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0507)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순종이 먼저입니다(막 1장 29-39절)

청명하늘 2018. 3. 12. 23:16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순종이 먼저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129-39(54)

찬송: 255(너희 죄 흉악하나; 187), 401(주의 곁에 있을 때; 457)

설교: 2017050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마가복음서에는 어떤 시험을 받으셨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다만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며, 천사들이 수종들었다는 내용만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지만, 세 가지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다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시험을 이기신 과정에서 우리의 판단과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거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성전 자체의 높이는 15-20m정도였지만, 꼭대기는 이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대곡교회를 예를 들면, 교회 건물 높이는 5m 정도지만, 꼭대기는 십자가가 있어서 10m정도 되는 것처럼, 성전 꼭대기는 50m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다치지 않게 하실 거라며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이 시험을 들으시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기셨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직접 보여주었을 것 같습니다. 직접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 능력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을 사탄과 수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께 돌멩이들을 내밀면서 그것으로 떡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온갖 기적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시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시험도 만약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고, 그리고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처럼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탄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돌을 떡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굶주린 배를 채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탄의 시험을 이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고 순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이 시험에 대해 우리의 기대와 달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계산에도 맞지 않는 답처럼 보입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시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일을 시작하시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탄의 이 시험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고, 사람이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모두 이루어지게 하시지 않습니까? 사람은 모두 건강하기 바랍니다.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합니다. 바라는 일들이 모두 잘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멀리 있는 일이야,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문제고, 지금 당장 힘들고 아프고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이를 위해서 다른 길 따라가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우리의 이 소원과 기도대로 응답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과 기도를 모르신다고 해도 이상하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아심에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땀 흘려 버는 돈과 양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너무 어렵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우리가 모두 찾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들 중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 21절을 보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셨고,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라고 하신 것을 보면, 같은 날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을 방문한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과 베드로 장모의 병을 한 날에 고쳐주신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병을 고치는 일이 우연히 한 날에 같은 사람에 의해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사건이 같은 날에 예수님 한 분에 의해 일어나자, 귀신도 쫓고, 병도 고치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이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자,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는데, 33절에서 장소가 그 문 앞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21절에서 안식일에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때부터 시작된 일이 모두 한 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날에 예수님의 행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나와서 곧 바로 베드로의 집에 있는 베드로 장모를 고치시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베드로의 집에 계신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찾아온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 있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내용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 뒤에 나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말하려고 했다면, 같은 날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과,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마가복음에는, 다시 모든 병자를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가 크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베드로는, 가장이라는 부담, 장모가 병들어 있다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는 베드로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짐으로 남아 있던 장모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이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고 법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오면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까지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이들이 많은데 베드로가 선택하고 따랐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각오와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아오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고, 자기들이 필요로 했던 것들이 채워지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자기들의 바쁜 일손을 멈추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며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그날 일하지 않으면 다음 날 굶주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손해와 굶주림을 각오하고, 예수님이 계신 베드로의 집까지 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혼자서는 움직이기 어려운 환자들을 데리고 오느라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쉽게 이길 수 없는 귀신 들린 사람들을 베드로의 집까지 데려오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귀신 들린 이들을 데리고 오는 이 사람들의 수고를 보시고, 모든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셔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베드로의 순종과는 달리,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왔습니다. 먼저 호기심 때문입니다. 그 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 한 일들이 자기들 눈앞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 안 되는 귀신들마저도 예수님 앞에서는 쩔쩔매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쫓겨나는 장면을 직접 본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하고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몇몇은 좋은 구경거리와 재미삼아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해서입니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병 때문에 고생하거나,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런 간절함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찾아온 이들보다는 더 절박하고 간절할 수는 있지만,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채워지고,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등지고 자기들의 삶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환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는 모습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나면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조차 기억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이 어떻게 환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어떻게 내쫓으셨는지를 기억하고, 본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그 광경을 직접 봤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사람도, 귀신에 조종당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시고, 무엇 하는 분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뛰어난 의사, 혹은 귀신을 쫓아내는 신기한 사람 중 한 사람밖에 안 됩니다.

 

재미와 구경삼아 온 사람들이나, 병이 낫고 귀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나아온 사람들이나,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원하던 것들이 채워지고 나면 돌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것을 버릴 만큼 간절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없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찾아온 이유를 잘 알고 계셨지만, 병과 귀신에 매여 사는 그들의 삶이 불쌍해서 고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단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욕심의 그릇들을 채우시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는 말씀처럼, 죄를 깨닫지 못 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그 부르심에는 그렇게 무관심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에 대해 귀를 막았던 이들이, 자기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문제를 해결 받고 싶은 욕심에 주님 앞에 나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셨지만,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35절에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욕심만을 생각하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피하신 것입니다.

 

36, 37절에서는 베드로와 몇 사람이 한적한 곳으로 피하신 예수님께 찾아와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함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신 것이 아니라,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시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욕심만을 위해 오는 사람들, 자기의 문제만 생각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향해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에는 모든 것을 걸고, 순종하며 따르는 베드로, 이와는 달리 자기 것을 희생할 생각이 전혀 없이, 욕심만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 두 가지가 철저하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 두 모습을 이어서 기록한 까닭은, 지금 우리가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모습인지 살펴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쁘고 피곤한 몸으로 예배드리러 나오셨죠? 바쁘면 바쁜 대로, 쉴 때는 쉬는 대로,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것을 뒤로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것 잘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교회에 다니는 교인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인이 되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최소한 호기심과 눈요기를 위해 오신 분은 없겠지만, 주님의 명령과 말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오직 내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되고, 내가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해결해 주시겠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오직 이것만을 위해 이 자리에 있다면,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순간 우리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이고, 혹시 우리가 주님 곁에 머물러 있으려 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피하시고, 우리의 욕심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호기심이 해결되고, 욕심이 이루어지는 순간, 주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게 되고,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긴 굶주림 끝에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은 이 시험을 통해, 예수님이 오직 자기 욕심과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유혹에 넘어가셨으면, 주린 배가 채워져 배부른 순간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의 이 시험에 넘어가시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며, 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순종할 때, 영생의 복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더욱 간절히 주님의 것을 찾고 순종하라고 하시고, 믿고 순종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각자 욕심과 소원이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보다 주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순종이 먼저고, 순종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복을 주심을 기억하고, 더 순수한 믿음과 순종을 보임으로써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는 복된 삶을 사는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