, 아르바이트를 길게 하는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국회에서 다수당이 바뀌자 청소노동자들을 모두 정직원으로 채용했습니다.
이분들이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몇 년씩 요구했지만, 계속 묵살되었습니다. 당시 이 일을 담당하고 있던 국회의원이 선거 운동할 때와, 당선 후의 모습을 잠깐 보겠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그 누구 할 것 없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자신을 낮춥니다. 도로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절할 정도면 얼마나 겸손합니까? 연세 많은 분들, 장사하는 분들처럼 특별히 높임을 받는 분들이 아님에도 저렇게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대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청소하는 분들이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찾아왔을 때의 모습입니다. 어때 보입니까? 당선되기 전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죠? 어떻게 바뀌었나요? 투표 전에는 겸손했다가, 당선 후에는 교만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청소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가장 큰 당이 바뀌었고, 청소노동자를 정식 채용했습니다. 청소노동자들이 정식 채용된 후의 모습들인데,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도가 아니라, 국회의장이 된 분의 모습이 누군가와는 전혀 다르죠?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요?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국회의원이 얻는 권위, 권세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앞 사람은, 국회의원으로서 갖는 권력과 권위가 국회의원이라는 그 자리를 통해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국회의원 자리에 앉기 전에는, 그 자리를 만들어 줄 투표권자들에게 겸손하고 대합니다. 하지만 일단 국회의원이 되면, 더 이상 아부하거나 자기를 낮출 필요가 없습니다. 최소 다음 선거운동 기간이 다가올 때까지는, 일반인들보다 높은 국회의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국회의원들은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자신의 모든 권력과 권위가 국민들로부터 나온다 여깁니다. 그러니 당선 전과 후의 모습에 큰 차이가 없고, 당선되기 전에 약속한 것을 지키고 이루려고 노력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청소노동자가 아니라, 자기를 세운 권세자, 자기의 자리를 만들어 준 권위자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 그리고 가장 큰 원칙인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고,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입니다. 이처럼 권위, 권세, 권력이란, 가진 힘,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진 권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한 곳에만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서울에만 성전이 있으니, 매주 찾아가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요즘이야 오갈 수 있는 여건이 좋아도 매주 오가기 쉽지 않으니, 성경 당시에는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곳곳에 회당이라는 곳을 세우고, 보통 때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교육하고, 안식일이 되면 예배처로 사용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할 때, 성경과 율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별다른 조건 없이 그들에게 설교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상황에서 설교 부탁을 받아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우리식으로는 설교로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회당에서는 이름 있고, 지식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자주 부탁했던지라, 유명한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습관처럼 매주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이전에 들어보지 못 한 말씀이라며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이 서기관들과 달리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기관’으로 번역된 말은, ‘율법학자’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리던, 입으로 전해지던 율법을 연구하고 이것을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연구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글로 전해지는 성경은 너무 귀해서 직접 보거나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경 일부를 외우고 연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줍니다. 이것을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엔 이런 문화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만, 어렸을 때만 해도 주일에는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못 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인데, 서기관들은 이것을 어떻게 지키는 게 거룩하게 지키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1km 이상을 걸으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고, 물건을 사고파는 것마저 안 된다고 금지시켰습니다. 이들은 안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찾지 않고, 사람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려 노력하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이처럼 이들이 사람에게서 그 권위를 찾으려 했으니, 이들의 삶과 가르침에는 아무런 권위와 권세가 없었습니다. 권세, 권위는 사람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사람만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영혼을 사로잡고 괴롭히는 귀신까지도 따를 수밖에 없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서기관들의 권위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이 바로 뒤에서 나옵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 23절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죠? 어떻습니까? 귀신에 들린 사람들 중에 정상적인 사람이 없죠? 흔히 ‘미쳤다’라는 말이나 귀신 들렸다는 말이나 차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귀신은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사람답지 못 한 일을 하게 만듭니다. 온전한 사람이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도 거리낌 없이 합니다. 이렇게 귀신은, 사람에게 좋은 쪽으로 도움을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있던 귀신에 들린 사람을 단순히 ‘귀신에 들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앞에 ‘더러운’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귀신은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더러운 일, 나쁜 일만 하게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그냥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해도 그 뜻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귀신의 장난질과 괴롭힘이 지독했다는 뜻입니다. 보통, 귀신 들린 정도로는 부족할 만큼 너무 심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심하고 지독한 귀신이 들린 사람은, 세상 그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을 도울 만한 사람은 주위에 한 명도 없습니다. 귀신이 시키는 대로, 귀신의 명령대로 사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귀신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였을 것이나, 귀신을 복종시킬 만한 다른 권세를 찾지 못 했습니다. 자기들의 습관에 따라,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을 것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가 없으니, 귀신이 이에 따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이와는 다릅니다. 그 권위는 어둠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풀어주는 권세입니다. 죄로 옭죄는 귀신의 권세와는 반대로,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권세입니다. 좌절하게 만드는 귀신의 권세와는 달리,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힘과 능력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권세입니다. 어둠의 권세는 죄를 통해 사탄의 종노릇하며 살도록 하지만, 예수님의 권세는 회개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도록 하는 권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세가 더러운 귀신의 권세보다 크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가족으로부터도, 이웃으로부터도, 당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 했던 사람도, 오직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권세는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 하고, 저항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권위의 계급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권위는 짐승 위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짐승을 부릴 수 있고, 길도 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위에 귀신의 권세가 있습니다. 귀신의 힘과 권세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귀신에 억눌리고, 귀신에 의해 조종됩니다. 하지만 이런 귀신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귀신의 권세보다 강하기 때문에, 본문 속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 하고 떠나게 되는 더러운 귀신처럼, 아무리 크고 강한 귀신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고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저 짐승을 키우고, 부리는 권세에 만족하며 살면 될까요? 귀신의 권세에 눌려서 귀신의 심부름꾼 노릇하며 살면 될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귀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귀신의 권세를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귀신의 권세에 억눌려. 귀신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귀신의 힘과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귀하게 사는 길,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귀신의 힘과 권세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이 하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는 것입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 중에, ‘예수님 찬양’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이것이 1절이고, 5절이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내 권세’입니다. 5절 가사처럼, 예수님의 권세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면, 더러운 귀신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그 권세가 우리의 권세가 되고, 우리가 귀신에 억눌리지 않고, 귀신의 권세를 이기고, 그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귀신의 힘과 권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권위를 힘입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권세를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도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지만, 믿고 구원을 얻은 게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도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고, 자신의 삶을 회개해 돌아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방에 단단한 벽처럼 절망이 우리를 에워싸고, 어디를 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고, 헤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라는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힘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에 억눌리고, 귀신의 명령에 따라 조종되어도 해결하고 벗어날 길과 힘이 우리에겐 없지만, 귀신이 따를 수밖에 없는 큰 능력과 권위가 주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힘이 됩니다. 세상을 봐도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안 보이고, 각자가 처한 어려움에 좌절할 수밖에 없더라도, 가장 강한 힘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이 가지신 이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한, 우리는 어둠 속에 있어도 빛줄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하더라도, 생명과 부활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권세를 믿고 의지하는 한 우리를 이길 악한 세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악한 모든 것을 물리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주님의 권세를 힘입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기쁨과 소망 속에 살아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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